김천마을이야기(179)
양천동편
(지난호에 이어 계속)
조마방면의 안정계마을로 부터 거창방면 국도와 연결되는 삼거리는 예로부터 장승배기로 불리는데 이곳에 조선시대말까지 주막과 장승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장승배기 전경
양천2동으로 속하는 신기(新基)와 개울내기를 거쳐 안으로 들어서면 하리로 불리는 양천3동이 자리 잡고 있다.
하리(下里)는 벽진이씨와 화순최씨 집성촌으로 할미바위와 마주하며 사모바위 전설을 꽃피웠던 모암산의 사모바위가 이 마을 입구로 옮겨져 있다.
마을입구에는 이 마을 출신으로 육당 최남선이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청빈한 관리로 꼽았던 노촌(老村) 이약동(李約東) 선생의 신도비가 우뚝 서있다.
▲노촌 이약동선생 신도비
이약동선생은 제주목사, 전라도관찰사, 호조참판 등 40여년간 관직에 있으면서 부임지에서 마다 선정을 베풀어 청백리로 명성이 자자했다.
76세에 고향인 하로마을로 낙향 했을 때 초가집 한 채가 가진 재산의 전부였다고 한다.
낙향하면서 식솔들에게
“내살림 가난하여 나누어 전할 것이 없고
오직 있는 것은 쪽박과 낡은 질그릇 뿐이네
황금이 가득한들 쓰기에 따라 욕도 되거늘
차라리 청백으로 전함만 못하리”라는 시를 남겼다.
특히 제주목사 재임시에는 선정에 감동한 백성들이 생사당(生祠堂)을 지어 봄,가을로 제사를 드렸다하고 제주도에서는 유명한 괘편암(掛鞭岩)과 투갑연(投鉀淵)전설을 남기기도 했다.
또 화순최씨 가문의 최선문(崔善門)선생은 문종때 공조판서를 역임했는데 훗날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고향으로 낙향해 세조의 부름을 끝까지 거절한 절의충신으로 공을 따르던 점필재, 김종직은 “송죽같은 지조요 물과 달 같은 정신을 지닌 참 선비”라고 찬시(讚詩)를 바쳤다.
중리(中里)와 음지(陰地)마을을 지나면 성산이씨 집성촌인 상리(上里)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양지바른 마을이라 하여 양곡(陽谷)으로도 불리는 양천6동으로 상리와 음지마을 중간에 개가 누워있는 형상의 바위가 있다하여 이름 붙여진 와견촌(臥犬村), 와개촌을 불린 마을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폐동이 되고 개형상의 바위만이 마을입구를 지키고 있다.
▲상리와 와개촌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불렸던 개바위
상리마을 뒤로는 고성산자락인 매봉(鷹峰)이 솟아있는데 풍수지리로 볼 때 이 산은 매의 형상인지라 그 아래 닭이 앉은 터에 자리잡은 모 집안에서 흉사가 자주 발생하자 이주를 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중리에서 새마을로 넘어가는 하로고개는 옛날 이 고개 정상부근에 샘이 있었는데 이 샘에서 물이 많이 나면 하로마을의 한 집안에 과부가 많이 생기고 물이 나지 않으면 또 다른 집안이 번성한다는 속설이 있어 분쟁끝에 샘을 메워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글/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송기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