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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문화칼럼 -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천신문 기자 입력 2022.11.24 11:49 수정 2022.11.24 11:49

민경탁 시인

ⓒ 김천신문
‘우리들 두 눈에 그득히 물결치는 시작도 끝도 없는 바다가 있다’. 김춘수 시인 탄생 100주년인 올해 봄,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글판에 나타난 시구다(김춘수, “능금” 마지막 연). 존재의 본질을 발견하는 과정에서의 감동을 노래했다. 김춘수 시인의 대표시로 알려지는 “꽃”에서 ‘우리들은 모두/무엇이 되고 싶다/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라 한 구절과 비숫한 표현이다. 시 “꽃”은 한국의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로 꼽히며 국민들이 널리 사랑하고 있다. 이 시의 한 구절이 세계적인 보이그룹 BTS 한 멤버 가수의 노랫말에 변용되고도 있다. 김춘수 시인의 작품엔 꽃을 소재로 한 것이 여러 편 있다. 지금 김 시인을 추모해 서울을 비롯해 용인, 대구, 통영 등에서 다채로운 행사가 열리고 있다.

“바다가 왼종일/생쥐같은 눈을 뜨고 있었다”(김춘수, “처용단장Ⅰ의Ⅰ”에서). 통영에서 1922년 11월 25일 태어난 그는, 바다가 없는 곳에 사는 것은 답답하다고 했다. “바다에 굽힌 사나이들,/하루의 노동을 끝낸/저 사나이들의 억센 팔에 안긴/깨지지 않고 부서지지 않은/온전한 바다./(김춘수, “부두에서” 부분). 그의 시에 수많이 등장하는 ‘바다’는 유년이고, 끊임없는 시간의식이며 문학의 배경이요 에너지다. 조부 대에 만석꾼 소릴 듣는 대부호, 부친 대에 배를 세 척 가진 부유한 집안의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유년시절의 이 부유를 부끄러워했고 이 부끄러움이 그로 하여금 여성적 태도를 형성하게 한 것으로 전한다.

ⓒ 김천신문

김춘수의 호는 대여(大餘)다. 미당 서정주가 지어주셨다. 대여 곁에는 늘 청마가 가까이 계셨지만 너무 무겁고 거북하기만 하다고 했다. “나의 무의식에는 베를레느와 미당이 있었는 듯하다”(대표작 자선자평). 릴케의 시에 감명을 받아 시를 쓰기 시작했다는 대여는 수업시간에 보들레르, 말라르메, 베를레느, 랭보를 자주 거론했는데 미욱한 제자에겐 어렵기만 했다. 대여의 시론수업은 서양문예사인지 사상사인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다.

“답안을 뒷장까지 넘겨서 쓰지 말고 어쨌든 앞장에서 끝내세요”. 시험 칠 때마다 김춘수 선생이 답안지를 나눠주며 하시는 당부다.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도 뒷장까지 넘겨 답을 쓰지 말라는 것. 얼핏 생각하기엔 용이할 것 같으나 그렇잖다. 한번은 어떤 친구가 높은 점수를 받겠다고 답안에 빨강색, 파랑색 펜으로 밑줄을 그어가며 뒷장까지 빽빽이 적어냈는데 점수가 형편없이 나왔다. 시문학의 간결성, 함축성이 몸에 밴 시인 교수의 업무스타일 탓이 아닌가 여겨진다. ‘어떤 관념은 시의 형상을 통해서만 표시될 수 있다’고 한 선생님의 말씀이 연상된다.

“나는 정치는 못 해요”. 언젠가 김춘수 선생은 말씀하셨다. 그 때엔 학과 주임교수 보임은 임명제였는데 우리 학과에선 다른 두 교수가 열성적으로 경쟁하는 바람에 김 교수께서 끼어들 여유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행정력, 정치력을 바탕으로 한 경력은 쌓지 않겠단 뜻이었으리라. 선생님은 경북대에서 19년을 재직하며 학과주임 보직을 겨우 한번 맡은 것으로 안다. 1978년 8월 영남대에서 초빙하자 그제야 경북대에서 사표 수리를 하지 않으며 붙잡았다. 이로써 한 학기 간은 양쪽 대학에서 월급을 받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듬해에 영남대에서 문리과대학장 보직을 받았다.

1981년 초 민주정의당이 만들어질 때 김춘수 시인은 영남지방의 문화예술계를 대표할 인물로서 강권에 못 이겨 발기준비위원이 됐다. 이 해 4월, 김춘수 영남대 문과대학장은 대학을 떠나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었다. 이후 국회문공위원, 방송심의위원장, KBS 이사까지 지냈다. 이 무렵 어떤 정치인의 생일연 자리에서 있었던 일을 두고 일각에선 싸잡아 선생의 모든 문학적 성과를 매도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김춘수 시인은 “한 마디로 100% 타의에 의한 것이었다”고 회고, 사과한 적이 있다.

