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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묘지기행

김천묘지 기행(12)

관리자 기자 입력 2009.12.10 00:00 수정 0000.00.00 00:00

임란 공신 효숙공(孝肅公) 배흥립(裵興立)


 










엄동을 재촉하는 겨울비가 촉촉이 내리는 12월의 이른 아침, 삼대에 걸쳐 정려가 내린 삼강세가(三綱世家)의 중심인물인 임란공신 효숙공 배흥립장군의 유택(幽宅)을 찾았다.


 구성면 송죽리 황새말은 풍수지리로 볼 때 주변 산의 형세가 황새가 날아오르려는 형상이라 하여 황새말이라는 지명을 얻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마을을 지나 좁고 길게 뻗친 골짜기를 따라 20여분 남짓을 걷고서야 비로소 묘소에 닿을 수 있었다.


 묘소가 자리한 대방산은 덕대산으로부터 형성된 큰 비석골과 작은 비석골 사이에 좁고 길게 뻗쳐있는데 성산배씨 김산(金山) 입향조이며 효숙공의 고조부이신 진사 배윤순(裵允詢)과 공의 동생인 상의원직장(尙衣院直長) 배의범(裵義範), 공의 장남 선무랑(宣務郞) 배시망(裵時望), 부친인 배인범(裵仁範)과 경주김씨부인의 합분이 아래로부터 모셔져 있는데 그 가장 윗부분에 효숙공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묘역은 덕대산을 주산(主山)으로 하고 큰비석골을 청룡(靑龍), 작은비석골을 백호(白虎)로 삼았고 맞은편 황새말 앞산을 안산(案山)으로 했는데 효숙공의 묘소에서 바라본 일대 산세가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황새가 비상을 위해 다리를 곧게 펴고 날개를 힘차게 펼친 형국이니 가히 명당이라 할만하다.


 효숙공은 본관이 성산(星山)으로 영산현감을 역임하고 좌찬성으로 추증된 배인범(裵仁範)과 정경부인 경주김씨 사이에서 1546년(명종1) 김산군 조마면 새래(신안)에서 태어나 자를 백기(伯起), 호를 동포(東圃)라 했다.
조모이신 한양조씨가 마당에 장군깃발이 서있는 꿈을 꾼 후 태어났다고 전하는데 과연 기골이 장대하였다 하며 5세에 외조부인 황주목사 북일(北逸) 김익(金瀷)에게 수학하면서 훗날 대사헌이 된 구봉령(具鳳齡), 영의정에 오른 유영경(柳永慶)등과 동문수학했는데 특히 병서(兵書)에 관심이 깊어 “장부가 세상에 태어나 어찌 문무를 따지랴”라고 했다고 전한다.


 1572년(선조5) 무과에 급제한 후 선전관(宣傳官)으로 봉직하다 순찰사 정언신(鄭彦信)의 부장으로 여진족을 소탕하는데 큰 공을 세웠고 무장, 경성, 흥양 등 세 고을의 현감을 지냈다.
이때에 이르러 모친인 경주김씨가 병환이 깊어 머리를 빗지 못해 이가 생겨 가려움에 시달리자 자신의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옆에 누워 이가 옮겨오도록 했고 유산으로 받은 전 재산을 아우인 의범(義範)에게 주며 “나는 녹봉으로만도 충분하다”라고 했다는 일화가 세상에 알려져 칭송을 받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조방장(助防將)으로 이순신장군과 함께  당포, 옥포, 견내량, 진도, 칠전전투에 참가하여 공을 세우고 이순신장군의 천거로 공신에 오른 후 장흥부사와 전라도방어사, 경상우수사, 전라좌수사를 거쳐 공조참판에 올랐다.


 1605년(선조38) 선무공신으로 가선대부에 오르고 1607년 영흥부사로 나아갔다가 득병하여 그 이듬해인 1608년 졸하니 선조는 예관을 보내어 조문케 하고 효숙(孝肅)이란 시호를 내렸다.


 뒷날 인조때 원종공신, 병조판서, 좌찬성이 추증되고 효종때 정려가 내렸으며 대방산 묘소아래에 예조판서 강백년(姜栢年)의 비명(碑銘)으로 신도비가 세워지고 순조때 삼강사(三綱祠)에 제향되었으며 한산도 승전비에 공의 공적이 기록되고 부조지전이 내렸다.


 효숙공의 행장(行狀)은 실학의 선구자로 반계수록(磻溪隧錄)의 집필한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이 짓고 행록(行錄)은 선조(宣祖)의 부마(駙馬)로서 당대의 명필로 이름이 높았던 도총관 유정량(柳廷亮)이 닦았다.


 효숙공은 정경부인 청송심씨와 여산송씨 사이에서 4남3녀를 두었는데 삼남 시량(時亮)이 1630년 무과에 장원 급제한 후 양주목사, 도총부부총관, 경상,충청,전라 삼도의 병마절도사를 두루 역임했으며 공의 손자이며 장남 선무랑 시망(時望)의 차남인 명순(命純)은 1624년 무과에 급제한 후 병자호란때 선전관으로서 인조를 호종하며 수많은 전투에 참전하다 전사해 병조판서로 추증되고 충숙(忠肅)이란 시호와 함께 부조지전을 받았다
효숙공의 모친인 경주김씨 또한 만고의 열부로서 남편이 병사하자 3년상을 마친 후 식음을 전폐하고 자진하니 1656년 나라에서 정려가 내리고 정경부인으로 증직되었다.


 조마면 신안리 안새래마을에는 열부 경주김씨부인과 임란공신 효숙공 배흥립, 병조호란 때의 공신 충숙공 배명순 등 3대를 칭송하는 삼대삼강정려각이 세워져 명문가의 위상을 드높이고 있다.


 


 글/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송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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