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오전 10시, 계절의 모퉁이를 돌아가는 여름의 뒷모습을 따라 가을빛이 내려앉은 천년고찰 청암사에서는 ‘2023 인현왕후 선발대회 및 제6회 복위 의식 재현행사’가 대웅전 및 보광전 앞 뜨락에서 개최됐다.
절집 단청에도 불령산 마루에서 내려온 가을이 베여 사찰이 품고 있는 경건함과 고요함과 함께 부처님의 영기가 서린 청정도량 청암사는 고즈넉한 정취와 소박한 가을을 담고 있었다.
이날 행사에는, 청암사 주지 상덕스님, 율학승가대학원장 지형스님, 이명기 시의회 의장, 최병근 도의원, 전정식 (전)김천시의회 부의장, 이우중 증산면장, 김영호 문화홍보실장, 민경탁 여흥 민씨 대종회 운영위원, 김호균 까말돌리수녀원 신부, 여흥 민씨 종친회원들을 비롯한 내빈들과 사부대중 및 많은 관광객들이 폐서인이 왕후로 재현되는 의식을 지켜보았다.
오전 10시, 대웅전 앞 무대에서 진행된 인현왕후 선발대회에서 진(眞)은 권윤서(예고 1학년)양이 차지해 인현왕후 역을 맡았고, 선(善) 김성이, 미(美) 박정아(예고 1학년)양이 각각 상궁역할을 하게 됐다.
청암사 죽반소에서 점심 공양 후 보광전 뜨락에서 개최된 복위 재현의식은 청암사 스님들의 인현왕후기도 ‘보왕삼매론과 약사여래영주’ 독송을 시작으로, 호송 예관이 “전 왕후 여흥 민씨에게 내리노라, 즉시 환궁토록 하라.”는 교지 전달, 왕후정복으로 환복, 내명부 상궁과 내금위 별장들의 호위를 받으며 가마를 타고 보광전에서 대웅전까지 복위 행렬 이동의 순으로 진행됐다.
조선조 제19대 숙종은 적장자로서 정통성을 내세우며 기존의 당파연립방식을 지양하고, 집권 정당을 교체하는 3차례의 ‘환국 정치’로 당시 권력을 놓고 경쟁 관계에 있던 남인과 서인 두 정치세력의 치열한 당파싸움을 통제해 강력한 왕권강화정책을 추진했다.
숙종의 정치적 역학관계와 왕실을 둘러싼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정치적 계략과 그 배후에서 작용한 음모 그리고 숙종 이순의 변심(變心)으로 인현왕후는 신변의 변화를 겪었고, 그로 인한 정신적 고통과 육신의 아픔 그리고 가슴에 묻은 그리움을 청암사에서 은거하며 달랬다.
불령산 너머로 그 언젠가 돌아갈 한양을 떠올리며 만물이 아직 채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새벽 도량석, 왕후 복위를 기원하려고 청암사에서 지워준 보광전 관세음보살을 찾아 ‘이순’에 대한 헝클어진 인연의 고리에 대한 아쉬움과 ‘그리움’이란 풀리지 않는 화두를 안고 번민하고 사색했다.
그리움이란 곁에 없고, 손에 닿지 않고, 보이지 않을 때 더 아름답고 애절하며 가치가 있다. ‘간절히 그리워한다’라는 것은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내포한다. 하지만, 그리움은 아프다. 그리움이 남긴 자리는 애잔함이 남아 있기에, 마음으론 수없이 그 자리를 배회하지만, 떠난 자리에는 공허함만 남아 있다.
매몰차고 야속한 님에 대한 그리움은 한(恨)이 되어 가슴에 맺혀있는데, 어둠에 젖어있는 불령계곡 청암사 불전에 엎드린 왕후의 어깨너머로 터져 나오는 낮은 탄식은 무심한 세월에 묻혀갔다. 법당 창호지 그림자 너머로 불경 소리가 새어 나올 때까지, 왕후는 무엇을 바라보았고, 누구를 기다렸던 것일까.