김춘수 대구의 기억 행사 팸플릿

애초 김춘수는 일본 니혼대학 예술학원 재학시절 천황과 조선총독부를 비판하다가 퇴학, 세타가야 경찰서에 6개월 수감, 부산 부두로 송치된 학생이었다. 이 과정에서 수전증을 얻었다. 우리는 김춘수 국회문공위원이 월·납북문인 작품 해금 법안 처리의 주역이었단 사실도 알고 있어야 한다. 유족과 힘을 합쳐 남한에서 김기림, 정지용의 작품이 해금돼 우리 국민에 자유로이 알리게 한 사실도.

김춘수는 일제 강점과 광복, 이념 갈등에 의한 동족상잔을 겪으며 역사의 폭력성을 통찰한 시인이다. 김 시인의 처녀작이 광복1주년기념 사화집 “날개”에 발표한 ‘애가’다. 마산 3·15 의거를 배경으로 한 시 “베꼬니아의 꽃잎처럼이나”와 항거리 의거를 소재로 한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이 그 예이다. 김 시인은 시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이 교과서에 게재된 것을 몹시 못 마땅해 했다. 당신의 주장에 의해 교과서에서 이 시가 빠지고부터 시 “꽃”이 실리기 시작했다. 김춘수는 역사와 이데올로기의 폭력성을 비판적으로 경계한 시인이다.

프랑스에서 정치를 다루는 언론활동, 사회 참여(드레퓌스 사건 관계)했다고 낙인 찍혔다가 회복이 된 에밀 졸라, 나이 스물일곱에 노르망디 자로크에서 최연소 시장을 지낸 앙드레 지드, 이들의 문학적 업적을 일방적으로 매도한다는 말을 들어보진 못했다. 아일랜드의 시인이요 극작가인 예이츠는 공화국 시절 상원의원을 지냈는데 이 나라에서 그의 문학적 성취를 전적으로 매도한다는 소리를 들어보지는 못 했다.

한국의 교과서에서 다뤄졌거나 다뤄지고 있는 김춘수의 시는 15편이 넘는다. “꽃” “꽃을 위한 서시”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인동잎” “분수” “차례” “봄C” “부두에서” “내가 만난 이중섭” “능금” “처용단장” “강우” “나의 하나님” “겨울밤의 꿈” “경이에게” 등등. 한국 현대시사에서 김춘수와 김수영은 주지시 계열의 시인으로서, 모더니스트로서 서로 경쟁하며 현대시의 진폭을 확장시켰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같은 주지시이나 김수영 시인이 참여시 쪽의 좌장격이라면, 김춘수 시인은 순수시 쪽의 대표격으로 보는 것이 통상적인 시각이다. 한 시인의 문학적 성과는 여러 부면을 종합해 봐야 한다. 김춘수는 사물의 본질과 인간의 실존을 주지적으로 포착, 탐구한 인식론적인 시인이다. 시에서 의미보다는 자유연상과 이미지를 매우 강조한 시인이다.

경북대 국문과 69학번 졸업사진 촬영 때의 김춘수 시인(앞줄 의자에서 왼편 세번째 앉은 이)

김춘수 교수는 성격상 냉엄하며 말수가 적으시어 경외스러웠다. 시는 난해하였다. 4학년 여름방학 중 학훈단 병영훈련을 받고 있을 때였다. 우리 학과에선 나 혼자만이 훈련에 참가하고 있는데, 예고 없이 가정에서 어머니와 외숙모가 위문을 오셨다. 학교에선 김춘수 선생이 교수위문단의 일원이 되어 보병 50사단 연병장에 나타나셨다. 연병장 풀밭에서 군기가 세게 든 내가 구령과 함께 거수경례를 올리니 선생님은 수전증 있는 손으로 내 손을 잡아주셨다.

‘꽃’의 시인은 부인을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고 경기도 분당에서 큰따님과 사시며 인절미를 드시다가 기도 폐색이 되어 의식불명, 삼 개월 넘게 고생하다가 유언 없이 2004년 11월 29일 영면하셨다. ‘시인은 죽지 않는다. 다만 눈을 감고 있을 뿐’이라 했던가. 아둔한 제자는 뒤늦게야 선생님의 시에서 ‘신부’는 자신의 이데아요, ‘처용’은 고독에 둘러싸인 유년의 시인 자신이며, ‘장미’는 이국취미요, ‘타령조’는 말보다 이미지와 토운에 무게중심을 둔 작품임을 안다.

다시 뵈오면 시를 더 잘 배울 수 있으련만. “산은 모른다고 한다./물은/모른다 모른다고 한다//속잎 파릇파릇 돋아나는 날/모른다고 한다./내가 기다리고 있는 것을/내가 이처럼 너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산은 모른다고 한다./물은/모른다 모른다고 한다.//(김춘수, ”모른다 모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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