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3세기 초, 고조선(古朝鮮)은 요동으로 침입하는 연(燕)의 세력에 밀리면서 쇠락해졌고, 진개(秦開)는 요동지방을 침탈하고 요동군을 설치했다. 잦은 전쟁으로 국력이 쇠퇴한 고조선은 위만조선(衛滿朝鮮/BC194-BC108)을 거쳐 한 무제에 의해 멸망한다. 한(漢)의 침략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고조선 유민들은 큐슈까지 해류(海流)를 이용해 일본으로 건너가서 도래인 부락을 형성했다.
BC 3세기부터 AD 3세기까지 야요이(彌生)시대 마을(環濠聚落)을 보여주는 큐슈 사가현 ‘요시노가리’(좋은 들판이 있는 마을)유적은 한반도에서 벼농사 기술과 청동기 문명을 가지고 집단으로 이주해간 그룹들이 일본의 조몬 시대를 끝내고 야요이 시대를 열었다고 추정한다.
당시 일본열도에는 약 10만의 아이누 족(조몬인)이 거주했는데, 야요이 시대를 거치며 50만으로 급증한다. 이는 자연증가(출생자수-사망자수)로는 불가능하며, 야요이 토기를 사용하는 도래인(渡來人)과 조몬인의 혼혈이 시작됐다고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즉, 일본인의 뿌리는 외부 세력인 야요이 인과 토착세력인 조몬인의 반복된 혼혈과정에서 형성되었다.
야요이 인들의 아스카와 나라 이주로 일본의 중심지가 규슈에서 오사카(大阪)로 이동됐고, 요시노가리 유적은 방치되었다. 1986년 신기(新琦)공단 조성의 일환으로 4년간 발굴조사 중에 약 40ha의 야요이 집터가 발견되었다. 발굴과정에서 한반도계열 청동기와 무문토기가 출토되어 세형동검집단의 일본진출과정을 보여줬다.
오사카의 가와치(河內)에 위치한 ‘가까운 아스카’는 한반도 도래인의 초기 정착지이다. 한반도와 같은 친숙한 풍경이었기에, 아스카(安宿/편안하게 잠을 잘 곳)라 명명되었던 것 같다. 오사카의 옛 지명 ‘나니와쓰(難波津)’는 “험난한 파도를 헤치고 당도한 항구”라는 뜻이다. 4세기 말 5세기 초에 한반도 도래인들이 규슈에서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를 거쳐 도착한 곳이 오사카이다.
아스카에 처음 온 사람은 가야토기(스에키) 사용인이었다. 가야인의 이주로 일본에 토기 혁명이 일어났다. 오사카 이즈미에서 가야토기와 같은 스에키(須惠器)를 굽던 가마터가 발견됐다. 또한 가야 이주민들은 말(馬)과 마구(馬具) 등 철기 문명을 전달했다. 철기 문명의 전달로 일본인들의 삶의 양식이 바뀌었다.
4세기경, 농경문화 발달로 긴키를 중심으로 호족들의 힘이 강력해지자, 권위를 과시하려고 거대한 분묘를 축조했다. 200년간 일본에는 전방후원분(앞은 네모지고 뒤는 둥근 모양) 조성되었다. 닌토쿠(仁德)릉은 길이 486m로, 다이센(大仙)고분으로 불리는데, 피라미드, 진시황릉과 함께 세계 3대 능묘로 꼽힌다. 동일한 무덤 양식이 퍼졌다는 것은 부족연맹 체제로 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스카(飛鳥)에 거주하던 도래인, 특히 백제와 왜(倭)는 동맹(同盟) 이상의 친선관계였다. 백제 왕자의 일본왕래는 일상적이었다. 백제 왕실은 천왕가 여자를 며느리로 맞아들였고, 백제가 멸망할 때, 왜는 국력을 총동원해 군사적으로 지원했을 만큼 특수적 관계였다(백촌강 전투).
나당연합군에 몰린 백제가 663년 금강하구 백촌강에서 왜의 지원으로 나당연합군과 전투를 벌였다. 야마토 정부는 일본에 있던 왕자 부여 풍을 옹립하고, 200척 함선과 5,000명 군사를 파견했다. 663년 8월 25일, 백촌강 전투에 800척 전함과 27,000명 병력이 투입되었지만 패배했고 백제는 멸망한다.
백제의 장군과 귀족을 비롯한 유민들은 일본으로 피난했고, 다자이후(大宰府)앞 미즈키(水城)를 축성해 나당연합군의 추격을 방어하고자 했다. 수성(水城)은 몽촌토성처럼 산 전체를 성벽으로 둘러싼 토성으로 축성됐다. 이후 일본은 율령을 반포하고, 국호를 일본으로 부르며, 본격적인 고대국가 체제를 갖추었다.
