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more
교육·문화·음악 수필

수필공원 - 배꽃 연상

김천신문 기자 입력 2023.05.11 11:42 수정 2023.05.15 11:42

민경탁 수필가

ⓒ 김천신문
뒷산에 오르니 배꽃이 만개해 있다. 배꽃을 대하면 연상되는 학교가 있지. 한국 근대 여명기에 생겨난 우리나라 명문 여자대학교. 이 대학의 교명에 배꽃이 들어 있음은 물론 교표의 전체 이미지로 배꽃이 쓰이고 있기 때문인가 보다. 배꽃은 지혜와 덕을 연마하는 이 대학의 학생을 상징한다고 하니. 인근 대학에 재직하던 외솔 최현배 한글학자는 한글 전용을 강조하며 이 대학 교명을 ‘배꽃계집큰배움터’로 하자고 주장한 바 있었지.

배꽃 하면 이를 소재로 쓴 시조로써 멀리 있는 연인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을 실어 보낸 여인이 있었지. 조선 중기 부안의 기생 매창(본명 李香今, 자 天香 호 梅窓, 癸生, 癸娘)이다. 열여덟 살 그녀가 천민 출신의 마흔여섯 살 유희경(劉希慶 자 應吉, 호 村隱)과의 부안에서 맺어진 사랑은 잘 알려있지.

유희경 시인과 문재 빼어난 기녀 매창, 두 사람은 문학으로써 쉬이 교감을 할 수 있었나 보다. 하지만 2년 뒤 유희경이 한양으로 올라가면서 두 사람은 헤어져야만 했다. 매창은 서울로 떠나간 연인에 대한 애틋한 심정을 배꽃에 실어 보낸다. 현대어로 옮겨보면 이렇다. “배꽃이 비처럼 흩날리던 봄에/울며 잡고 이별한 님/바람에 나뭇잎 떨어지는 이 가을에도 날 생각하고 계실까/천리길 머나 먼 곳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하는구나.//”

이에 한양에서 유희경은 화답한다. “계랑의 집은 부안에 있고/이 몸이 사는 집은 서울이라네/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 보니/오동나무에 비 내리면 애가 끊기는구나//”. 매창의 ‘이화우(梨花雨)’에 대한 촌은의 ‘오동우(梧桐雨)’로의 화답, 그의 마음이 곧장 부안으로 내닫고 있는 듯 전해진다.

매창은 황진이, 허난설헌과 함께 조선의 3대 여류문인이라 일컬어지기도 하지. 그녀 사후 58년 만에 변산 개암사에서 매창 시 58 수를 묶어 시집을 냈다. 이 시집은 현재 간송문고와 하버드대 도서관에 소장돼 전한다지. 허균은 매창의 글을 인정하고 아끼고 칭찬했으며 신석정 시인은 송도삼절에 비하여 이매창, 유희경, 직소폭포를 부안삼절이라 일컫기도 했다.

배꽃 하면 연상되는 역대의 시조 한 수가 더 있지. 고려 후기 성주 출신의 문신 이조년(李兆年 호 梅雲堂, 百花軒)의 시조다. 그가 충혜왕에게 행실을 경계하는 직언을 하였으나 이를 듣지 않자 필마로 고향 성주로 돌아가 은거할 때 지은 시조다. 현대어로 풀어보면 이렇다. “배꽃에 달빛은 은은히 비치고 은하수는 삼경을 알리는 때에/배꽃 한 가지에 어린, 봄날의 심정을 소쩍새는 알고 우는 것이랴/정 많은 것도 병인 양해서, 잠을 이루지 못 하노라.//”. 배꽃 한 가지에 어린 봄마음이 병인 듯하여 잠이 좀처럼 오지 않는다 했기에 ‘다정가’로 불리는이시조를 연정가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 시조문학 발생 초기의 명작이다.

매운당은 우리가 문학자로만 알고 있을 인물이 아니다. 일화 ‘형제 투금(兄弟投金 일명 投金灘)’의 주인공임을 알 필요가 있겠다. 매운당은 5형제 중 막내였는데, 공민왕 때 바로 위의 형 이억년이 개성유수 벼슬을 버리고 함양으로 낙향할 때에 동생 매운당이 배웅하며 생긴 일화다.


