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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종합

감천면편(첫회)

관리자 기자 입력 2007.03.23 00:00 수정 0000.00.00 00:00

 


  감천면 개관


  남서쪽으로 감천을 경계로 하여 조마면과 이웃하며 동쪽으로 농소면과 접하고 있는 감천면은 조선시대까지  성주목 관할에 신곡면, 고가대면에 속했었는데 1910년 한일합방후 김산군에 편입되었고 1914년 감천면이 신설되었다.


  감천유역에 접한관계로 토질이 비옥하여 금송평야, 도평평야, 진만리들, 개양지들 등 일찍이 들이 넓게 형성되어 곡창지를 이루었고 1970년대 이후 자두등 과수원이 야산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감천면이라는 지명도 인접한 하천인 감천(甘川)에서 비롯되었고 도평리의 문랑효랑이효각, 무안리의 김녕김씨효행비 등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효행의 고장으로도 유명하다.


 


 


 


  ▷용호리(복룡,매화,선바위)


  59호선 지방도변에 위치한 용호1리는 복용, 매화, 선바위 등 3개부락으로 구성되어있으며 1914년 성주 신곡면에서 김천군 감천면으로 개편되면서 복용(伏龍)의 용(龍)자와 복호(伏虎)의 호(虎)자를 따서 용호동(龍虎洞)이라 명명했다.


 


 



 


▷용이 엎드려있는 지세로 복용마을 지명유래가 된 마을앞산


 


  이들 세 부락은 복룡의 화심(花心), 매화(梅花), 선바위의 연화(蓮花)등과 같이 꽃과 관련된 지명이 강조됨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이는 풍수지리로 봤을때 이들 부락이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 즉 물위에 연꽃이 물위에 떠있는 길지에 해당된다는 사실과 무관치 않음을 알 수 있다.


  복룡마을은 1670년경 경주최씨 일가가 들어와 마을서쪽 구릉지에 마을을 개척하고 살면서 마을이 연꽃의 중심에 해당한다하여 화심(花心)이라 일컬었는데 뒤에 김해김씨일가들이 이거해 본격적으로 마을이 커지면서 마을앞 산의 형상이 용이 엎드려있는 듯하다하여 엎드릴복(伏)자에 용용(龍)자를 써서 복용(伏龍)이라 했고 또 마을앞에 큰 저수지가 있다하여 못골로도 불렸다.


  마을에서 마주보이는 동편의 고당산자락 영골에는 옛날 왕가(王家)의 태를 안치했다는 전해지는 태봉(胎封)이 있다.


  높이 50미터  남짓한  야산으로  그 형태가  반듯하고 특히 고당산 지맥이 복용마을을 향해 흘러오다가 혈이 맺힌 명당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전형적인 태봉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마을앞에는  뒤로  만리,  앞으로 만리나 된다는  진만리들이 펼쳐져있는데 옛날 들판이 넓다고 소문이 나서 한양의 고관들이 말을 타고와 구경을 하고갔다는 진만리들이 펼쳐져있다.


  들 한가운데는 망태기처럼 생겼다하여 이름붙혀진 망태샘이 있는데 근년에 관정이 개발되기전까지 이 샘물로 일대 7마지기 논에 물을 댔다는 유명한 샘이다.


  복용과 선바위사이 도로변에는 매화동이 있는데 조선 선조때 김녕김씨 연(演)이란 분이 이거해 마을을 형성하면서 인근에 매화꽃이 만발해 마을이름을 매화(梅花)라 했다고 하고 새로 마을이 형성되었다하여 새뜸으로도 불린다.


  매화위에는 입암(立岩), 선바위라 불리는 마을이 있는데 1650년경 남평문씨 응서(應瑞)라는 분이 칠곡 약목에서 이주해 마을을 형성했다고 전해지며 마을앞에 큰 바위가 서있어 마을이름을 선바위라했다고 마을이장 문준화(64세)씨가 전한다.


  선바위는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서 과거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동제를 이곳에서 지내며 신성시해왔는데 1936년 병자년 수해때 마을앞 대방천이 범람해 바위가 묻힌이래 마을에 변고가 잦아지자 1940년대말 당초보다 작게 새로 돌을 세웠다고 마을주민 한기천(77세)씨가 전한다.


 


 



 


  ▷입암마을 지명유래가 된 선바위를 주민 한기천씨가 가리키고 있다.


마을서쪽  대방천  너머에는 일제때 사비를 들여 야학을 개설해 마을아이들 공부를 시켰다는 문용봉 선생의 송덕비가 마을을 지긋이 굽어보고 섰다.


               


                       <글/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송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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