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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일 교장 현재의 모습 |
악기마다의 음계 연습을 끝내고 애국가부터 파트별 연습을 시켰다. 악기 없는 연습을 철저히 했기 때문에 곡 연주 숙달 속도가 빨랐다. 그 다음 곡으로는 교가, 응원가, 행진곡 순으로 합주곡 5, 6곡을 마스터하는데 그렇게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당시에는 춘계 시민체육대회가 있었다. 우리 악대부가 처녀 출연하는 날이 다가온다. 내일이 시민체육대회날이면 각 대원은 자기 악기를 연마재로 닦아 번쩍번쩍 광을 낸다. 악대부원 복장도 잘 갖추고 신발도 깨끗이 씻어둔다. 만반의 준비를 다 한 다음, 대원들에게 “내일 아침 식사는 든든히 하고 오라” 당부하고 귀가를 시겼다. 그날 밤엔 나도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다음날이다. 교정에 집합 종이 울렸다. 악대부는 조례대를 향해 맨 우측에 3열종대로 열을 맞춰 선다. 전교생은 대대장의 구령에 맞춰 학년별, 학반별로 정열을 해 선다. 교무실에서 교직원들이 교무회의를 마치고 운동장으로 나오는 때를 맞춰 악대부는 경쾌한 행진곡을 연주한다. 전 교직원과 전교생은 브라스밴드의 경쾌한 음악에 맞춰 발걸음과 마음이 가벼워진다.
이렇게 음악교사로, 악대부 지도교사로 재직한 금릉중·고등학교 9년 근무 시절을 나는 결코 잊지 못 한다. 아니, 잊을 수 없다. 음악을 통해 전교생을 지도하니, 학생 누구나 고루고루 대하게 되어 모르는 학생 없이 내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금릉중·고등학교 창설 악대부 대원들이여! 그대들, 내 사랑하는 제자들아. 악대부 대원들이여. 지금 모두 어디 있는고? 최근에 만난 이들도 있으나, 많은 이들이 원근 각지로 떠나 살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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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금릉중·고 악대부원들의 모습(가운데가 당시 강희일 지도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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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교감선생님께서 울릉종고 교장으로 가시면서 내게 “강 선생, 나와 같이 울릉도 가서 근무하지 않겠느냐”고 하셨다. 나는 “이곳 김천이 좋고 금릉중·고등학교가 좋아서 언제 까지든 여기 남아 제자를 가르치고 싶습니다”고 했다. 그때에 울릉도 벽지학교 승진 가산점은 대단히 높았지만.
회상해 보건대 1978년 3월 금릉중·고등학교는 김천중앙중·고등학교로 교명이 변경되었다. 1980년 6월 김천중앙중학교가 삼락동으로 이전하면서 중·고가 완전히 분리되었다. 지금 일반계 학교에는 악대부가 사라지고 없다. 학교 현장이 교과성적 점수 따서 상급학교 진학하기에만 골몰하는 나머지 악대부 두기를 기피한다. 매우 아쉽고 가슴 아픈 교육현장의 한 켠이라 아니할 수 없다.
예(禮)가 의(義)에 가깝다면 음악은 인(仁)에 가깝다. 사람의 무리에서 서로 해악을 없게 하는 것이 음악의 이치이고, 사람을 기쁘게 하고 사랑하게 하는 것이 음악의 작용인데 말이다. 예와 악을 다 익힌 사람을 유덕한 사람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각급 학교에 악대부가 사라진 것은 인성교육 차원에서 재고해 볼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연재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