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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묘지기행

김천묘지 기행(10)

관리자 기자 입력 2009.11.26 00:00 수정 0000.00.00 00:00

임란 의병장 감호(鑑湖) 여대로(呂大老)

 










거창방면 국도 3호선을 따라가다가 구성면 송죽리 궁장마을로 접어들어 덕대산자락을 따라 깊숙이 자리잡은 성산여씨 선산에는 임진왜란때의 의병장 감호 여대로선생의 유택을 만날 수 있다.


 분통골 아래 예전의 재실로 쓰였던  어모재를 따라 오르다보니 수 백 년은 족히 됨직한 거대한 배롱나무가 주위를 압도한다.


 산 아래로부터 감호공의 조부로 성산여씨 김천 입향조가 되시는 8世 처사(處士) 여종호(呂宗濩), 그 위로 9世되시는 송오(松烏) 여응구(呂應龜), 맨 위에 감호공의 묘소가 있는 역장(逆葬)의 형태로 자리하고 있다.


 감호공의 묘소는 덕대산을 주산으로 하여 청룡에 해당하는 감나무골과 맞은편 백호에 해당하는 멍애나무골이 에워싸듯 감천을 향해 달려 나가는 형국으로 감천을 건너 멀리 가제산을 안산으로 취한 것도 빼놓지 않았다.
감호공은 성산여씨로 1552년(명종7) 김산현 기를(현 구성면 광명리)에서 김천찰방을 역임한 여응구(1523-1577)의 아들로 태어나 자를 위수, 호를 감호라 했다.


 1582년(선조15)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성균관박사를 제수받아 한강(寒岡) 정구(鄭逑), 남명(南冥) 조식(曺植)등과 교우하며 학문에 정진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향리로 낙향해 김면(金眄), 권응성(權應星)등과 함께 지례전투와 거창전투에서 큰 공을 세워 초유사(招諭使)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의 천거로 지례현감에 임명되었다.
이어 의성현감, 예조좌랑, 병조좌랑, 대구판관, 사헌부지평에 이어 1607년 합천군수를 역임했다.


 공은 성정이 강직하여 권력을 멀리하고 오직 백성만을 생각하여 임지마다 칭송이 높았는데 합천군수 재임 시 북인의 영수로 당대 최대의 권력자인 정인홍(鄭仁弘)과 맞선 유명한 일화가 전한다.
당시 합천 초계에 내려와 있던 정인홍이 감호공이 군수로 도임하자 서신을 보내어 관물인 종이와 부채를 요구하였다.


 이에 감호공은 “가야산 일찍 내린 서리에 닥나무는 말라버렸고 세상의 찌는 듯한 더위는 이 산골에도 이르렀네” 라는 시를 보내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만다.


 이 일로 인해 한직으로 내몰리기도 하였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았으며 훗날 정인홍이 이이첨과 더불어 광해군의 치세를 어지럽히자 미련 없이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고 말았다.


 또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폐하자 친구 오장이 격렬히 반대하다 귀양을 가게 되었는데 귀양가 는 벗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적은 부채를 주어 위로했다.


 


술병차고 다리에서 옛 벗을 전송해도
타다 남은 풀 봄 오는 걸 못 막네.
대장부 세상에 나뉜들 혀야 없으랴만
지사는 세상일 걱정에 몸을 돌보지 않았네.
복숭아꽃 오얏꽃은 훈풍에 생색을 내지만
소나무, 대나무는 눈을 이고도 정신이 새롭네.
큰 빛은 만고에 근원을 어둡게 못하는 법.
구름 걷히고 옛 빛 되 살아 남을 머물며 바라보려네.


 


 이 시는 당대의 선비들 사이에서 크게 회자되며 감호공의 명성을 드높혔는데 당시 인목대비의 폐모를 풍자하다 많은 신료들이 참화를 입던 터라 불의 앞에 분연히 일어섰던 감호공의 대쪽 같은 정신을 대변하는 일화라 하겠다.


 감호공이 1619년(광해군11) 67세를 일기로 졸하자 이조참의를 추증되고 경양서원에 배향되었다.


 


                                글/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송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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