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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기고

문화칼럼 - 직지사·도리사·김룡사

김천신문 기자 입력 2024.08.16 10:53 수정 2024.09.02 10:53

민경탁 (본보 전 논설위원)


“너 여기가 어디라고 여기까지 왔느냐.” … 중략 … “할 수 없구나. 여기까지 찾아왔으니까 주지 스님께 말씀드릴 수밖에 ….” 당시의 직지사 주지는 김봉률 씨였다. 그분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에 온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김봉률 주지 스님께 나와의 관계를 설명했고, 도움을 청했다. 김봉률 스님은 언젠가의 만공 스님처럼 나를 떠맡았다.
“일엽 스님은 지금 선방에서 수도 정진 중이시다. 너를 돌보아 주실 입장이 아니니라. 네가 직지사에 머무는 동안 내가 어머니 대신을 해주겠다, 나를 따라오너라.”

중학교 2년생인 김태신이 1938년 여름 직지사에서 어머니 일엽 스님과 해후한 장면이다(김태신, 회고록 『라훌라의 사모곡』). 속세에 버려두고 온 자식이, 남몰래 성장해 수덕사로 찾아오자 “나를 어머니라 부르지 말고, 스님이라 부르라.”며 야멸차게 모자의 인연을 거절했던 여인. 직지사로 피해 있었는데 어떻게 알고 아들이 거듭 찾아오자 김봉률 주지에게 양아들로 맡기는 광경이다.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하면 스님들은 호국불교를 실현했다. 영남지역에서는 해인사, 직지사, 부인사, 동화사, 김룡사, 범어사, 통도사, 다솔사가 그 산방이라 할 수 있다. 근래, 경북 서북부 사찰의 독립운동사가 집중 조명, 연구되고 있다. 그동안 미공개되었던 사실들이 밝혀지고 이를 현양하는 활동들이 직지사는 물론 문경 김룡사, 구미 도리사에서 전개되고 있다.

이 가운데에는 직지사가 중심에 있다.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의 의병활동은 역사에 널리 알려진 대로다. 대사가 특히 직지사 주지를 재임, 동화사에서 왜적에 맞서 승군을 지휘했으며 팔공산성, 금오산성을 축조한 사실을 우리 고장에서는 기억할 만하다.

1920년대 중반부터 여러 번 직지사 주지를 지내며 독립운동을 한 퇴운 김봉률 스님은 세간에 잘 알려 있지 않다. 스님은 무력항일투쟁을 위한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왜경에 발각돼 체포,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왜경의 모진 고문과 혹독한 수감생활로 인해 몸이 만신창이, 병을 얻어 출옥했던 스님이다. 대처승으로 김천 성내동에 살림집을 가지고 살았는데, 부인에게는 김태신을 자신이 동경에 머물던 시절 바람을 피워 낳은 아들이라 속여 양자로 보살폈다.


김태신은 봉률 스님과 함께 또는 혼자서 만해 스님에게 보내는 편지를 수차례 전달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편지 내용물은 영남지방 사찰에서 모금한 독립운동 자금이었다.

해방 후 김봉률 스님은 경찰에 붙잡혀 심한 고문 끝 풀려났지만 몸이 벌써 망가졌다. 남로당 지하공작원으로 몰려 심한 고문 후유증으로 끝내 1949년에 세상을 떠났다. 반 세기 가까이 지나서 정부에서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근래 직지사 만세교 앞에 추모비를 건립하고 추모다례제를 올린 바 있다. 뒷날 일당 김태신 화승(이명 김설촌)이 직지사 중암에 눌러앉게 된 것도 일엽과 김봉률 스님과의 관계는 물론 김봉률 스님과 관응, 녹원 스님들과의 연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직지사의 말사인 김룡사의 민동선(본명 민병희)은 김룡사 지방학림 만세운동에 가담했던 학승이었다. 김천 감문면 본리 출신으로 1920년대 말부터 현대시조를 썼다. 영양의 조애영과 함께 경북에서는 최초로 현대시조를 쓴 것으로 추정된다. 김룡사 지방학림 만세운동에 관해선 민동선의 회고록 『한용운 선생 회상』과 『김룡사의 3·1 운동』(한상길) 그리고 문경의 의병과 독립운동사 관련 여러 문헌에 상세히 기록돼 있다. 주도자 송인수, 성도환, 김훈영을 포함 18명이 일본 헌병에 연행됨으로써 결국 좌절됐던 만세운동이다. 민동선은 합천경찰서로 연행돼 심한 고문을 겪었다. 훗날 그는 혜화전문학교(현 동국대학교)를 졸업하고 김천고보와 서울 성동고교에서 국어교사로 지냈다.

현재 직지사 말사인 구미 도리사 김경환 스님의 독립 운동에 관해서도 뒤늦었지만 연구와 명예 회복을 위한 활동이 전개되고 있다. 김경환은 상주 출신으로 도리사에 출가, 해인사지방학림에서 불교 공부, 독립운동 자금 모금운동을 하고 도리사 주지를 지낸 스님이다. 김봉률 스님과 독립운동 동지로 활약, 상호 전후해 수다사 주지를 지냈다. 하지만 아직도 사회와 국가로부터 공인을 받지 못한 것 같다.

내년이면 광복 80주년을 맞는다. 그동안 유림, 기독교, 문중의 독립운동사 현창에 비하여 사찰계의 독립운동에 관해선 관심이 부족했나 보다.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는 대구경북이 그 중심에 있다. 경북은 독립운동가 중 절반을 배출한 고장이다. 사찰에서의 독립운동이 제대로 조명되어 호국불교의 맥이 온전히 계승되는 것도 국혼을 지키는 일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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