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안1리(기산, 외안, 삼거리)
도평리 평산마을을 지나 주유소에서 농소면 봉곡으로 넘어가는 포장도로를 따라가다가 첫 번째로 만나는 마을인 무안1리는 삼거리, 외안, 기산 세 부락으로 구성되어있다.
조선시대까지 성주목 신곡면에 속했다가 1906년 김산군으로 이속되고 1914년 인근의 무릉, 신안, 통정, 대동과 함께 감천면이 신설되면서 무릉(武陵)의 무(武)와 신안(新安)의 안(安)자를 따서 무안리(武安里)로 이름 했고 1949년 무안1동으로 분동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주군 벽진면과의 경계를 이루는 고당산아래에 자리한 기산, 외안, 삼거리는 해주오씨와 경주최씨가 집성을 이루고 있는 마을로 원래 파평윤씨 일가가 지금의 기산마을로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면서 마을의 터를 먼저 잡은 곳이라 해서 터골이라하고 한자로는 기산(基山)으로 적었는데 뒤에 1700년경 경주최씨 일가가 입향해 마을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산세가 소쿠리 즉 곡식을 고르는 칭이처럼 생겼다고 하여 터기(基)자를 칭이기(箕)자로 고쳐 기산(箕山)이라 했다고 한다.
대대로 파평윤씨와 해주오씨 일가들이 마을을 이루어 살던 기산은 점차 사람들이 아랫마을인 외안이나 타처로 떠나고 현재 파평윤씨 한 가구를 포함해 세 가구만이 남아 마을의 명맥을 잇고있다고 마을주민 오옥근(80세)씨가 전한다..
현재 마을의 본동이라 할 수 있는 외안은 원래 성주 벽진에서 기산마을로 들어와 살고있던 해주오씨 오태원(吳泰元)이란 분이 1705년 기산의 앞쪽인 현재의 외안으로 옮기면서 마을이 새로 형성되었는데 외안으로 마을을 이전한 사연과 관련하여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풍수지리로 봤을 때 외안마을 뒷산의 형세는 소가 혀를 길게 빼고 편안하게 누워 있는 명당터로 알려져 왔는데 이를 알아본 조상들이 이 터로 옮겨 마을을 이루었다는 것.
▲ ▷마을이장 오명석씨가 누워있는 소의 형세를 하고있다는 외안마을지형을 설명하고 있다. |
외안이라는 마을의 지명도 본디 마을인 기산의 바깥에 편안한 곳이란 뜻으로 외안(外安)으로 했다고 하며 실제로 마을앞 들판의 지명은 소 먹이통을 뜻하는 구시들이고 소머리에 해당하는 지점에 소 혓바닥을 뜻하는 쇠빠진 바위가 있어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
외안마을 뒤로는 해주오씨 재실인 후원재(厚遠齋)가 고당산을 배후로 높이 섰는데 고당산으로 이르는 여러 골짜기중 불당골과 개밥골이라는 지명이 유독 특이하다.
옛날 절이 있던 자리에 석탑만이 남아 있어 불당골, 탑골이라 불렸는데 이 탑에 공을 들이면 효험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원근각지의 많은 사람들이 찾던 명소였으나 언제부터인가 탑도 사라지고 말았다고 한다.
또 그 옆에는 개밥골, 개가죽골로 불리는 또다른 골짜기가 있는데 옛날 가족같이 주인을 다르던 개가 마을에 있어 영물로 이름이 났는데 어느날 주인을 따라 밭에 왔다가 갑자기 죽어버렸고 이를 안타깝게 여긴 주인이 밭에 묻어 준 후부터 개가 죽은 골짜기라 는 뜻의 개가죽골이라 불린다.
외안마을 아래 도로변에는 한국전쟁후 난민들의 정착을 위해 무안천변에 임시로 주거지를 만들었다는 작은마을이 있는데 무안1.2.3리의 갈림길에 마을이 있다하여 삼거리(三巨里)로 불린다.
▲ 무안1.2.3.리로 나뉘어지는 삼거리 전경 |
삼거리에는 칠성방구라 불리는 거대한 바위가 있어 인근주민들이 소원을 기원하는 제단으로 이용되었는데 어느해인가 공사와중에바위가 여러갈래로 깨어지고 땅에묻혀 지금은 흔적만이 남았다.
<글/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송기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