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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종합

대항면편 (68)

편집국 기자 입력 2006.08.17 00:00 수정 0000.00.00 00:00

김천문화원이 전하는 마을이야기

대룡리(반곡, 용복, 행정)


  미곡동 영남제일문을 지나 첫 번째 맞는 마을이 대룡리인데 조선시대에는 김산군 대항면에 속한 새터, 용복, 행정동으로 불렸고 1914년 다수동의 이로리 일부와 지금의 봉산면의 옛 지명인 파며면 하지리 일부, 행정,용복마을을 합하여 대룡동이라 고치고 1971년 반곡을 대룡1동으로 용복과 행정을 2동으로 나눈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반곡(盤谷)


  국도 4호선 변에 위치한 큰 부락 대룡1리 반곡은 동쪽으로 다수동과 접하고 남쪽으로 덕대산 자락인 오룡산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데 예로부터 김해김씨가 집성을 이루어 왔다.


  이 마을은 처음 마을이 형성될 때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새터,신기(新基)라 하다가 마을이 들판 한복판에 마치 밥상(飯床)처럼 생겼다하여 소반반(盤)자에 골곡(谷)자를 써서 반곡이라 했다고 마을이장 최덕현(46)씨가 전한다.


  마을뒤에는 덕대산에서 흘려내려 5마리의 용과 같은 형상을 한 오룡산(五龍山)이라는 산이 있는데 오룡산에 사는 다섯 마리 용의 여의주를상징하는 오룡주(五龍珠)라고 하는 다섯 개의 바위가 마을맞은편 들판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여의주 바위가 있는 곳이란 뜻으로 이 일대를 여의밭골이라 불러왔는데 1970년대 말 경지정리를 하면서 바위가 모두 묻혀 사려졌다는 것.
이를 안타깝게 여긴 마을 청년회에서 1989년 덕대산 자연석을 모셔와 마을앞에 다시 오룡주(五龍珠)라 세겨 마을이정표를 겸해 세웠다.


 




▷반곡마을앞 국도변에 다시 세워진 오룡주


 


  이 마을에는 다른부락에서는 볼수 없는 “배동지제(裵冬至祭)”라는 특이한 동제를 매년 음력10월19일 지내오고 있는데 일제시대때 자손이 없이 죽은 배씨 성을 가진 마을주민이 6백평의 땅을 동네에 희사한 것을 감사히 여긴 마을주민들이 매년 고인의 기일에 맞추어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는 것이다.


 


-용복(龍伏), 행정(杏亭)


  대룡2리로 속하는 행정과 용복마을은 서로 이웃한 마을로 1800년대 초 김해김씨 일가가 마을을 형성했다고 전해지는데 마을을 개척하면서 심은 은행나무가 마을의 정자역할을 해주었다하여 은행나무행(杏)자에 정자정(亭)자를 따서 행정(杏亭)이라 했다고 마을이장 최덕현(55세)씨가 전한다.


  또 그 은행나무가 일대의 명물로 자리 잡으면서 어룡정(魚龍亭)으로도 불리면서 마을지명을 어렁정이,어렁지라고도 했다.


  마을 지명의 배경이 되었던 마을북쪽 하천변에 있던 은행나무는 1936년 병자년 수해 때 유실되고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었다.


 


 




▷행정마을 은행나무가 있던 자리, 지금은 밭으로 변해 있다.


 


  행정과 접한 용복 마을은 1810년 전주이씨 승주(承周) 라는 분이 처음 들어와 살았다고 하는데 마을  인근의 오룡산 다섯 마리 용중에서 한 마리가 내려와 이 마을에 엎드려 있다하여 용룡(龍)자에 엎드릴 복(伏)자를 써서 용복(龍伏) 이라 했다고 마을 이장 백상윤(64세)씨가 전한다.


  마을지명이 된 용이 엎드려 있는 형상이었다는 야산은 1980년대 공장을 신축하면서 사라져버려 확인 할 길이 없다.


 


 




▷용복마을의 지명유래가 된 예전의 야산이 있던 자리


<글/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송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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