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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기획시리즈

김천의 누정(樓亭)과 누정문학(樓亭文學) ④

김천신문 기자 입력 2024.11.28 10:33 수정 2024.11.28 10:33

민경탁(국어국문학자)


▣ 옥류정(屋流亭)

한반도 가야수도지맥 수도산에서 발원하는 대가천의 최상류부, 김천 증산 유성리를 지나는 대가천 오른쪽 기슭에 있다. 창건 연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으나 원래 이름은 백석정(白石亭)이었다.
옥류천이란 조선 광해군 때에 판서 정술(鄭述)이, 이곳 바위에 부딪쳐 흘러가는 냇물이 마치 옥이 굴러가는 것 같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조선 사림파의 관인학자요 교육자인 정구(鄭逑 호 寒岡 1543~1620)가 이 옥류동을 무흘구곡 제6곡으로 설정하면서 옥류천은 지금의 명승지로 알려지게 되었다.
1936년 수해 때 일부가 훼손, 1957년 사라호 태풍 때에 붕괴돼 훼철되었던 것을 2003년 12월 김천시에서 재건하며 옥류정이라 했다.
○ 한강 정구는 「무흘구곡가」 제6곡에서 옥류동의 경치를 이렇게 노래했다.

六曲茅茨枕短灣 여섯번째 굽이라, 초가집이 짧막한 물굽이 베고 있어
世紛遮隔幾重關 세상의 어지러운 근심 걱정 몇 관문으로 막아주네
高人一去今何處 고명한 사람 한번 가더니, 지금 어디에 계시는가
風月空餘萬古閑 바람과 달만 공연히 남아 만고토록 한가롭네

옥류정
▣ 가사 「황남별곡」, 「황산별곡」을 낳은 구성 모성정(慕聖亭)

구성 황악산구곡 입구 상좌원의 굴암(屈巖)은 조선 중기의 효자 이장원(李長源 호 草堂 1560 명종 15∼1649 인조 27)이 글을 읽고 시를 짓던 바위다. 이장원은 이숭원의 5대손으로 연안이씨 중시조. 원래 조상을 추모하기 위해 하원천변에 송호재(松虎齋)를 세웠는데, 뒷날 이름을 충효당으로 고쳤다(「모성정 창건과 이축 개요」,『교남지』). 굴암은 1697년(숙종 23)부터 모성암(慕聖巖)으로 일컫게 되었다. 1929년에 이현기가 다시 세우며 모성정(慕聖亭)이라 하게 되었다.
1949년 후손들이 공동으로 경비를 조달하여 다시 세웠다. 이를 1992년에 구성~대항을 잇는 도로가 확장되면서 현재 위치인 모성산 아래의 모성암 위로 이건했다. 이곳에서부터 전개되는 황악산 구곡의 절경으로 인해 여러 편의 한시와 가사문학 작품이 탄생했다.

이 고장 선비들은 김천과 성주에 걸쳐 있는 무흘구곡과 대응하여 황악산의 남쪽 구성면에 황악산구곡을 조성했다. 황남구곡이라고도 했다. 중국 구곡문화의 도맥이 김천으로 흐른다고 상정하여 구성 상좌원, 공자동, 주공동의 마을과 골짜기를 황남구곡이라 부른 것이다. 곧 제1곡 모성암(상좌원), 제2곡 문도동(들은들), 제3곡 저익촌(지리대), 제4곡 귀영곡(명덕), 제5곡 백어리, 제6곡 안연대, 제7곡 자하령(창평), 제8곡 공자동(대성동), 제9곡 주공동을 가리킨다.
○ 조선 후기의 노론 학자 이관빈(李寬彬 호 谷仙 1759- ? )은 황악산구곡을 소재로 하여 장편가사 「황남별곡」을 낳았다. 이관빈은 이이-송시열 학통을 계승한 학자로 이이의 동생 이우(李玗 1542-1609)의 7대손이다. 그는 18세기 말 황악산 남쪽, 구성 공자동 계곡의 승경을 소재로 하여, 산수와 도학의 상호 관련성을 길게 읊은 기행가사 「황남별곡」을 썼다.
○ 「황남별곡」이 나온 반세기 뒤에 윤희배(尹喜培 호 蓮史 1827-1900)가 이를 토대로 해 양반가사 「황산별곡」을 낳았다. 19세기 후반 흥선대원군 시절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윤희배는 이황-정구의 학통을 계승한 기호학파 남인계 학자로 황악산구곡의 산수를 두고 도의 근원을 노래했다. 동방 도학을 노론의 관점에서 서술한 「황남별곡」을 남인의 관점에서 수정, 환치시킨 작품인데 내용의 80% 이상이 「황남별곡」과 일치하거나 부합한다.
「황남별곡」 중에서 모성암을 노래한 부분을 현대어로 풀이해 소개하면 이렇다.

