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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천신문 |
모록(耄碌)이란 매우 늙어서 무기력하다는 뜻이다.
人生이 늙는다는 것은 인생 60대는 해마다 늙고 인생 70대는 달마다 늙고 인생 80대는 날마다 늙고 인생 90대는 시간마다 늙고 인간 100세는 분마다 늙는다고 한다.
또한 인생 60대는 노인후보생으로 워밍업 단계이고 70대는 초노(初老)에 입문(入門)하며 80대는 중노인(中老人)을 거쳐 망백(望百)의 황혼길에 접어드는데 이르게 된다.
늙으면 홀로 있는 시간이 많고 주위에 사람이 자연히 없어지게 된다. 늙으면 사랑할 상대가 없고 걱정할 일이 없고 대화할 상대가 없고 즐길 곳이 없고 또 시간이 있으면 돈이 없고 돈이 있으면 시간이 없고 시간 돈이 있는데 건강이 안 따라 준다.
이제 노후 인생의 그 역정(歷程)과 일상을 파헤쳐 본다. 먼저 오는 것이 오감(五感) 특히 눈, 귀, 치아의 기능이 쇠퇴 되어 식사 시에 음식을 흘리고 옷을 입을 때 단추를 어긋나게 끼우며 용변 후에 단추를 끼우지 않은 채 다닌다든가 정신적으로는 인지력이 저하되고 건망증이 있어서 대인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며 화를 자주 내고 삐치고 자식들이 조금만 잘못해도 서운하게 생각하고 기대하는 마음이 더해진다고 한다.
옛말에 늙으면 아이 된다고 하는 말이 이를 비유한 말이라 생각된다. 사회적 활동에 있어서도 체념으로 느껴지는 것이 소외, 배제, 배타의 대상이 되어 외출을 스스로 삼가하게 된다.
교통편에 있어서도 순발력이 부족해서 상하차 시에 자유롭지 못하고 낙상의 우려가 있어서 자식들에게는 늘 걱정거리가 되곤 한다. 그러므로 노후 인생에 접어들면 행동반경과 운신의 폭이 좁아지고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작아지며 홀로 있는 한심(寒心)한 생각이 들게 된다.
이렇게 살다 보면 살아도 사는게 아니요 죽어도 죽는게 아니다. 예를 들면 아수불식(我手不食), 아구불언(我口不言), 아이불청(我耳不聽), 아목불시(我目不視)가 아니겠는가..
또한 모록의 일상은 누구나 두 개 이상의 병마와 싸우며 매일 한움큼의 양약을 먹으며 사는 것이 즐거움보다 고생이며 투병생활의 연속으로 조식(朝食) 후면 자신이나 배우자가 병원 가기에 바쁘고 물리치료나 약국으로 전전긍긍 하면서 돈쓰러 다니는 일이 하루의 일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명언(名言)에 의하면 제일 재산은 건강이고 인간의 가치는 건강이라고 했다. 건강할 때에는 돈은 재산이고 아프거나 늙은 뒤에 가지고 있는 돈도 유산일 뿐이다.
오늘날의 우리 모록들은 그야말로 한 많고 서러운 한 세상을 살아왔다. 일제 중엽에 파란만장했던 일제 압박에서 태어나 제대로 입지고 먹지도 배우지도 못하고 어렵게 자라나 꽃다운 청년기에는 징병이나 징용으로 청춘을 보내다가 조국광복은 되었으나 국토는 양단되고 6.25 전쟁이 발발하여 동족상잔의 비극을 당하게 되었다.
6.25 전쟁에서 나라를 수호 하였으며 보릿고개의 가난에서 경제성장으로 가난의 한을 몰아낸 경제개발 세대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우리 노후들은 6.25 전쟁의 참된 용사였고 경제개발의향도였으며 새마을 사업을 기수이기도 했다. 그뿐이랴 빈곤에 허덕이는 이 나라를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만들었고 희생적인 자녀교육으로 자식을 일등국민으로 만들어 오늘의 우리나라를 있게 한 일등공신들이다.