새벽별도 스러지고 흰 달도 저만치 기울 무렵, 왕후의 거처였던 고색창연한 한옥의 기품을 풍기는 단청도 하지 않은 극락전 절집의 나무빛깔은 유구한 세월을 대변하듯, 진갈색과 회갈색으로 변해있다. 그저 지아비의 사랑만을 원했던 그녀, 그런 그녀의 기구한 삶이 오늘처럼 맑고 푸른 가을날에는 더욱 애잔하게 다가온다.
인현왕후는 1667년(현종 8년) 여양 부원군 민유중과 은성부부인 송씨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15세 때인 1681년(숙종 7년) 5월 2일, 당시 21세인 조선왕조 제19대 임금 숙종(이순)과 가례를 올리고 국모가 되었다.
한편, 인현왕후의 외조부인 송준길은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과 각별한 관계였고, 서인의 지도적 위치에 있었다. 가문의 후광뿐만 아니라, 서인 전체의 후원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입궁 5년이 넘도록 후사가 없었다.
숙종은 조선실록에 “자뭇 얼굴이 아름답다”라고 기록될 만큼 희대의 미인이던장옥정을 총애하여 종4품 숙원으로 책봉하고, 다시 정2품 소의로 품계를 올렸다. 1689년 장소의가 출산한 이균(경종)의 ‘원자정호’를 반대한 송시열과 서인을 숙청한 기사환국이 있었다, 그 결과 9년 만에 남인들이 조정을 장악했다.
인현왕후 23세 생일에 숙종은 대신들을 편전에 불러, ‘성종 때 폐비된 윤씨 죄는 단지 투기에 있었는데, 민씨의 죄는 윤씨보다 더하고, 그녀에게 볼 수 없었던 행동까지 겸했다. 폐비하여 서인으로 삼아 친정으로 돌려보내니 예관들은 이 내용을 종묘에 고하라.’라는 교지를 내려 폐비를 선언했다.
숙종은 인현왕후를 폐출하고, 중인 역관 장형의 서녀 천출인 장씨를 왕비로 책봉했다. 사대부 가문 교육을 받지 못한 장씨는 인현왕후가 보여준 국모의 교양과 덕성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 이런 중전의 행태는 왕과의 관계를 멀어지게 만들었다.
세간에는 “미나리는 사철이요, 장다리는 한철일세”라는 풍자 노래가 퍼졌는데, 미나리는 인현왕후 민씨, 장다리는 중전 장씨를 상징했다. 즉, 숙종에게 장다리 장옥정에서 벗어나, 미나리 인현왕후를 복위시키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소론 김만중은 《사씨남정기》를 지었는데, 이 소설은 명나라 유현이 정실부인 사씨를 내쫓고 첩인 교씨를 정실부인으로 삼았다가, 나중에 교씨의 간악함을 깨닫고 사씨를 다시 맞아들인 다음 교씨를 죽인다는 내용이다. 이 또한 인현왕후와 중전 장옥정을 빗댄 풍자소설이다.
민심 이반과 옥정에 대한 불꽃 튀던 애정이 사그라진 숙종은 갑술환국이란 정치적 해결책을 단행했고, 권력을 장악한 서인은 인현왕후 복위를 추진했다. 남편에게 투기의 화신이라 매도당하며 궁에서 쫓겨난 지 5년, 외부와 철저히 단절된 생활과 병고에 시달렸던 초췌한 모습의 인현왕후가 환궁했다.
숙종은 친필 편지를 보내 자신의 과오를 사과하고, 중전으로 복위해 달라고 요청했다. 가슴에 옹이가 맺힌 28세 인현왕후는 야속한 마음에 몇 차례 거절은 했지만, 자신의 처신은 개인뿐만 아니라 서인의 운명과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군왕이자 지아비의 요구를 끝내 거절할 수는 없었다.
인현왕후는 복위한 뒤부터 하반신이 부풀어 오르고 썩어가는 괴질(통풍)에 시달렸다. 장희빈 측 궁녀들의 감시를 받으며 병고에 시달리던, 인현왕후 민씨는 1701년(숙종 27년) 8월 14일 창경궁 경춘전에서 3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고양시 서오릉(경릉, 창릉, 익릉, 홍릉, 명릉)의 명릉에는 숙종과 인현왕후 민씨 그리고 제2계비 인원왕후 김씨가 안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