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하던지, 꿈꾸던지
이청
(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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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천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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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을 거스르면 민중의 손에 망하고, 민중을 따르면 민중과 함께 망한다.’
그리스 로마의 영웅전을 쓴 플루타르크의 경고다. 대중을 무시하는 소통 결핍과 대중에게 영합하는 포퓰리즘을 한꺼번에 꾸짖는 촌철살인이다.
소통은 입이 아니라 귀에서 시작된다.
귀를 열어야 마음이 열린다. 오늘 같은 국민 주권시대에 한 번쯤 곱씹어 볼 말이다.
혀에는 뼈가 없다. 혀가 부드러운 이유다.
그러나 혀가 늘 부드러운 말만 하는 것은 아니다.
마치 뼈대 없는 집안에서 막 자란 아이처럼 거칠고 못된 말을 내뱉기도 한다. 강아지가 귀여운 것은 혀를 흔들지 않고 꼬리를 흔들기 때문이다. 꼬리 대신 혓바닥을 놀려 짖기만 하면 발길질을 당하기 십상이다.
국민의 소리를 거스르고 목소리만 내다가 발길질을 당한 정권이 하나 둘이 아니다.
듣기 좋은 소리만 골라 들으면 소통이 될 수 없다. 권력의 두 귀는 좌와 우 양쪽에 고루 열려있어야 한다. 가진 자들의 부패, 기득권층의 비리가 서민을 슬프게 한다.
실업자가 넘쳐 나는데 정부는 경제 지표의 수치만 읊어댄다. 아직도 나라의 요직은 특정 지역 특정 인맥이 장악하고 국가안보 라인에 병역 미필자가 부지기수이며 전방 철책선에서는 고위 공직자의 자제들을 볼 수 없다고 한다.
야당은 선거에 지고도 파벌싸움으로 정신이 없다.
이 분노와 조롱과 탄식의 소리가 들리는가?
들리지 않는다면 국민과의 소통은 단절된 것이다. 플루타르크가 경고한 민중의 손이 기다릴 뿐이다.
소통의 결핍은 비단 여당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동안 여권을 포퓰리즘이란 편리한 정치 메커니즘에 기대어 재미 좀 보았지만 포퓰리즘이라는 것이 국민의 진정한 갈망을 책임 있게 담아내기보다는 당장 이해를 내세워 본질을 덮는 미봉책이거나 일시적 감성을 자극하여 표만 낚아채려는 정치적 속임수에 불과한 것이고 보면 야권 역시 국민과의 올바른 소통을 위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주권자인 국민을 단지 미봉책이나 바라고 속임수에 넘어가기나 하는 어리석은 백성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말이다.
일찍이 유럽에서는 표피적인 선동에 휘둘리는 대중시대의 포퓰리즘은 문화와 이성에 대한 반역이라고 질타했다.
대중에게 권력의 완장을 채워주고 냉철한 이성, 합리적 지성을 핍박하도록 충동질하는 사회는 반 문화적 광기로 흐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역사의 증언이다.
나치에 열광한 독일의 극우 민족주의 호위병에게 박수를 쳐 댄 중국의 극좌문화 혁명은 플루타르크의 민중과 함께 망하는 두 길을 생생하게 보여 주었다.
이 극우 극좌의 두 길을 동시에 달려가는 것이 우리 민족끼리의 폐쇄적 주체사상이요 선군 독재의 사회주의 혁명 노선이다.
그 종착지가 어디일지를 굳이 물어야 하는가.
지금 우리 사회는 지역, 이념, 세대, 계층, 정파에 따라 서로 물고 뜯는 싸움이 가히 목불인견이다.
표현의 자유가 거짓의 자유일 리 없건만 핵무기를 만들고 미사일을 쏘아대는 북한을 평화통일의 주체로 숱하게 퍼주고도 늘 얻어맞기만 하는 대한민국을 반통일 전쟁광으로 둔갑시킨다.
참 기가 막힌다. 조선의 사색 당쟁도 이토록 극악스럽지는 않았겠다.
이 나라 정치인들 남의 흠을 혹독하게 몰아치면서도 제 잘못은 돌아보는 법이 결코 없는 항상 옳고 늘 당당하기만 한 정치인들과 시민운동가들이 두 귀를 틀어막은 채 자기 말만 쏟아내고 있는 터에 무슨 수로 소통을 기대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