한편, 소가노 우마코 무덤으로 추정되는 아스카 이시부타이(石舞臺)는 7세기 초 횡혈식 석실고분으로, 아스카 시대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유적이다. 550년-710년 아스카 시대는 일본이 형성되기 이전의 시대로, 천왕가(家)를 중심으로 호족 세력이 형성되었다. 천왕가를 장악한 소가씨(蘇我氏)는 4대(비다스, 요메이, 스슌, 스이코 천왕)에 걸쳐 야마토 정권의 대신을 지낸 실권 집단이었다.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는 도래인이다. 장수왕에 의해 백제 개로왕이 아차삼성에서 죽을 때, 일본으로 피난을 간 소가마치는 백제 관료 ‘목협만치’로 추정된다. 천왕가의 며느리들은 소가씨 집안의 여자들이였다. 즉, 외척이 되었다.
아스카 시대 결혼풍습은 결혼 후에 부부가 별거하는 방처혼(訪妻婚) 형태이다. 즉, 부부가 따로 거주하며 남편이 필요할 때마다 처가를 방문하는 결혼방식이다. 방처혼은 여자가 친정에서 자녀를 양육했다. 천왕가 후손은 소가씨 가문 어머니 밑에서 양육되었다.
또한, 도래인의 흔적이 있는 아스카 히노쿠마는 백제 아지사주(阿智使主)가 살던 곳이다. 아지사주는 고구려의 침략, 자연재해, 왕위쟁탈전 등 국정 난맥상에 빠졌던 전지왕 때(409년) 아들 도가사주와 17현의 무리를 이끌고 아스카에 정착했다. 이들은 대장장이, 토목기술자, 금속기술자, 경호인 등 테크노크라트들로서 우수한 백제의 선진 문화, 기술을 전래했다. 아스카 들판에 백제문화의 꽃이 피어나게 했다.
도래인이 전파한 불교가 배불파 토착영주 모노노베(物部)의 반대에 부딪혀 숭불파와 배불파 간의 내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587년, 정미의 난에서 모노노베가 살해되고 숭불파 소가씨가 승리한다. 권력을 장악한 소가노 우마코는 스슌 천왕을 제거하고, 스이코를 옹립한다. 스이코 여왕은 직접 통치를 포기하고, 성덕태자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596년, 소가노 우마코는 왕흥사를 표본으로 한 일본 최초의 사찰 아스카사를 세웠다. 소가씨의 ‘씨사’(집안의 절)였던 아스카사는 백제계 장인들이 세운 첨단 건축물로서, 일본에 처음으로 기와와 주춧돌을 사용한 건물이다. 아스카사를 중심으로 일본은 불교 기반의 고대국가 토대를 확립하게 된다.
신라계열 진하승 부부는 토목사업, 섬유산업(니시진 비단), 마쓰오 신사 술을 생산했다. 진하승(하타씨)의 씨사 ‘광륭사’에 일본 목조반가사유상이 있다. 신라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닮은 목조반가사유상은 한반도 육송으로 제작되었다. 목조반가사유상은 한반도 양식의 도래불상으로 보고 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AD 300년-500년 연간은 신라, 고구려, 백제, 가야, 왜 등 5국(五國) 시대였다. 1,500년 前 한반도와 일본을 현재의 시각으로 보면, 올바른 역사 인식이 안 된다. 도래인 문화는 생존을 위한 문화로, 그것은 일본문화이다. 일본이 자기문화(自己文化)를 가짐으로, 동아시아 문화가 다양해졌다고 이해하는 것이 올바르다.
고대(古代)에는 한반도가 왜에 선진문명을 전달한 문화교량(文化橋梁)이었으나, 근대(近代) 선진 서양문물을 자국의 문화로 재창조한 일본의 자생력도 인정하는 역사적 안목도 필요하다. 역사를 둘러싼 한일 간의 갈등과 대립구도의 합리적 이해가 양국의 건전한 선린관계를 구축하는 디딤돌이 될 것이다.
한일 간 역사 인식의 차이와 대립을 극복하기 위한 이성적 접근법이 필요하다. 그러나 전쟁책임, 식민 지배 책임, 전후 책임 그리고 재일한국인의 법적, 사회적 지위 개선과 사할린 한국인의 귀환 문제에 대한 일본의 양심적 접근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일본은 결자해지의 입장에서 이를 책무로 수용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래야 역사적 아픔은 치유될 수 있고, 용서와 화해의 토대 위에서 양국의 진정한 친선과 평화가 피어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