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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천신문 |
“여자의 이름에 돌, 석(石) 자가 들어가면 아이를 못 낳는다” “이석봉 소설가는 애만 잘 낳았지 않아요?”
소설가 부부 김동리와 손소희가 문하생들 필명을 지어줄 때 나눈 대화이다. 소설가 박경리의 이름을 지어준 동리 선생은 ‘김석라’ 라는 필명을 쓰는 제자에게 ‘김지연’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김지연 한국여성문학인회장의 회고담에 나오는 일화이다.
이석봉(李石奉)은 1928년 김천 감호동에서 태어나 김천여고보(현 김천여자고등학교)와 숙명여전(현 숙명여자대학교) 국문과를 나왔다. 졸업 후 주로 전남 및 광주 지역의 광주여고, 전남여중, 보성중학교 등에서 국어교사로 재직하며 문학 꿈나무를 길렀다.
1963년 동아일보 장편소설 현상 모집에 ‘빛이 쌓이는 해구’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하였다. 1960년대 중반 <주부생활>지에 장편소설 ‘광상곡이 흐르는 언덕’을 연재하며 전국의 많은 여성독자들의 이목을 끌었다. 이 소설은 홍성기 감독이 ‘별은 멀어도’란 영화(주연 신영균, 문희, 전계현)로 제작하여 상영하기도 했다.
이석봉은 부부 문인이었다. 남편은 전남 장성 출신의 시인 박흡(朴洽 본명 박증구). 시인이자 숙명여전의 강사인 박흡과 이석봉이 사제지간에 서로 이끌리어, 세정의 냉정한 눈빛을 받으며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 두 사람의 사랑은 열다섯 나이 차이를 뛰어넘었다. 이석봉의 부모가 대구의 어느 호텔에서 사윗감 박흡을 상면하자 할 때다. 시인 정지용이 두 사람의 결혼을 꼭 성사시키겠다고 끼어들었다. 하지만 이석봉의 부모로부터 결혼 허락을 받아내지는 못 하였다.
김천의 부잣집 딸 이석봉이 전라도의 가난한 노총각 박흡을 찾아 광주로 달려갔다. 급기야 두 사람은 1949년 3월 1일 양가의 허락도 없이 들꽃을 꺾어 들고 결혼을 감행했다. 부부 문인은 광주, 전남 지역에서 국어교사로 또 동반 문학가로 살며 아들 둘을 낳았다. 이 때 문예반에서 지도해 낸 이들이 아동문학가 박명희, 수필가 임병식 등이라 한다.
박흡은 누구일까. 박흡 시인은 김현승과 함께 전남 광주 시문단 형성에 이바지하였음에도 그 동안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한 문인이다. 광주고등학교와 광주서중 등에서 문예지도를 하던 교육자이며 시인, 항일운동가였다. 시인 박봉우, 박성룡, 윤삼하 등을 육성해 내며 광주에 문단을 형성, 호남문학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지금 재조명을 받고 있다. 그는 결혼 12년 만의 부부 별거 다음해에 친구와 새벽까지 술을 마신 다음날 신세를 비관하여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석봉은 가부장적 여성의 갈등과 고민, 인간 삶의 궁극을 긍정적으로 추구하는 소설을 썼다. 두 사람에게 삶과 죽음은 곧 문학이며, 문학이 사랑과 이별, 죽음 그 자체였다. 박흡의 시 ‘화장장’, 이석봉의 소설 ‘화장장에서’가 그런 경우이다. ‘화장장에서’는 박흡의 유서가 주인공 남편의 유서로 등장하기도 한다. 1990년대 초까지 <김천문학>지에 기꺼이 작품을 보내주며 소설을 써오던 이석봉은 1999년 12월 21일 서울에서 타계하였다. 생애에 5-6편의 장편소설과 40여 편의 단·중편소설을 쓰며 한국소설문학상(1993), 한국펜문학상(1989)을 수상한 한국의 중진 작가이다.
한국문단의 이석봉, 권태을, 송일호, 심형준, 박진숙, 신영철, 김정규, 이승하, 박이하, 윤경수, 김연수, 김중혁, 조민희 등은 김천 출신의 소설가이다. 모두 소설을 썼거나 쓰고 있는 작가들이다. 근래 한국여성문학인회에서 소설가 이석봉의 문학과 삶에 대해 면밀히 조명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2010년 한국문학번역원이 미국에서 ‘한국여성작가 단편선’을 발간해 김명순, 나혜석, 김원주, 한무숙, 강신재, 박완서, 최윤 등과 함께 이석봉의 작품을 국외에 소개하고 있다. 이석봉은 김천 최초의 소설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