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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천신문 |
연말의 공기는 늘 한 해의 무게를 품고 있다. 바람은 찬데 마음은 분주하다. 산악회장이 마카오 이야기를 꺼냈다. “아직 그곳을 밟아보지 못했네.” 그 한마디는 우리를 바다 건너 먼 곳로 향하기에 충분했다.
한 해의 끝자락, 가장 깊은 밤에 우리는 남쪽 땅으로 향했다. 밤 9시 55분, 김해공항을 떠난 비행기는 어둠을 가르며 날았다. 창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보이지 않는 바다 아래에는 수많은 인류 역사와 욕망이 흐르고 있겠다고 느낀다.
새벽녘, 우리가 도착한 곳은 중국의 특별행정구 마카오. 포르투갈 최후의 직할지였다는 마카오는 면적이 작고 인구가 적어 보인다. 유럽 국가 최후의 아시아 식민지였다고 알고 있다. 수백 년 전부터 포르투갈인들이 지었다는 건물들에서 남유럽풍 분위기가 느껴진다. 동양의 땅 위에 서양의 시간이 겹겹이 내려앉은 것 아닌가 싶다. 이 작은 도시에 세계의 시간이 압축되어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포르투갈의 종소리와 중국의 향불 냄새가 한 골목 안에서 만나는 곳에 이르렀다. 사라진 제국의 그림자와 거대한 자본의 빛이 같은 하늘 아래서 공존한다고 할까. 네온사인 찬란한 밤길을 걷는다. 세계 최대의 카지노 도시라니 이 도시에서 얼마나 많은 자본의 욕망이 밤을 지탱해 왔는지를 짐작해 본다.
이튿날, 우리는 바다를 가로지르는 강주아오 대교 위에 선다. 끝이 보이지 않는 다리는 물 위에 써 놓은 하나의 문장이랄까. 이건 인간이 바다에 써 내려간 한 문장임에 틀림 없다. 길이 어느 순간 물 속으로 잠겼다가 다시 수면 위로 이어진다. 다리와 터널, 빛과 어둠이 교차한다. 마카오와 홍콩을 잇는 구간에서 문득 ‘경계’라는 말을 떠올려 본다. 이 다리는 단순히 두 도시를 잇는 것이 아니라, 경계를 넘어 서로 다른 체제와 역사를 잇는 통로가 아닌가 싶다.
다리가 끝닿은 곳은 홍콩이다. 빽빽한 고층 빌딩 사이로 습기가 어린 공기가 흐르고, 간판들은 밤에도 잠자지 않고 있다. 할리우드 로드의 오래된 벽돌과 골동품 상점들. 이 도시가 지나온 과거의 시간을 무언으로 증언해 주는 듯하다.
미드 레벨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천천히 위로 오른다. 홍콩 도시의 숨결이 느껴진다. 아래에서는 시장 사람들의 말소리가, 위에서는 카페 안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스쳐 가는 사람들, 각자의 사연을 안고 오르내리는 발길들. 어디든 도시란 수많은 개인의 서사가 얽혀지는 거대한 공간임을 실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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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천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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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쿤에 이르렀다. 옛 경찰서와 교도소를 복합 문화 공간으로 개조한 건물이라는데 홍콩의 역사와 다양한 전시와 공연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인 것 같다. 역사는 늘 사라지지 않고 먼 얼굴로 우리 앞에 다가서는 모양이다. 유럽 분위기가 물씬하다. 감시와 통제가 머물던 자리에 지금 음악과 전시가 흐르고 있는 셈이다.
오후, 빗속을 헤치며 우리는 빅토리아 피크에 오른다. 안개가 도시를 감싸안아 야경은 흐릿하지만 오히려 이 흐릿함이 더 그윽한 멋과 여운을 준다. 또렷하게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가 사라진 것은 아닐 테다. 서로서로 우산을 나누어 쓰니 도시의 불빛보다 사람의 온기가 더 또렷이 전해진다.
홍콩 야경의 명소라는 피크 트램에 오른다. 열차로 가파른 경사를 오르니 창밖으로 빌딩들이 비스듬히 스쳐 지나간다. 빌딩의 모습들이 균형을 잃은 듯 보이더니 결국 제 궤도를 따라 움직이는 열차와 함께 묘하게 닮아 전개된다.
밤바다를 건너는 스타페리 호 위에 올랐다. 바라보니 홍콩 항구의 불빛은 물결에 부서지며 반짝인다. 별이 하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다 위에도 있다는 사실을 이제 아는 듯하다.
다시 마카오로 돌아온다. 마주한 성 바울 성당 유적은 벽 한 면만으로도 아주 웅장하다. 불에 타 사라진 건물의 몸채 대신, 남겨진 성당 건물의 정면이 하늘을 향해 서 있다. 모든 것이 완전해야만 아름다운 것은 아닌가 보다. 때로는 부족과 상실이 우리 인간에게 어떤 깊은 울림을 주는지도 모르겠다.
마카오와 함께 하기의 마지막 날이다. 세나도 광장의 물결무늬 바닥을 걸으면서 오래전에 수없이 오고 갔을 항해자들의 발길을 상상해 본다.
몬테 요새에 올라 내려다본 도시는 낮고 조용하다. 그 아래, 베네시안 마카오와 윈 팰리스의 화려한 불빛은 또 다른 시대의 얼굴처럼 번쩍인다. 과거와 현재, 절제와 과잉이 마카오란 이 한 도시 안에서 어깨를 맞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마카오와 홍콩은 ‘하나의 나라, 두 개의 체제’ 위에 서 있는 도시인 것 같다. 국경이 아닌데도 여권을 내밀어야 하는 여행길. 자본주의의 번영과 사회주의의 틀이 교차하는 고장이라 할까. 한때는 세계 무역과 금융의 중심이었던 마카오, 카지노의 도시이기도 한 이 항구. 그 빛나는 영광 뒤에 따라왔을 역사적 선택과 타협을 상상해 보며 여행 마지막 날의 밤을 보낸다.
이번 여행에서 우리 일행은 서로 우산을 나누어 쓰며 서로의 이름을 더 또렷이 부르게 되었다. 여행은 시간과 돈과 풍경을 소비하는 것만이 아니라 이렇게 인간관계를 새롭게 빚는 일이라는 소중한 사실도 배웠다.
나흘 동안에 마카오-홍콩 간을 둘러보는 짧은 여행.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창밖의 어둠을 내려본다. 보이지 않는-역사, 체제, 사람의 마음-이것이 이 세상을 움직이는 근본적인 에너지원이 아닐까 생각한다. 공존할 수 없을 것 같은 두 존재가 함께 공존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