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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종합

개령면편(3)

편집국 기자 입력 2006.11.09 00:00 수정 0000.00.00 00:00

  ▷덕촌리(독송, 터골, 자방, 산당)


  덕촌리로 속한 마을은 독송, 터골, 자방, 산당등 4개 자연부락으로 이중 독송과 터골은 조선시대까지 개령현 서면의 덕림동(德林洞)이었는데 1914년 일제에 의해 전국적으로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인근의  산당과  자방을 합하여  덕촌동(德村洞)으로  고쳤다.


  덕촌1리 독송(獨松)은 신룡리 오룡골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는데 약 백년전에 흥양이씨(興陽李氏)인목(寅穆)이란 선비가 마을에 들어와 살면서 마을 뒷산의 산세가 독수리의 형상이고 정상에 큰 소나무가 홀로 서있어 마을이름을 물수리 악(鄂)자와 솔 송(松)자를 따서 악송(鄂松) 또 홀로 독(獨)자와 솔 송(松)자를 따서 독송(獨松)이라 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음이 변해 독슬로도 불렸다.


 


 


 




  ▷독송마을 지명의 배경이 된 마을 뒷산을 마을 주민 이병연씨가 가리키고 있다.


 


  이 마을은 33가구중 11호가 흥양이씨로 대대로 집성촌을 형성해왔다고하며 마을앞 어모천변에도 옛날 작은 마을이 있었는데 도적이 자주 출몰하는 바람에 폐동이되어 지금도 대적(大賊)들, 대징이들이라 불린다고 한다.


  독송 마을과는 어모천을 사이로 두고 있는 덕촌3리 터골은 취적봉 아래에 자리한 마을로 임진왜란을 전후로 함안조씨(咸安趙氏)일가가 이 마을에 터를 잡고 정착하면서 터골이라 이름하고 한자로 기동(基洞),대동(垈洞)이라 적었다.


  마을이 선이래 대대로 함안조씨 집성촌을 이루며 살았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지금은 금성나씨,밀양박씨,단양우씨등 다양한 성씨가  이거해 자리를 잡았다.
마을입구에는 자그마한 크기의 “우상학송덕비”가 이방인을 먼저 맞는데 일제시대까지 개령일 대의 최대  부호였던  우상학 선생의 선행을 기리는  비라고 마을 주민 손명하(74세)씨가  귀뜸한다.


  터골에서  감문방향으로  조금 더  들어가다 보면 우측으로 감문산 취적봉 자락에 자리잡은 덕촌2리 자방과 산당마을이 나타난다.


  자방은 1480년경 함양오씨(咸陽吳氏) 식(植)이라는 선비가 경남 함양에서 이주하여 살기 시작한 이래 대대로 함양오씨가 집성을 이루며 살아왔고 예로부터 마을에 실을 짜고 물을 들이는 일을 하는 공방이 있었다하여 자줏빛 자(紫)자에 방방(房)자를 써서 자방(紫房)이라 했다고 마을주민 오상호(82세)씨가 전한다.


  자방마을로부터 산당고개 너머에는 산당(山堂)이라 불리는 작은 부락이 있는데 1420년 밀양박씨 응(應)이란 선비가 마을을 개척하면서 산자락에 자리를 잡았다하여 마을이름을 산당(山堂)이라 했다고 하는데 옛날 산신당(山神堂)이 있었음으로 해서 붙혀진 지명으로 보인다.


  자방마을입구에는 성산이씨효열각이 섰는데 성산이씨부인은 병자호란때의 의병장으로 나라에 큰 공을 세우고 전사한 의병장 이언의(李彦儀. 1600-1639)의 따님으로 오여권(吳汝權)에게 출가하여 지극한 효성으로 시부모를 섬기고 남편이 병사하자 삼종지의(三從之義)를 쫓아 자결을 택한 이름난 효부요 열녀로 기록되었다.


  뒤에 암행어사의 장계로 1737년 나라에서 정려가 내려 어모면 다남동 오청계마을에 정려가 세워졌는데 1840년 자방으로 옮기었고 작년에 새로이 정비하여 면모를 일신했다.


 


 


 


 


 




 


  ▷지방마을의 자랑인 성산이씨 정려각


 


                                                <글/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송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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