대한민국의 부모와 자식 관계는 자녀를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한국 부모들은 자녀교육과 혼사에 힘겨운 돈을 쏟아붓고 이것도 모자라 집을 사주거나 사업자금까지 대준다. 이런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
자녀들을 상전처럼 기른 결과 노후 생활은 파탄나고 청소년들의 부모의존도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여성부의 청소년 의식 조사에 의하면 청소년들 93%가 대학 학자금을 부모가 책임을 지고 결혼비용도 87%를 부모가 책임지고 74%가 결혼할 때 집을 사주거나 전세자금을 대주고 있다고 한다.
자녀의 용돈도 부모가 책임져야 하는 것이 76%라고 한다. 결국 자녀들을 이렇게 키우다간 자녀의 미래도 망치고 부모의 노후도 망치게 된다.
우리나라 자녀교육에서 牛骨塔을 거론 안 할 수 없다. 자식이 못 배우면 괄시를 받고 설움 받는다고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무지의 대물림을 극도로 경계했다. 그래서 내 자식만은 내 능력을 넘어서라도 가르치려고 했다.
60, 70년 대학은 상아탑이 아니라 우골탑이었다. 시골에서 목돈을 장만하기 위하여 온 식구가 나서서 키운 소를 팔아서 등록금을 대고 하숙비를 대서 겨울 다닐 수 있는 소들의 뼈 무덤이란 것이다. 다시 말하면 농촌에 사는 가난한 학부모가 소를 팔아서 마련한 등록금으로 세운 건물이란 뜻으로 대학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다.
그 당시에는 한 가족이 5~7남매의 가정이 보통이었고 장남 장손 하나만 잘 가르치기 위해 남은 가족들은 희생해야 했다. 큰형 오빠가 대체로 공부하러 나가게 되면 그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부모님과 나머지 동생들은 주린 배를 움켜쥐고 꼴을 베다 소를 먹이고 구정물을 퍼다 돼지를 길러내고 했다. 그러다가 또 학기가 시작되면 등록금을 가져가는 오빠를 위해 가축들을 내다 팔아 돈을 장만하여 그 뒤를 댔다.
우골탑의 큰오빠는 가족들의 희생에 의해 최고 학부를 나왔고 취직을 하고 자리가 잡히면 부모님을 모시지 않고 객지나 외국에 나가는 사례가 많다. 그리하여 못 배워서 오도가도 못하는 막내가 부모를 모시는가 하면 심지어는 이리도 저리도 모실 사람이 없어서 독거하는 노인이 우리나라에서 105만 명이라고 한다.
이렇게 국가에 공헌한 오늘날의 노후들의 반대 급부는 무엇인가, 빈고, 병고, 독고, 무위고 등 사대고(四大苦)의 터널에서 고통을 면치 못하고 초고령의 몸으로도 일을 해야 하고 아픈 몸으로도 홀로 외롭게 살다가 고독사하는 비통하고 애절한 사례도 가끔 뉴스를 접할 때는 남의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와 같이 지금까지 살아온 여정을 회고하면 기차길 같다고 생각하지만 타고 갈때는 직진이나 나 또한 반듯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면 굽어지고 허무, 후회, 시행착오 등 회한(悔恨)으로 점철되고 특히 부모 불효 사후라는 한국 사람들의 상투적인 말은 역시 필자의 이야기이며 백년 농사인 자녀들의 교육도 공직탓으로 불비 했음을 두고두고 후회하고 있다.
끝으로 필자는 1960년도에 농촌지도직 공무원에 入門하여 35년간 재직 중 1978년도 박정희 대통령의 국가 5급의 임명을 받았고, 1989년 1월부 국가 4급으로 승진하여 경북 상주시 농촌지도소장을 재직하면서 특수사업으로 상주시 고소득 농업의 추진 성과로 노태우 대통령의 근정포장을 수상한 바 있다.
1995년 정년퇴임 시에는 김영삼 대통령의 녹조근정훈장을 받으면서 나의 一生을 회고하면 오직 농촌부흥과 농가소득증대에 최선을 다하고 헌신할 것을 자부하면서 돈, 명예, 권세는 순간의 허영이고 일장춘몽이라는 여운(餘韻)을 남기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