형제가 함께 길을 가다가 아우가 황금 두 덩이를 주워서 형에게 하나를 주었다. 배가 한강의 공암진에 이르렀을 때 동생이 갑자기 금덩이를 강물 속으로 내던진다. 형이 괴이하게 여겨 묻는다. 아우는 대답하기를 “제가 평소에 형님을 독실하게 사랑하였는데, 이제 금을 나누어 가진 다음에는 형님을 꺼리는 마음이 갑자기 생깁니다. 이것은 상서롭지 못한 물건이라, 강에 던져서 잊어버리는 것이 낫겠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이에 형이 “네 말이 참으로 옳다.” 하고 또한 금덩이를 강물에 던져 버렸다.

오늘날의 서울 강서구 공암진에서 있었던 일인데, 같은 배에 탔던 사람들은 누구 하나, 형제의 성씨와 거주하는 마을을 물은 사람이 없었다고 역사는 전한다(『신증동국여지승람』). 이 일화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지금도 우애와 청렴의 교본이 되고 있다. 고령에서는 매년 매운당전국백일장을 열어 그의 문학과 정신을 기리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사극에서 종종 보는 권신 이인임(李仁任)이 이조년의 손자다. 그는 할아버지가 과거 급제한 후 음직으로 관계에 진출한 것으로 전한다. 공민왕 때 두 차례에 걸쳐 홍건적을 물리쳐 1등공신이 된 후 우왕을 옹립한 공으로 권신이 되었다. 우왕은 굳이 촌수를 따지자면 이인임의 진외종질서가 된다. 이인임은 이성계의 사위 이제(李濟)와 영의정 이직(李稷)의 큰아버지다. 신돈(辛旽), 배극렴(裵克廉), 조민수(曺敏修), 하륜(河崙)과도 먼 인척이었다.

그러나, 흔히 역사에서 이인임을 역사적 책임을 다 하기보다는 개인의 권력을 위한 정치를 한 간신으로 분류하는데, 그를 간신으로 간주함에는 조선의 군신들이 우왕을 옹립한 그를 그렇게 몰아간 것이란 주장도 상당한 설득력을 얻고 있다. 목은 이색(李穡)도 그를 명재상으로 칭송한 바 있고 보면, 이인임의 역사적 평가는 좀 더 깊이 파봐야 할 부면이 있는 것 같다.

그 이인임을 탄핵하다 유배를 간 인물이 문신 이첨(李詹 호 雙梅堂)이었지. 그는 곤장을 맞고 하동으로 귀양 가 10년을 살았는데, 이때 생긴 일화가 한 편의 수필로 남아 있지. 스토리 텔링해 보자면 이렇다.

쌍매당의 하동 집 곁에 작은 샘이 있는데, 그 근원이 수풀 속에 파묻혀 잘 알 수가 없다. 이웃 사람들은 더러운 흙에서 나오는 물이라 억측해 먹지 않는다. 이에 이첨이 가서 그 근원을 청소하고 흐름을 터놓아 조금 동쪽에다 벽돌로 우물을 만들었다. 바로 이웃에 있는 이름난 우물과 수맥이 같고 또 맛이 같으니 비로소 마을 사람들이 서로 와 샘물을 길어 마시기 시작했다. 이에 쌍매당이 말했다. “물을 보는 데는 방법이 있으니, 반드시 그 근원을 중시해야 한다(觀水有術 必本其原)”(이첨, 「원수(原水)」). 눈에 보이는 것만 보지 말고, 보이지 않는 것도 볼 줄 알라는 말이렷다.

쌍매당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인재가 세상에 쓰이거나 버려지는 것도 이와 비슷한 점이 있다고 갈파했다. 곧 윗자리에 있는 사람은 인재를 쓰거나 버릴 때 겉모습만이 아닌 본질을 보고 판단하라, 외모와 말솜씨를 기준으로 사람을 등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외면에 드러난 것만 중요히 여기지 말고, 드러난 것도 알고 은미한 것도 알라는 것이겠다.

배꽃 산에서 내려와 집에 드니 새로 수립될 정부의 총리가 내정됐다는 TV뉴스가 나온다. 장관을 지명하면 그 장관에게 차관 지명과 추천권을 준다는, 신선한 소식이다. 매사에 근원을 보는 것처럼 사안의 본질을 찾아가면 시행착오가 줄 것이겠다.



저작권자 김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