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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종합

대항면편(58)

편집국 기자 입력 2006.06.02 00:00 수정 0000.00.00 00:00

김천문화원이 전하는 마을이야기

▷정종대왕의 태실(胎室)과 직지사


 


  직지사 대웅전 뒤로는 조선 2대 정종대왕의 태(胎)가 묻힌 태봉이 자리하고 있다.
산신, 칠성, 독성 세분을 모신 성좌각을 돌아 10여분 남짓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울창한 송림(松林)속에 태실지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태를 매장하는 의식은 중국에도 있었으나 이를 왕실에서 제도화하여 일정한 격식과 절차에 따라 태봉을 선정하여 석물을 배치하는 것은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문화로 알려져 있는데 조선시대에 들어 왕가의 태 처리를 나라의 국운과 결부시켜 엄격한 규율에 따라 장태법(藏胎法)을 마련해 정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직지사 태봉의 주인공인 정종대왕(定宗 1357-1419 )은 태조 이성계의 둘째 아들로 1399년 태조의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올라 1년간 재위한 조선2대 임금으로 그 다음 해인 1400년에 아우인 태종 에게 양위한 인물이다.


  기록에 따르면 1399년 정종이 즉위한 해에 태봉이 조성되었다고 하는데 고려 공민왕때 출생한 정종의 태가 조선왕조 개창후인 1399년에야 이곳에 안태된 것으로 볼때 당시 사대부가의 관습상 다른 곳에 임시 안태했던 태를 등극 후 이곳으로 이안한 것으로 보인다.


  정종대왕의 태봉은 원래 직지사 북쪽에 위치하여 북봉이라 했는데 계란모양의 형상을 하고 있으면서 해발 50미터에서 1백미터 미만이어야 하며 전면에 들판이 전개되어 있어야한다는 1등급태봉의 필요충분조건을 모두 갗추고 있다.


 


△직지사 대웅전 뒷산인 태봉 정상의 정종대왕 태실지


 


  특히 왕자의 태실중에서도 왕으로 등극한 경우에만 행해지는 가봉(加封)태실로 웅장하게 세워졌던 이 태실도 1926년 일제에 의해 전국에 산재한 태실의 훼손을 막는다는 구실로 무차별 훼손이 되었는데 태실내의 태항아리만 꺼내어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으로 집단 안치되었으니 이 모든 것이 조선왕실의 정신적 지주인 태실을 훼손하여 우리 역사를 부정하려는 흉계에서 비롯된 만행이리라.


  이후 직지사 태실도 가봉 태실비를 비롯한 수많은 석물 들이 도난또는 훼손된 채 일부 석물만이 남아 주변에 어지럽게 산재해있어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하고있다.
다만 태실의 중심인 중동석이 현재 극락전 잔디밭으로 옮겨져 보존되어있고 울타리석 8개중 두개가 청풍료앞에 또다른 1개가 태봉정상 비탈진 구석에 남아있는 것이 그나마 다행한 일이라 할 것이다.


  정종대왕의 태실이 1399년 우리고장에 안치된 것은 역사적으로볼 때 큰 의의가 있는데 첫째, 왕가의 태실이 김천땅으로 들어옴으로 해서 1416년 김산현이 어모현을 폐합하여 김산군으로 승격하게 된 계기를 제공하였다는 것이다.


  들째로 조선의 배불 정책으로 전국의 많은 사찰들이 박해를 받게 되었음에도 정종대왕의 태실이 사찰 경내에 있다는 사실로 인해 직지사가 태실을 수호하는 수직사찰(守直寺刹)로 지정되어 탄압의 그늘에서 비켜날 수 있었고 일정 부분 왕실로부터 보호를 받아 조선말까지 사세를 유지해 나갈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


  이같이 김천 역사의 중심이 되었던 큰 사건인 정종대왕의 태실이  일제시대를 겪으면서 왜곡되고 훼손된 채 방치되고 있는 현실을 바로잡는 일 또한 오늘을 사는 우리 김천인의 몫일 것이다.


<글/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송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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