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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종합

91년 만에 빛 본 구국충정/을사조약 때 ‘5적 처단’ 상소

권숙월편집국장 기자 입력 2010.03.03 00:00 수정 0000.00.00 00:00

독립청원서 서명한 계헌공 이경균 독립유공자 포상










계헌공의 손자 이하영(중앙 포장증을 들고 있는 사람) 부부, 증손자 이상훈(앞줄 맨 왼쪽)씨를 비롯한 후손들.
 



 1919년 3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국제평화회의는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만천하에 알리는 유일한 기회였다. 일제를 이 땅에서 몰아내기 위해, 그리고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알리기 위해 유림 137명이 뜻을 모았다. 평화회의에 제출할 독립청원서에 서명하기 위해서이다.


 여기에는 구성면 상좌원리 출신의 계헌공(稽軒公) 이경균(李璟均 당시 69세)씨도 당당히 이름이 올랐다. 일제가 쳐들어오기 전부터 항거해온 그에게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을사조약이 맺어질 당시 “을사 5적을 처단하라”며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한일합병이 결정된 뒤에는 일제가 내리는 모든 명령에 불응했다. 조국 독립을 위해서라면 목숨 하나 내놓는 일이 그에겐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연로한 그에게 독립까지 기다리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3.1만세운동이 벌어지고 3년 뒤 세상을 떠났다.
 계헌공이 독립청원서에 서명 한 지 91년 만인 이번 3월1일 그의 공적이 마침내 빛을 보았다. 국가보훈처가 독립유공자로 지정, 유족들에게 건국포장이 주어졌다.


 


 고인의 손자 이하영(88세) 옹이 대신 수여받았다. 독립유공자 신청을 한 증손자 이상훈(55세)씨도 함께 시상식에 참석해 고인의 뜻을 기렸다.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고인을 다시 불러들인 건 최근 발생한 파리장서비 사건 때문이다. 유족들은 지난해 초 서울 장충단공원 등 전국 7개소에 설치돼 있는 파리장서비에 고인의 이름이 지워진 사실을 발견했다. 파리장서비는 독립청원서와 이에 서명한 이들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이다.
 고인은 독립유공자로 등록돼 있지 않다는 이유로 비명이 사라진 것이다. 유족들은 몇 달간에 걸쳐 자료를 수집했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에서 관련 내용을 찾아 유공자 신청을 했다. 지금은 비석에 이름을 복구해 달라는 내용으로 소송을 진행 중이다.



 이하영 옹은 “독립유공자라고 하면 어느 수준에서 인정해주는지를 몰라 신청을 늦추고 있다가 이제서야 나서게 됐다”며 “자랑스러운 조상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도록 후손들로서 열심히 살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이번 3.1절에 후손들이 받은 포장증










계헌공이 애국지사 향산 이만도 선생에게 보낸 친필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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