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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수필

수필공원 - 엄마, 결혼식 때 꽹과리 쳐주세요

김천신문 기자 입력 2026.05.08 10:40 수정 2026.05.08 10:40

김영호(전 대구교육대학교 대구부설초등학교 교장)

ⓒ 김천신문
“엄마, 꽹과리 칠 줄 알지요?” “갑자기 꽹과리는 무슨 말이고.” “수지하고 결혼할 때 엄마가 꽹과리를 치면 좋을 것 같아서.” “결혼식 때 꽹과리를 친다고?” “야외 결혼식장이라 풍물놀이하면 좋을 것 같아요. 엄마, 제 결혼식 때 꽹과리 쳐주세요.” 마흔에 장가간 아들이 모바일 청첩장을 만들면서 아내와 주고받은 말이다.

“감사합니다. 신랑 아버지 김영호입니다. 성혼 선언문을 낭독하기 전에, 오늘 귀한 자리에 소중한 시간 내시어 참석해 주신 양가 친지와 하객 여러분들께 양가를 대신하여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훌륭하게 키운 딸 수지를 저희 아들 광섭이와 부부의 연을 맺을 수 있게 해 주신 사돈께 감사를 드립니다. <성혼 선언문 -생략- > 그리고 신랑 김광섭과 신부 김수지에게 두 가지 당부를 하는 것으로 축사를 대신하겠습니다. 첫째, 역지사지입니다. 광섭이는 수지를 수지는 광섭이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역지사지입니다. 서로 역지사지하면서 행복한 생활을 하길 당부합니다. 둘째, ‘용기와 두려움은 한 이불을 덮고 잔다.’라는 말입니다. 모든 사람은 용기와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어떤 일이라도 두려움보다는 용기를 내서 잘 헤쳐나가길 당부합니다. 하객 여러분. 신랑 신부가 역지사지와 ‘용기와 두려움은 한 이불을 덮고 잔다.’라는 말을 가슴에 새기면서 행복한 결혼생활을 할 수 있도록 큰 박수와 함성을 부탁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오늘 참석하신 모든 분들 사랑합니다.”

마흔인 아들이 결혼했다. 2026년 3월 21일 토요일에 서울의 보넬리 가든에서 야외 결혼식을 했다. 날씨가 참 좋았다. 나는 바깥사돈과 손잡고 입장해서 화촉점화를 했다. 하객들은 어딜 가도 남자 혼주가 화촉점화를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면서 신기해했다. 나는 성혼선언과 축사도 했다. 아들과 며느리의 혼인서약 내용을 인용해서 성혼선언을 했다. 미리 써 놓은 것도 있었지만, 즉석에서 수정해서 말했다. 축사는 ‘역지사지’와 ‘용기와 두려움은 한 이불을 덮고 잔다.’라는 말로 간단하게 했다.

아들이 결혼을 하기까지 누구보다도 가슴을 졸인 것은 아내이다. 나는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좋은 배필을 만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동생인 딸아이가 지난해에 먼저 결혼했다. 딸아이의 상견례 즈음해서 아들도 결혼을 생각하고 만나는 여자 친구가 있다고 했다. 20대 중반에 아내와 결혼한 내가 마흔일 때, 마흔에 결혼하는 아들이 중학생이었다.

부모님은 손자 장가가는 것을 무척이나 고대하셨지만, 10여 년 전에 하늘나라로 가셨다. 부모님은 초등학교 교사인 며느리를 참 좋아했다. 아내도 부모님께 지극정성의 진심을 다했다. 아버지의 환갑잔치를 하기 전에 손자인 광섭이가 태어났다. 3년 뒤에 손녀인 유정이가 태어났다. 시골집에서 몇 년 동안 3대가 함께 생활했다. 어머니는 손주들의 기저귀를 빠는 일에 한 번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한 번은 광섭이가 감기에 걸려서 콧물을 많이 흘리니 천으로 닦으면 코밑이 짓무른다면서 감기가 다 나을 때까지 당신의 혀로 콧물을 훔쳐냈다.

