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묘지기행(6)
청백리 이조참판 평정공 이약동(李約東)
들녘이 황금물결로 넘실거리고 산허리를 휘감아 흐르는 형형색색의 단풍이 흐드러진 어느 가을날,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이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청렴결백한 관리로 꼽은 평정공(平靖公) 이약동선생의 묘소를 찾았다.
구성면 양각리 모산마을 묵방골 끝자락에 문혜공(文惠公)과 지척에 위치한 평정공의 묘소는 청백리의 표본에 걸맞게 검소하고 단아하기 그지없다.
묘역입구에 세워진 신도비를 지나 비탈을 조금 오르니 조부모 되시는 군기소감(軍器少監) 이존실(李存實)과 성산배씨 합분이 맨 위에 자리를 잡고 그 아래로 평정공과 배위되시는 완산이씨의 쌍분, 맏아들인 경원(庚元)의 쌍분이 차례로 나타난다.
평정공은 1416년(태종16) 양천동 하로마을에서 해남현령을 역임한 벽진이씨 이덕손(李德孫)과 고흥유씨 사이에서 태어나 자를 춘경(春卿), 호를 노촌(老村)이라 했다.
어릴 때 이름은 약동(藥童)이라 했는데 이는 오래도록 아들을 얻지 못한 모친이 금오산 약사암(藥師庵)에 백일기도를 드린 끝에 얻은 아들이라는 뜻을 담았다 전한다.
소년기에 개령현감을 역임한 영남의 대학자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의 문하생으로 수학하였고 강호의 아들인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봉계출신 매계(梅溪) 조위(曺偉) 등과 교우하였다.
26세 되던 해인 1442년(세종24) 진사시에 합격하고 1451년(문종1)증광문과에 급제한 이래 사헌부감찰(39세), 성균관직장(43세), 청도군수(44세), 선전관(49세), 구성부사(51세), 제주목사(55세),경상좌도수군절도사(59세),사간원대사간(62세),경주부윤(63세),오위도총부부총관(66세), 호조참판(68세), 전라도관찰사(71세), 이조참판(72세), 개성유수(74세), 지중추부사(75세)에 이르기까지 40여년간 주요관직을 두루 거쳤다.
평정공은 성정이 부드럽고 인자하여 지방관으로 재임시 가는 곳 마다 칭송이 따랐는데 특히 1470년 제주목사로 도임한 직후 매년 2월에 열리는 한라산 백록담에서의 산신제로 인해 백성들이 동사하는 일이 빈번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즉시 제단을 산 아래로 옮기게 한 일은 지금까지도 도민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는 일화다.
제주도 역사서인 탐라지(耽羅志)에 이르기를 “선생이 일찍이 목사가 되어 귤 재배를 장려함으로 도내에 인애의 유풍이 있었다. 이임할 때 관에서 받은 모든 물품을 관아에 남겨두고 말을 타고 나섰는데 성문에 이르러 비로소 손에 들고 있는 채찍이 관물인 것을 알고 문 위에 걸어 놓았는데 세월이 오래됨에 채찍이 떨어졌다. 고을 사람들이 그 자취를 그려서 사모함을 부치었다. 또 바다를 건널 때 배가 바다 가운데 이르자 홀연히 기울어지며 휘돌아서 위태하게 되었다.
선생이 엄숙하게 말하길 “나의 걸음에 사사로움이 있어 신명으로 하여금 나를 깨우침이 있게 하는가?”라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일행이 아뢰길 고을 사람들이 선생에게 전하라고 갑옷 한 벌을 일행에게 맡기며 육지에 당도하면 전하려고 하였으나 여기에 이르러 귀신이 선생의 지조를 더럽히지 않으려고 이러한 이변이 있게 되었다고 하니 선생이 즉시 갑옷을 바다에 던지라고 하였다.
이에 파도가 그치며 배가 나아갔다. 사람들은 그곳을 투갑연(投鉀淵)이라 하였으며 고을 사람들이 생사당(生祠堂)을 세워 춘추로 향사를 지냈는데 지금도 폐하지 않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평정공이 76세에 향리인 하로마을로 낙향할 때 초가집 한 채가 재산의 전부였는데 가난을 자랑으로 여기며 자손들에게 시(詩)를 남겨 교훈으로 삼게 했다.
家貧無物得支分 내 살림 가난하여 나누어 전할 것이 없고
惟有簞瓢盧瓦盆 오직 있는 것은 쪽박과 낡은 질그릇 뿐
珠玉滿隨手散 황금이 가득한들 쓰기에 따라서 욕이 되거늘
不如淸白付兒孫 차라리 청백으로 너희에게 전함만 못하리
1493년(성종13) 78세를 일기로 공이 졸하자 성종(成宗)은 예관으로 동부승지 이자근(李自建)을 보내어 제문을 내리고 평정(平靖)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평정공은 3남을 두었는데 장남 경원(庚元)은 검지(檢知), 차남 승원(承元)은 통정(通政), 삼남 소원(紹元)은 이조정랑을 역임하며 명문가의 대를 이었다.
<글/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송기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