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佛紀) 2567(2023)년 5월 27일 오전 10시 30분, 천년고찰 불령산 청암사 대웅전 앞에서 고승 대덕과 사부대중이 운집한 가운데, 부처님오신날 봉축법요식을 봉행하고, 부처가 세상에 온 의미를 되새겼다.
이날 봉축법요식은 법회 자리를 청결하게 하는 도량결계(道場結界) 의식으로 시작됐다. 그리고 6가지 공양물(쌀, 향(香), 꽃, 등(燈), 차(茶), 과일)을 대웅전 석가모니 본존불 앞에 올리는 육법공양(六法供養), 북과 종을 울림으로써 중생이 어리석음과 괴로움에서 벗어나 성불하기를 바라는 명고(鳴鼓)와 명종(鳴鐘) 등의 순서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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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 그리고 그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승가(僧伽)에 귀의(歸依)를 약속하는 삼귀의례, 지혜와 실천을 강조한 불교 경전인 반야심경 봉독과 번뇌와 탐욕을 씻겨내는 관불(灌佛) 의식이 행해졌다.
이날 법요식에는 청암사 주지 의진 상덕 스님, 청암사 승가대학장 의정 지형 강백 등 처마 끝 풍경소리같이 맑은 마음으로 어려운 이웃을 품어주는 스님들과 불자들이 참석해 부처님오신날을 함께 축하했다.
부처님은 핏팔라나무(보리수) 아래에서 깨침의 별빛이 빛나던 새벽 미명에, 무지는 사라지고 앎이 떠오르며, 어둠은 사라지고 빛이 떠오르는 경지의 확연한 깨달음에 도달했다. 이 깨달음은 단순한 개념이나 관념이 아니며, 부처님이 체험을 통해 증득한 것이다.
괴로움과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고, 주어진 조건이 어떠하든 능동적으로 대응해서 인생의 주체가 되는 것이 부처님의 본래의 가르침이다. 이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두운 밤에 등불을 비추어주는 것과 같기에, 부처님오신날 연등(燃燈)을 밝힌다.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실천 수행해야 한다. 배워서 알아야 하는 지식에 그쳐서는 안 된다. 깨달음에 이르는 중도는 악기의 줄을 너무 당기면 끊어지고, 너무 풀면 소리가 나지 않는 이치처럼 고통을 피하거나 끌어안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고 다루고 다음 단계로 정진하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는 수행을 중시한다. 몸과 마음으로 직접 경험해서 괴로움이 없는 삶을 실제로 사는 것이다. ‘마음 챙김’으로 다진 토대는 진리에 이르는 직접적 길이 되고 열반의 실현을 가져온다. ‘열반’은 불교의 최고의 이상으로, 생사의 괴로움이 완전히 없어진 상태를 뜻한다.
‘마음 챙김’은 마음의 상태를 살피고, 주의를 기울여서 연속되는 지각의 순간들 속에서 일상적 현상에 대한 명확하고 집중된 자각으로 현재 일어나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고 인지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말하는 방식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올바른 말을 할 수 없고, 지금 하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올바른 행동을 할 수가 없다.
정성은 해도 해도 넘치지 않는 법이다. 빌고 빈 공덕은 어디 가지 않고 고스란히 자신에게 돌아온다. 미소는 자비의 자(慈)이다. 다른 사람이 잘 되었음을 기뻐하는 마음이다. 슬픔은 자비의 비(悲)이다. 자신이 아끼는 다른 사람이 괴로워할 때 그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모든 깨달음은 하나다. 삶은 짧고 괴롭다. 그것을 가장 길고 행복하게 쓰는 방법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일이다. 서로의 마음이 다르지 않다는 자비의 실천에 부처님도 염화미소를 짓고 계실 것이다. 세상의 변화, 혹은 환경과 인심의 변화에 따라 본질이 흔들리지 않는 지혜와 자비로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부처님오신날이 되길 바란다.
<추기> 삼계개고아당안지(三界皆苦我當安之)
불령산 청암사 부처님오신날 법요식에 참석한 후, 돌아오는 길에 가롯재 정상 부근에서 꼬질꼬질한 백구(白狗) 한 마리가 다쳤는지 우측 앞다리를 들고 고개마루를 향해 절룩거리며 걸어가는 모습을 봤다. 숨탄 모든 것은 소중하다는 말씀이 아닐지라도 순간 안스러움이 울컥 밀려왔다. 당신이 오신날, 부처님의 가피로 저 힘겨움이 덜어졌으면 하는 바램이 들었다. 그랬을까, 추량을 지날 무렵 잔뜩 흐렸던 하늘이 맑게 깨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