아들이 대학을 다니다가 자퇴하고 하루 전에 일본으로 공부하러 간다고 하던 밤에도 아들을 믿었다. 일본에서 식당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공부를 하다가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 이후에 귀국했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자퇴한 학교에 복학해서 졸업했다. 그리고 음향 회사에 취직해서 아이돌 가수들의 국내외 공연장에 따라다니느라 몇 년 동안 20여 개 나라를 다니기도 했다. 학교를 다닐 때는 공부에 별 관심이 없던 아들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일본어와 영어 공부에 매진했다. 영어 공부 겸 여행을 하느라 몇 나라를 다니기도 했다. 2019년에는 싱가포르의 마리나베이샌즈호텔에 취직했다. 우리 가족도 싱가포르 여행을 계획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2020년에 코로나 발병하면서 호텔에서 퇴사하고 귀국했다. 다시 취업 준비를 하면서 온라인으로 일본인에게 한국어 공부 및 한국 소개를 하는 일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프랑스 명품 브랜드 매장의 전산 관리팀에 취직했다. 영어와 일어 공부의 끈을 놓지 않은 게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그곳에서 며느리를 만났다. 결혼하기 전에 양가에 몇 번 왕래를 했다. 특히 모바일 청첩장에 사용한 메인 사진을 우리 집의 화양연화 농장에서 찍었다. 아내가 포도밭과 자귀나무 앞에서 사진을 찍었는데, 모두가 솜씨 좋다고 칭찬이 자자했다. 며느리의 성격이 아내와 비슷해서 아내도 매우 좋아한다. 딸같이 잘 보살펴 줄 것이라고 믿는다.

결혼식을 앞두고 아들은 아내에게 특별한 부탁을 했다. 야외 결혼식이니 풍물놀이를 해 달라는 것이었다. 특히 아내가 꽹과리를 치는 상쇠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침 아내는 교사 시절에 몇몇 초등학교에서 40여 명이나 되는 아이들의 풍물놀이를 지도해서 꽹과리나 장구 등의 기본적인 연주는 할 수 있었다. 예전부터 인연이 있었던 선상풍물보존회의 전준석 단장과 아내가 꽹과리를 치고, 나는 징을 들고, 장구와 북은 선산풍물보존회 회원들이 맡아서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축사를 마치고 아들 친구가 노래를 부르고 며느리 친구가 춤을 추는 합동 축하 공연이 있었다. 춤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마지막은 신랑과 신부가 행진하는 순서이다. 아들도 잘 생겼고 며느리도 참 예쁘다. 나도 한때는 잘 생겼다는 말을 듣곤 했는데, 아들은 할아버지를 많이 닮아서 나보다 훨씬 인물이 좋다. 행진하는 아들과 며느리를 보면서 부모님 생각이 났다. 이 좋은 날에 당신을 닮은 손자의 결혼식에 함께 했으면 그 인자한 웃음이 따스한 봄볕과 너무나 잘 어울렸을 것이라는 생각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혼주였던 영호의 결혼식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영호와 아내는 1985년 12월 8일 일요일에 구미의 목화예식장에서 결혼했다. 날씨가 무척이나 추웠는데 결혼식을 마치고 바로 김천시 아포읍 대신리의 본가에서 잔치를 열었다. 대구교대 동기가 축가로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를 불렀다. 승용차가 거의 없던 시절이라 구미에서 김천을 오가는 버스를 타고 하객으로 온 친구들도 모두 고향으로 모였다. 친구들과 함께 거나하게 축하 뒤풀이를 했다. 친구들은 아내를 무동을 태우고 노래를 부르면서 400여 미터나 되는 신작로까지 행진했다.

잠깐 옛날 생각을 하는 사이에 예식이 끝나고 자리를 옮겨서 풍물놀이 준비를 했다. 선산풍물보존회원들은 미리 옷을 갈아입었다. 아내와 나는 예식복을 입은 그대로 꽹과리와 징을 들었다. 아들과 며느리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는 것을 보고 공연을 시작했다. 잠시 원을 그리다가 식사를 하는 하객들 사이사이를 돌면서 길놀이를 했다. 반응이 아주 좋았다. 식사를 하던 하객들은 휴대폰을 들고 사진과 동영상을 찍느라 분주했다. 꽹과리를 치는 아내의 얼굴은 그동안 아들의 결혼을 학수고대하면서 노심초사하던 근심 걱정이 사라지고 그 누구보다도 활짝 피었다. 아내는 1985년 무동을 타고 고향집에서 신작로까지 행진하던 그 얼굴이었다. 아들과 며느리도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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