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어머니 저 왔습니다. 장남 영호입니다. 그 동안 잘 계셨지요? 오늘은 아버지 기일입니다. 벌써 가신 지가 십 년이 되었네요. 음식 준비는 다 마쳤습니다. 넉넉하게 준비를 했습니다. 누나들과 아내와 동생이 함께 손을 모았습니다. 특히, 이번에는 우리 집의 쌀과 제가 키운 호박으로 호박떡을 다섯 되나 했습니다. 모처럼 두부도 했습니다. 잘 드시고 가세요. 그리고 자식들과 손자와 손녀들도 잘 보살펴 주세요. 사랑합니다. 보고 싶습니다.”
2024년 1월 19일 금요일 오후에 고향집에서 조금 떨어진 밭 중간에 모신 부모님 산소 앞에서 한 말이다. 오전 내내 제사 음식을 준비했다. 누나들과 아내는 집안에서 바쁜 손을 놀렸다. 나는 마당에 걸린 솥에다 어물을 찌고 돼지고기를 삶고 탕국을 끓였다. 동생이 장작을 잘 준비해서 불땀이 좋았다. 불을 때면서 조기 손질까지 마쳤다. 점심은 두부까지 곁들이니 더 맛있었다.
오후 2시가 되니 모든 준비가 끝났다. 평소의 습관대로 괭이를 하나 들고 밭으로 갔다. 밭 중간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합장되어 있다. 멀리 경부선과 경부고속도로 너머 김천의 이수(二水) 중의 하나인 감천이 흐른다. 낮게 내려앉은 구름에 겨울날의 고향은 적막하기까지 한 한 폭의 풍경화이다.
최근에는 일찍 제사를 지낸다. 저녁을 먹지 않고 제사를 마치면 늦은 저녁 식사가 느긋하게 이어지는 형태이다. 축문(祝文)은 부모님 산소 앞에서 한 말과 비슷하게 한글로 적는다. 음복은 차 운전 때문에 고향집을 지키는 동생만 한다. 제사가 평일이면 5남매와 며느리 사위들만 참석한다. 동생만 빼고 모두가 환갑이 지났다.
식사와 환담이 끝나면 설거지를 하고 음식을 나누는 게 동시에 이루어진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든 음식을 균등하게 나눈다. 넉넉하게 준비한 호박떡은 5남매 외에도 여섯 집 친구들과 조금씩 나누었다. 조복이다. 양손에 음식 보따리를 들고 가로등과 달빛을 길 삼아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 200여 미터를 돌아 나와서 차를 탄다. 그 고향의 겨울밤은 정지용의 시 향수에 나오는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이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제사를 지냈다. 그 때는 밤 12시가 지나야 제사를 지냈다. 쏟아지는 잠을 참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이라 평소에 맛보지 못했던 음식을 제사를 지내고 나서 구경할 수 있는 기다림이 있었기 때문이다. 큰집에서 제사를 지낼 때도 아버지가 상차림을 준비했다. 우리 집에서 지낼 때도 상차림은 아버지 몫이었다. 솜씨가 좋아서 그런지 동생이라서 그런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추석과 설 말고도 제사가 많았다. 많게는 넷 집에서 제사를 지내다가 어른들이 돌아가시고 우리 집만 따로 지내고 있다.
“내가 죽으면 우리 아배(아버지)와 오매(어머니) 제사는 누가 지내노.”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병원에 입원했을 때 한 말씀이다. “아버님, 제사 걱정을 하지 마세요. 제가 잘 모실게요.” 옆에 있던 아내가 아버지에게 다짐을 했다. 아버지는 마음이 놓인 듯했다. 할아버지 제사는 음력으로 10월 17일이다. 내가 어렸을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얼굴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1970년대 말까지 할아버지 제사를 지내는 날 밤에는 동네 야경꾼이 이웃집에서 제사음식을 기다리곤 했다. 다음날 아침은 동네의 어른들 10여 명이 마당의 멍석 위에서 아침식사를 했다. 지금은 사라진 풍습이지만 모두가 가난했지만 넉넉하지 않은 음식도 함께 나누었던 행복한 추억이다.
아버지는 1998년 여름방학 때 위암 수술을 했다. 퇴원할 때까지 아내가 정성을 다했다. 그래서 그런지 아내와 아버지 사이는 아버지와 딸 같았다. 그 뒤로는 가끔씩 병원에 입원을 했다. 다시 털고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반복하는 중에 어머니가 먼저 가셨다. 아버지는 2년 뒤에 병원에 입원을 하긴 했지만, 그렇게 고생은 하지 않고 어머니를 따라 가셨다. 장례식을 하는 날은 무척 추웠다. 어머니를 모시면서 미리 합장할 자리를 준비해 두어서 일이 많지는 않았다. 끝까지 자리를 지켜준 게 해봉 송애환 회장님을 비롯한 민우회 회원들이다. 무덤을 마무리하기까지 엄동설한의 추위를 견디기 위해 불을 피웠다. 아직도 민우회원들은 그 밭에 있던 대파를 구워먹었던 게 지금까지 먹은 대파 중에 가장 맛있었다는 말을 하곤 한다.
우리 집의 제사는 가짓수나 양이 넉넉한 편이다. 장을 보고 음식을 준비하는 데도 많은 돈과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죽은 이의 제사는 결국 살아있는 이들의 잔치이다. 제사는 평소 잘 맛보지 못한 음식이 기다리는 날이다. 제사 뒤에도 그 음식이 오남매의 식탁을 풍성하게 하기도 한다. 그리고 함께 살아온 이야기, 살아갈 이야기를 나누는 만남의 장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 아들과 딸에게 지금과 같은 제사를 강요할 생각은 없다. 내가 있는 동안에는 그저 우리 형편에 맞게 최선을 다할 뿐이다. 제사는 가가례(家家禮)라고 하지 않는가. 아버지 제사를 지내면서 옛것을 익히고 그것을 미루어서 새것을 안다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을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