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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묘지기행

김천묘지 기행(8)

관리자 기자 입력 2009.11.12 00:00 수정 0000.00.00 00:00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 이말정(李末丁)


 











 가을걷이가 한창인 늦은 가을, 절개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린 화순최씨 부인과 먼저 간 아내를 기리며 자신의 호를 따 건립했다는 아름다운 정자 방초정이 있는 구성면 상원리 원터를 찾았다.


 


 이 마을은 감천과 하원천이 합수되는 안쪽에 자리하여 멀리서 보면 연꽃이 물위에 떠있는 형세라는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의 길지로 전하며 대대로 연안이씨(延安李氏) 부사공파(府使公派) 정양공(靖襄公) 후손들이 집성을 형성하고 있는 유서 깊은 마을이다.


 


 방초정에서 마을 안길을 따라가다가 오른편 조산골로 접어들면 연성부원군의 위패를 모신 재실 영모재(永慕齋)가 4백년의 풍상속에서도 꼿꼿이 서있다.


 


 보기 드문 대추나무 기둥으로 세월을 괸 영모재의 담장을 따라 돌면 수 백 년에 걸쳐 효심(孝心)으로 닦였음직한 오솔길을 오르니 지례고을 연안이씨 입향조(入鄕祖)가 되시는 연성부원군 이말정과 장남이신 직강공(直講公) 이숙황(李淑璜)을 비롯한 후손들의 묘소가 조산골 전역에 모셔져 있다.


 


 매봉산 조산골은 예부터 “금비녀가 떨어진 형국”이라 하여 금채낙지처(金釵落地處)로 불리며 조선 8대 명당으로 알려져 왔는데 부원군의 묘소는 응봉산을 배산(背山)으로 하여 청룡과 백호가 반듯하게 섰고 임수(臨水)에 해당하는 감천과 그 너머로 안산(案山)인 문필봉(文筆峯)이 받치고 있는 전형적인 명당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명당의 정점에 자리한 부원군의 묘소가 통상의 관례를 깨고 가장 아래에 위치한 역장(逆葬)의 형태를 하고 있다.


 


 이에 대해 부원군의 16대손인 이현돈(74세)씨는 할아버지가 귀여운 손자들을 무동(舞童) 태우고 있는 격이니 전혀 어색할 것이 없다며 오히려 자랑스러워했다.


 


 또 부원군의 묘소를 배위(配位)인 곡산한씨의 묘소 뒤로 들여 고상비하(考上비下)로 한 것도 특이했다.


 


 부원군 이말정은 연안이씨로 장령(掌令)과 보주지사(甫州知事)를 역임한 증(贈) 병조판서 이백겸(李伯謙)과 온양방씨 사이에 1395년(태조4) 서울에서 태어났다.


 


 1426년(세종8)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이래 출중한 학문과 높은 덕이 널리 알려져 종5품의 충청도 도사(都事)와 판관(判官), 종3품의 예빈시소윤(禮賓侍少尹)을 역임하다 지례현 지품(知品.지례면 미평리)으로 낙향해 학문에 전념했다.


 


 당시 연고가 없던 김천지방으로의 이주는 스승이자 장인으로 경상도관찰사와 좌찬성을 역임한 곡산한씨 한옹(韓擁)이 지례와 양천동 하로마을에 우거(寓居)했던 사실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몇 년 후 감천의 범람으로 가옥과 전답이 침수되자 식솔을 거느리고 거창군 모곡(茅谷.거창군 월천면 서변리)으로 이거했다가 다시 지품으로 돌아와 1461년(세조7) 67세를 일기로 졸했다.


 


 부원군은 사후 넷째 자제분인 정양공(靖襄公) 이숙기(李淑琦)가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에 녹훈(錄勳)되면서 연성부원군에 봉해짐과 동시에 종1품의 좌찬성이 증직되었으며 평정(平靜)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부원군은 정경부인 곡산한씨와의 사이에 5남1녀를 두었는데 5형제가 모두 과거에 합격하고 관직에 진출해 오자암(五子岩)이란 명성을 얻었다.


장남 숙황(淑璜)은 성균관 직강(直講), 차남 숙형(淑珩)은 감찰(監察), 삼남 숙규(淑珪)는 현령(縣令), 사남 정양공 숙기(淑琦)는 형조판서와 호조판서를 역임하며 불천위(不遷位)사당에 배향되었고 오남 문장공(文狀公) 숙함은 이조참판과 홍문관 부제학을 지냈다.


 


 부원군은 자제들을 훌륭히 훈육해 나라의 동량으로 삼았고 문중의 중시조를 배출해 가문을 크게 번성시켜 후손중에서 8명의 판서(判書)와 12명의 목사(牧使)를 배출하며 이 고장을 대표하는 명문가의 반열에 오르게했다.


 


 부원군과 곡산한씨의 묘터와 관련해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하는데 1446년(세종28) 곡산한씨가 졸하자 마을을 지나가던 한 스님이 터를 정해주며 땅속에서 석함(石函)이 나오더라도 절대 열지 말라고 당부했다는 것.


이를 대소롭지 않게 여긴 인부가 석함을 열자 벌 두 마리가 날아 나왔는데 이에 스님이 “이 터에서의 발복(發福)이 3년 후로 미루어지겠지만 분명 후손중에 큰 인물이 나올 것이다”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3년 후 부터 다섯 아들이 차례로 과거에 급제하며 후손들이 번성했다고 하니 신기할 따름이다.


 


 


<글/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송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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