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성면 양각리 모산마을 입구에서 마을을 지켜준다는 수문암(守門岩)을 지나 왼편으로 접어들면 묵방골(墨坊谷)로 불리는 깊은 골짜기가 나타난다.
콘크리트 포장이 되어있다고는 하지만 좁기가 그지없는 농로를 따라 지루하리만큼 한참을 들어가면 조선 문종 때 공조판서를 역임하며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신이자 청백리로 기록된 문혜공 최선문의 유택(幽宅)이 자리 잡고 있다.
묵방골은 덕대산 자락으로 예부터 하로마을 화순최씨와 벽진이씨 가문의 선산으로 이어져왔는데 조선전기 이 고장을 대표하는 선비이자 청백리로 꼽히는 동대(東臺)와 노촌(老村) 두 분이 한 골에 계시는 형국이다.
묵방저수지를 지나 오른편으로 다시 접어들면 큼지막한 신도비가 나란히 섰는데 왼편이 동대선생이요 오른편이 노촌선생의 신도비다.
원래의 신도비는 실전되고 1992년 후손들이 새로이 세웠는데 전하는 말에 따르면 공의 장남인 최한공(崔漢公)과 친구이며 동대선생을 지극히 따르던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이 비문을 찬(撰)했는데 무오사화로 점필재가 화(禍)를 당한 후 후손들이 인근에 비를 묻었는데 이후 찾지를 못했다고 한다.
신도비로부터 안쪽 산기슭으로 조금 더 오르니 위로부터 문혜공과 배위되시는 안동김씨의 합분(合墳)이 자리 잡고 그 아래로 부친되시는 문정공(文貞公) 최자강(崔自江)과 진주강씨의 합분이 있으며 그 아래로 문혜공의 장남인 최한공의 부인이자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선생의 손녀인 오천정씨의 묘소가 차례로 자리하고 있다.
문혜공이 부친의 묘소 위쪽으로 자리를 잡은 즉 역장(逆葬)이 된 연유가 자못 궁금했는데 문혜공의 17대손인 최준동(86세)씨에 따르면 부친인 최자강이 광양의 유배지에서 고향으로 귀가하던 중 구례군 산동에서 운명하자 식음을 전폐하고 7일간 곡(哭)을 하던 부인 진주강씨마저 순절하기에 이르러 부득이 구례에서 장례를 치렀다가 문혜공 사후 후손들에 의해 이장된 때문이라고 한다.
최선문은 화순최씨로 중부령(中副令)을 지낸 최자강의 아들로 양천동 하로에서 1400년(정종2)태어나 자는 경부(慶夫), 호를 동대(東臺)라 했다.
1420년(세종1) 20세에 문과에 급제했으나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하로에 은거하며 학문에만 전념하다 부친의 간곡한 요청에 의해 1421년(세종3) 지평(持平)으로 관직에 잠시 나아갔다가 다시 향리에 은거함을 반복했다.
1451년(문종1) 문종이 공의 명성을 익히 알고 이조판서를 제수했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재차 공조판서직을 내리자 “신하된 도리로 임금의 뜻을 거듭 거스를 수 없다”며 출사했다.
문종은 공의 학문을 아끼시어 크고 작은 정사를 처리함에 유독 공에게 의견을 물었고 친히 화원에 명하여 공의 초상화를 그리게 하고 이를 하사하여 극진한 신임을 나타냈다.
‘교남지(嶠南誌)’에서 이르기를 “최선문은 맑고 겸손함을 표현함으로써 관가를 다스리기를 집같이 하고 임금 섬기기를 부모같이 했으며 송죽 같은 지조와 물과 달 같은 정신을 지녔다”라고 적었다.
1453년(단종1) 계유정난(癸酉靖亂)을 일으킨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하고 왕위를 찬탈하자 미련없이 관직을 버리고 하로로 낙향했는데 세조가 공을 따르는 선비들이 많음을 알고 회유하고자 좌찬성(左贊成)을 제수했으나 끝내 조정에 나아가지 않았고 “내 죽더라도 명정(銘旌)에 좌찬성직을 절대 적지 말아라”고 까지 하였다.
조선후기 실학자 이중환(李重煥)은 ‘택리지(擇里志)’에서 “최선문은 노산군(端宗)을 위해 절의를 지켰다”라고 기록해 공의 절개를 추앙했다.
운명직전 자손들에게 내린 경계문(鏡戒文)에서 “형은 화애롭고 동생은 공손함이 가정의 화평이요, 성인의 훈계는 분명 떳떳한 도리를 도우리. 우리 최씨 세세의 덕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성관을 하사받을 때 일을 모름지기 보거라”라고 했다.
1456년(세조2)공이 졸(卒)하자 세조는 예관(禮官)으로 유호인(兪好仁)을 보내고 청백리에 녹선함과 함께 문혜(文惠)라는 시호를 내렸다.
점필제 김종직은 만사(挽詞)에서 “오복(五福)을 다 갖춘 인간은 어렵지만 하나의 결점도 없는 선생은 성정이 지극히 너그러웠다”라고 적었다.
슬하에 5남4녀를 두었는데 한공(漢公), 한후(漢侯), 한백(漢伯), 한번(漢藩), 한남(漢南) 등 다섯 자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는 기록을 남겨 세상 사람들이 하로마을을 가리켜‘오자등과방(五子登科坊)’으로 부르기도 했다.
<글/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송기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