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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의 생명은 소리에 있습니다. 좋은 징소리는 황소울음과 같죠. ‘우~’하며 넓고 깊은 폭의 웅장한 울림을 갖고 끝 여운은 길게 뻗어 하늘을 치솟아야 합니다. 이런 좋은 소리를 잡아내기 위해서는 오랜 기간 연마가 필요합니다.”
경북 무형문화재 기능 보유자인 고 김일웅 옹의 차남으로 6대를 이어 징 제작 가업을 승계해 온 김천징장 김형준(40세) 전수조교를 만나기 위해 약물내기 공방을 찾았다.
김 씨는 야구모자에 추레한 작업복 차림으로 인터뷰에 응했으나 징 만드는 이야기를 할 때에 그의 눈빛은 장인의 열정으로 빛났다.
그는 “징 제작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소리잡기”라고 운을 뗐다.
징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6명이 한 조가 된다. 구리와 주석을 160:45의 비율로 섞어 고온(900~1,200℃)에서 녹여낸다. ‘바디기’라는 바둑알처럼 생긴 틀에 부어 식힌 주물을 두드리고 불에 넣어 늘리는 과정을 5~6회 반복한 후 열처리를 한다. 징 소리를 조율하는 ‘울음잡기’는 징의 제작과정에 있어 가장 마지막 단계이자 고도의 숙련된 기술을 필요로 하는 완성과정이다. 황새·벼루 2자루의 망치로 조이고 풀며 두드리는 힘의 강도에 따라 소리가 결정된다. 이 작업은 6명 중 소리를 잡을 수 있는 장인만이 유일하게 할 수 있다.
고 김일웅 옹은 황소울음과 같은 좋은 징소리를 잡기 위해 우시장을 자주 찾았으며 아들 김 씨는 인근 친구의 우사에 들러 소 울음소리를 듣는다.
어릴 적부터 어깨너머로 배워오다 스무 살이 되던 해에 본격적으로 징과의 인연을 시작한 김 씨도 2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겨우 울음잡기를 터득했다.
그는 부친에게 소리 잡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징을 만드는 것은 물론 소리를 잡는 것은 배우는 것이 아닌 스스로 터득해내야만 한다는 것이 부친의 전수방법이었다.
“언젠가는 소리를 잡을 수 있다. 그러나 네 스스로 깨우쳐야 한다.”
고 김일웅 옹이 아들에게 한 말이다.
김 씨는 징을 깨어도 보고 무게도 달아봤지만 결국 오랜 기간 연마한 경험에 의해 스스로 터득한 뒤에야 자연스레 소리를 잡을 수 있게 됐다.
지난해 작고한 고 김일웅 옹은 그에게 부친이기 이전에 큰 스승이었다. 그의 기억 속 아버지는 과묵하고 무뚝뚝한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이다. 징 작업을 할 때에도 부자는 거의 대화가 없었다. 부친이 징을 만드는 모습을 옆에서 보고 자연스럽게 배워나갔다. 그가 처음 징 소리를 내게 돼 기뻐할 때 부친은 겨우 “됐다” 이 한 말씀을 하셨다.
김형준 씨가 가업을 이어 오며 가장 힘든 점은 경제적인 어려움이다.
징은 깨지지 않는 이상 다시 찾지 않는다. 재정이 열악한 소규모 농악단에서는 전통적인 방법을 고수해 제작한 징보다는 싼 가격의 공장에서 제작된 징을 찾기 때문에 그 수요는 더욱 제한적이다. 공방에서는 한 달에 5일은 징을 만들고 나머지 날에는 방짜유기를 제작해 생계를 유지한다.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가업을 묵묵히 이어온 아버지를 존경합니다. 그런 아버지를 이어 가업을 대물림하는 것에 상당한 자부심을 느낍니다. 물질적 풍요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그것보다는 더욱 많은 분들이 우리의 전통에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합니다.”
장남을 대신해 가업을 잇고 있는 김 씨의 작은 바람이다.
김 씨는 부친의 대를 이어 무형문화제로 지정되기 위해 무형문화재 후보자 신청을 하고 경상북도의 심사를 받고 있다.
그에게는 무형문화제 지정 외에 두 가지의 꿈이 더 있다. 하나는 부친의 작업도구와 작품을 전시할 수 있는 기념관을 짓는 것이고 또 하나의 소원은 부친의 꿈이기도 했던 2m 크기의 대형징을 제작하는 것이다.
김형준 씨는 부인 이정경 씨와의 사이에 2녀를 두고 있으며 모친(김정화)을 모시는 효자로도 소문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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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 제작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김형준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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