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마면 신곡리로 속한 3개 마을 중 백화동 또는 효자동으로 불리는 첫 마을인 제실골 오도산에는 조선중기 하늘이 낸 효자로 불리며 이 고장을 효행의 고장으로 불리게 한 남강(南岡) 이세간의 묘소가 자리 잡고 있다.
제실골 입구에서 만난 후손 이종환씨는 옛 남강이 살던 집터에 살며 대를 이어 조상을 섬기고 있었는데 오도재(吾道齋)와 상친사(尙親祀)를 지나 남강의 묘소로 오르는 산길은 후손들의 정성으로 깊어가는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온화하다.
배위되시는 안동장씨와 합분으로 마련된 남강의 묘소에는 오직 효행만을 실천하며 청빈함을 잃지 않았던 공의 일생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작고 검소한 상석과 좌우 석상이 있을 뿐 인데 동행한 후손은 잔디가 잘 돋아나지 않는다며 연신 안타까워한다.
남강의 묘소가 자리한 오도산은 시루봉을 주산(主山)으로 하여 청상뒷골을 백호(白虎)로 하고 가재산을 청룡(靑龍)으로 삼았는데 마을 앞을 우(右)에서 좌(左)로 흐르는 강곡천을 넘어 이름부터가 심상치 않은 안산(案山)이 다소곳이 앉았다.
효자 이세간은 성주이씨로 1664년(현종5) 증(贈) 예조참판 겸 진주병마절도사 이유항(李惟抗)과 정부인 벽진이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백화동에서 태어나 자를 대임(大任), 호를 남강(南岡)이라 했다.
이후 학문에만 정진하며 문명(文名)이 높았던 남강은 부친에 대한 지극한 효행으로 인해 일찍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기록에 따르면 남강은 부친의 병환이 깊어지자 날마다 하늘에 완쾌를 빌었는데 문득 겨울에 집의 살구꽃이 피고 죽순이 솟아나와 약으로 쓰게 되니 세상 사람들이 하늘이 낸 효자라 칭송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남강의 학문이 출중함을 익히 알고 과거 시험을 볼 것을 수시로 권하자 “과거에 나아가 합격하는 것은 부모님을 한번 즐겁게 하는 것이지만 나는 부모님 곁에서 영원히 즐겁게 해드리고 싶다”며 한 번도 과거장에 나아가지 않았다.
1702년(숙종28) 부친이 세상을 떠난 후 남강의 일생은 오로지 생전에 못다 한 효행의 길만을 걷게 되는데 묘소옆에 여막을 짓고 3년간 시묘살이를 함에 하루도 거르지 아니하고 날마다 축대 아래에서 조석으로 절을 하니 무릎 닿는 곳에 잔디가 살지 못하고 땅이 깊이 파였다고 한다.
또 밤마다 오도산에 호랑이가 나타나 묘소 주위를 돌았는데 여막아래에 앉았다 가기를 반복하니 사람들은 하늘이 효자를 지켜주기 위해 산신이 호랑이를 보냈다하며 이때부터 남강이 사는 마을이름을 효자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1729년 성주군 금수면에서 호랑이 한 마리가 함정에 빠졌는데 워낙 강하게 저항하여 아무도 근접을 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남강이 미심쩍어 달려가 보니 바로 시묘살이 할 때에 주위를 맴돌던 그 호랑이인지라 함정으로 뛰어들어 감싸 안으니 모두들 감탄을 했다고 한다.
성주댐이 들어서면서 수몰이 된 금수면의 들판이름이 이 같은 연유로 근년까지 “범들”이라 불렸다고 한다.
1733년 (영조9) 남강이 졸하자 오도산에서 호랑이 울음소리가 크게 들리더니 종적을 감추었다고 하는데 후손들은 신령스러운 호랑이를 기리기 위해 남강을 모신 상친사 벽에 호랑이 그림을 그려두고 산 아래에 의호신령비(義虎神靈碑)를 세워 호랑이의 의로움을 기리고 있다.
남강 사후 지역유림의 청원으로 부친인 이유항에게 예조참판, 그리고 남강에게는 지평(持平)의 벼슬이 내려졌으며 정조는 효성을 기리는 남강대(南岡臺)를 쌓도록 명했고 순조때 경상도 관찰사와 우의정을 역임한 정만석(鄭晩錫)은 봉안문을 짓고 군수 유교영(柳喬榮)과 교리 이만규(李晩奎)가 상향문과 행장을 찬(撰)했다.
남강은 부인인 안동장씨와의 사이에 장사랑(將士郞) 봉거(鳳擧), 붕거(鵬擧), 학거(鶴擧), 난거(鸞擧), 황거(凰擧) 등 5남을 두었는데 자손 대대로 효열(孝烈)을 몸소 실천해 명문가의 가풍을 이었다.
글/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송기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