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마을이야기(182)
성내동편
자산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평화동과 남산동,모암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성내동은 조선시대말까지 현재의 중앙초등학교로부터 김천교육청, 자산에 이르기까지 고성산이 능선으로 이어져있어 마을이 거의 형성되지 못한 지역이었다.
1905년 평화동에 철도역이 설치되면서 고성산과 자산 사이로 철로가 뚫리고 김천시장의 상거래 규모에 눈독을 들인 일본 상인들이 대거 용두동일대에 정착하면서 자신들의 상권을 확장할 목적으로 평화동의 김천역과 김천장을 연결하는 도로를 개설하게 되면서 성내동일대에 비로소 시가지가 형성되었다.
▲ 1905년 경부선 철로가 개통되기 전까지 고성산과 이어져있던 성남교 일대
성내(城內)라는 지명은 조선시대말까지 남산동에 있었던 김천역으로부터 연유가 되었는데 과거의 역은 교통 및 통신 기능과 함께 군사적 기능도 함께 수행하여 성(城)의 개념으로도 이해되었기 때문에 자산일대는 남산동에서 볼 때 성의 안쪽에 해당한다하여 성안이라 부르고 성내(城內)라 적은데서 연유되었다.
1914년 한일합병 후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모암동의 상신기와 평화동의 갈마동 일부를 떼어와 죠나이마치 즉 성내정(城內町)이라 했다가 1946년 성내동으로 고치고 1962년 성내1,2동으로 나뉘고 1983년 다시 합했다가 이후 성남동을 거쳐 2008년 용암동과 합쳐져 자산동으로 바뀌었다.
옛 성내동은 구릉지로 형성되어 마을이 별반 형성되지 못했는데 자산마을과 뒷방마, 물령동 등 3개 마을이 자산자락에 있었다.
▷자산마을
자산자락에 있었던 마을로 해가 뜰 무렵이면 산이 자줏빛으로 변한다하여 자주색자(紫)자에 볕양(陽)자를 써서 자양산(紫陽山)또는 줄여 자산(紫山)이라 했다 전한다.
옛 기록에 따르면 1758년 김산군수 윤담이 김종직, 최선문,이약동, 김시창, 조유 등을 모신 감천면 이화리의 경렴서원을 자산 남쪽으로 옮기고 군수 자신이 상량문을 썼다고 하는데 1868년 서원 철폐령으로 헐리고 말았다.
▲ 남산공원에서 바라 본 자산전경
또 자산에는 조선시대 들어 박탈당한 역리(驛吏)들의 과거응시권을 되찾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김천역리 임천강(林千江)을 제향한 계적사(啓迪祠)라는 사당이 있었다.
임천강은 대항면 복전동 출신으로 대대로 김천역리를 세습했는데1566년(명종21년) 경상감사 강사상의 부임시 김천에서 진주까지 수행임무를 떠났다가 남명(南冥) 조식(曺植)으로부터 “향리나 역리는 모두 고려 충신의 후손인데 향리는 과거에 응시할 수 있고 역리는 그렇지 못함은 역리들 스스로 권리를 포기 한 것이다”라는 가르침을 받은 후 십 수 년의 노력 끝에 1581년 (선조19년) 선조가 헌릉에 행차했다가 환궁하는 앞길을 막고 역리의 과거 응시권을 달라는 상소를 올려 마침내 허락을 받아낸 인물이다.
이후 과거에 급제한 임천강은 관직에 나가 임진왜란때 전공을 세워 공신록에 오르고 이조참의까지 역임했는데 공의 사후 전국의 역리들이 뜻을 모아 김천역이 바라다 보이는 자산남쪽에 은덕을 기리는 사당을 짓고 매년 제사를 지냈다고 하는데 지금은 정확한 자리조차 확인할 길이 없다.
▷뒷방마.물명동
지금의 성남교와 김천교육청사이에 품삯을 받고 수레에 짐을 날라다 주는 마부들이 사는 마방(馬房) 있었다고 하는데 김천역의 뒤쪽에 있는 마방이란 뜻으로 뒷방마라 한 것으로 보인다.
또 교육청 맞은편 충혼탑아래에는 물명지란 못이 있음으로 해서 물명동으로 불린 작은 마을이 있었다.
▲ 물명지란 못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점. 물명길이란 지명이 흔적으로 남아있다.
<글/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송기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