일곡(一曲)
바위 아래 늙은 솔이요/늙은 솔 아래 맑은 내라/냇물에 발을 씻고/솔 그늘에 쉬노라니/나무꾼이 하는 말이/이 바위에 이름 있어/유학과 관계가 있었는지/모성이라 하더이다/바위도 좋거니와/이름이 더욱 좋다/증자처럼 천 길 절벽 가파르게 솟았으니/이 바위에 생각하고/맹자는 태산의 준엄한 기상이니/이 바위에 미루어 생각하면/성인의 지위가 높고 머나/이(理)가 모여 기(氣)가 되기를 못할 건가/미원장이 하던 절을/이 바위에서 내 하고자/

모성정
모성정에서 중국 도학의 맥락을 회고하며 이를 닮고자 노래했다.
구성 공자동 계곡에서는 이민관(李民觀 호 聖巖. 이장원의 5세손. 1727∼1805)이 「구곡단가」를, 호상(湖上) 여석홍(呂錫洪)이 「공자동구곡」을 남겼다. 「공자동구곡」 중 제2곡 문도동을 노래한 부분을 소개해 보면 이렇다.

문도동(聞道洞)
溪柳悠揚排俗塵 시냇가 버들 느긋하게 휘날리며 속세의 티끌 물리치고
麥天朝雨動詩新 보리의 계절, 아침 비에 시심 일어남이 새롭네
村名聞道魯何意 마을 이름이 문도라, 노나라 생각이 어찌 없을고
任杖徘徊憶古人 지팡이에 몸을 맡기고 배회하며 고인을 그리네

노 나라 공자를 그리워하며 도가 무엇인지를 묻게 되는 동네, 문도동에서 도학의 맥을 잇고자 한 시다.

구성 광명리에는 철원최씨 후손들이 최영 장군의 영정을 모시고 지은 무송정(撫松亭)이 있다. 원래 1720년(숙종 46)에 조마 신곡리에 세웠는데 1820년에 이 마을로 이건했다. 무송정 내에 봉안돼 있는 최영 장군 영정은 표준 영정으로 지정되어 전국에 보급되었다.

김천에는 훼철되었지만 김산의 서하루(棲霞樓), 지례의 감호정(鑑湖亭), 한송정(寒松亭), 임해루(臨海樓), 쌍호정(雙湖亭), 조마의 도암정(道巖亭), 어모의 감개정(鑑開亭)도 있었다. 모두 중요한 문학적 유산이 전하는 누정이다. 감개정은 어모 구례에 있었는데 조선 중기 김굉(호 鑑開堂 1560∼1634)이 중수하여 일약 금릉과 상주 문사의 시회(詩會) 공간이 되었던 정자다. 감개당의 고조나 증조 때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대 금릉과 상주의 명사들이 대거 참여하였으니 곧 조위를 비롯해 김굉, 여대로, 조정, 이준, 정경세, 김우석 등등의 선비들이 이곳에서 남긴 문학이 전한다(『금릉군지』, 금릉문화원, 1994. 6).

감호정(鑑湖亭)을 간략히 소개해 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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