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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종합

출향인 칼럼 - 비, 비, 비, 비의 추억

관리자 기자 입력 2009.07.16 00:00 수정 0000.00.00 00:00

박인기 경인교대 교수

 우두커니 벤치에 앉아 비를 바라본다. 문득 송설학창 중1 고1 단층 목조 함석지붕으로 된 건물의 함석지붕 골을 따라 떨어져 마당 자락을 가지런히 파내던 낙수(落水)물 행렬들이 떠오른다. 비는 추억의 상관물이다. 비는 현존의 난마 같은 삶을 가라앉히고 잃어버렸던 시간의 형해들을 의식 저 아래 편에서 깨어나게 한다.


 어린 시절, 비 내리는 날은 무언가 음습한 상상력이 내 안에 웅크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시절 내리던 비는 우리를 가두어 놓았다. 비 오는 날은 갈 데가 없다. 그저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낙수 지는 빗방울을 쳐다보노라면 지붕 석가래 어디선가 해묵은 구렁이 이야기 같은 전설들이 상상력의 울타리를 넘어서 살아나올 것 같았다.


 비 오는 툇마루에 나와 앉으면 장독대 옆 억세게 자란 홍초나 맨드라미가 후줄근히 서서 유령처럼 형체를 곧추세운다. 비안개와 저녁 아궁이 지피는 삭정이 연기에 휩싸여 맨드라미와 홍초는 화사한 꽃이라기보다는 요상한 무서움의 분위기를 빚어내었다. 이 모두는 눅눅하고 추지고 꿉꿉한 여름비의 우울한 질감 때문에 생겨나던 우리 세대의 느낌들이다.


 툇마루에서 바로 보이는 토담 하나를 격한 뒷집 초가에도 비는 내린다. 추녀 아래, 빈 빨래줄 사이로 빗줄기 추적거리면 얼마나 고즈넉한 쓸쓸함이 빚어지던지. 문득 서울로 돈 벌러 갔다는 내 또래 미숙이의 얼굴도 빗줄기 위로 떠오르곤 했다. 비란 참 묘한 것이다.


 그런 비를 요즘 아이들이 알까. 비오는 날이면 인터넷 PC 방에서 죽치고 게임에 몰입하여 시간을 꼴깍 죽여 내는 요즘 아이들의 모습과 비교하면 우리들의 ‘비오는 날’은 권태와 응시를 다 거느리고 있었다고나 할까. 비와 더불어 우리들 감관(感官)은 생동하는 자연의 모습에 왜곡 없이 감응(感應)하였다. 궁핍했지만 그렇게들 아름답게 감수성을 길렀다.


 우리 친구들의 로맨스 추억 또한 비와 연관된 것이 많다. 그 무렵 1960년대식 연애담의 핵심은 비를 끌어들인다. 남녀가 함께 비를 맞으며 걷다가 마침내 비 피하는 공간으로 이어지면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는 부지불식간의 입맞춤의 장면으로 연결되는 도식을 보여준다. 요즘이야 첫 키스를 언제 어디서 했느냐는 물음이 흔한 인사처럼 되었지만 그 무렵이야 입맞춤만으로도 운명적 사건이 되기에 충분했다.


 C군은 비오는 날 좋아하는 소녀에게 짐짓 우연히 나타난 것처럼 해서 우산을 펴 주었다. 그것도 꾸준히 몇 번씩 시도를 해서 마침내 우산 속 로맨스를 만들었다고 지금도 너스레를 떤다. 참으로 60년대 방식이다. 농촌 출신 K군은 고2 여름방학 때 사모하던 여학생과 우연히 호두를 함께 따다가 비를 만나고 비를 함께 피하던 건초저장 헛간에서 운명적 첫 키스를 했단다. 약간의 과장이 없을 리 만무하지만 그때는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그방면의 선수들은 상투적인 버전이라 깎아내리지만 그래도 나는 들을 때마다 듣기에 좋다.


 송설 학창에서 연유되는 비의 추억은 어디서부터 우리를 일깨워 오는가. 그것은 아마도 여름날 체육시간 운동장 그 무성한 플라타너스 넓은 잎으로 후드득 떨어지던 빗줄기 소리 아니었을까. 워낙 키 높고 가지 많은 플라타너스가 하늘을 이고 있어서 여간 굵은 빗방울이 쏟아 부을 때까지는 우리는 비 안 오는 셈 치고 열심히 볼을 찼다. 정말 그랬었다.


 그러다가는 마침내 빗속으로 나아가 온몸을 강한 빗줄기에 내맡기고 비에 적시며 축구를 했다. 몸을 내어 지르며 달리는 동안 땀이 빗줄기 속에 함께 씻겨 내려가는 정화감, 그건 일종의 엑스타시이었다. 참으로 시원하고 통쾌한 경험이었다. 비와 인간의 만남은 본래 그러한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비 제대로 맞는 경험을 박탈당한지 오래 되었다. 비와 혼연일체로 젖어 청춘의 세례를 받은 곳이 송설운동장이었다. 그것은 청춘의 의식 같았다.


 비가 오면 함성이 터져 나오는 날도 있었다. 오후 일정이 풀베기 작업이나 송충이 잡기 작업으로 예정되어 있는 날 점심나절부터 비가 내리면 환호가 일었다. 작업이 취소되기 때문이다. 집단체조나 단체 행사가 있는 날도 비는 우리 편이었다. 체육복 준비를 안 해 온 학생들에게도 비는 구세주이었다.


 송정 뒤쪽 산록에서부터 비구름이 낮게 깔리어 퍼져 오고 문득 보랏빛 서늘한 바람이 나무들 사이로 휘몰아 오면서 교실 창 옆 오동나무 큰 잎사귀에 후드득 소리가 나기 무섭게 쏟아지는 비! 아침에는 아무 징조도 없다가 이렇듯 오후 나절부터 줄기차게 쏟아지는 비를 어둑한 교실에서 지켜보면 귀가길이 아득하게 멀어 보였다.


 농소, 어모, 개령, 하강, 조마, 태화 등지의 자전거 통학생들에게는 삼십 여리를 웃도는 거리이다. 자전거 끌고 맞바람 잔뜩 섞인 빗줄기를 가슴으로 밀어내며 가야 하는 날이면 적진을 필마단기(匹馬單騎)로 뚫어야 하는 장수의 기상이라도 있어야 했다. 그깟 종이우산이나 비닐우산은 추풍령 비바람 앞에 한갓 허접대기에 불과했다. 그런 날을 수도 없이 겪으면서 학교를 드나들었다. 그렇게 학교를 다녔던 것만으로도 우리 스스로는 공로가 창창하다. 우리와 함께 비를 맞았던 송정의 낙락장송들이 그 공로를 증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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