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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 수도암 신라비는 비로자나불 조성기’

이남주 기자 입력 2023.12.27 11:39 수정 2023.12.27 11:39

김천시·수도암·서진문화유산, 김천시립도서관서 학술대회 개최
비석 성격, 수도암 건립시기 놓고 활발할 토론

수도산(해발 1,317m) 정상 아래 해발 1천m 지점에 위치한 수도암은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직지사 말사인 청암사 부속 암자지만, 한때는 위세를 떨친 산중 사찰로, 그때의 영광은 석조 비로자나불 좌상과 동·서 삼층석탑을 비롯한 많은 성보 문화재가 증언한다.


남쪽 너머로 가야산 주봉 상왕봉(해발 1,430m)을 바라보는 이곳에 '창주도선국사(刱主道詵國師)'라는 6글자를 큼지막하게 새긴 대강 사각형 기둥 가까운 석주 하나가 서 있다. ‘이 절을 개창한 사람은 도선국사시다.’ 이런 뜻이다.

한데 이 돌이 본래는 적지 않은 글자를 빼곡히 새긴 신라 시대 비석이었다는 사실이 2016년 11월 중순 무렵, 이것을 보존 처리하던 김선덕 서진 문화유산 소장이 글자 흔적이 있음을 확인하고, 이런 사실을 당시 위덕대학교 박물관장 박홍국 교수한테 제보함으로써 드러나게 된다.


여러 차례 단독 혹은 여러 전문가와 현장 조사와 탁본 조사를 거친 박 교수는 본래 이 비석에는 190자 정도가 새겨졌으며, ‘창주도선국사’라는 글자를 새기는 과정에서, 그리고 장구한 세월이 흐르면서 글자가 지워지거나 판독 불명으로 빠졌지만 ‘毗盧遮那佛(비로자나불)’, ‘元和三年(원화3년)’, ‘金生書(김생서)’와 같은 구절을 확인했다고 2019년 신라 사학 보라는 학술지에 투고한 논문을 통해 공식 보고하게 된다.

김천시와 수도암, 그리고 서진 문화유산이 지난 12월 15일 오후 김천시립도서관에서 개최한 '2023년 김천 수도함 신라비 학술회의'는 한국 고대 금석문으로서는 이 비석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집중 탐구한 자리였다.

이를 위해 먼저 김정원 불교문화재연구소 연구원이 수도암의 역사와 불교 문화재 현황을 짚은 다음, 신라비 공식 보고자인 박홍국 교수가 이 신라비 조사 과정과 그것이 김생의 필적임을 다시금 확인하는 발표를 했으며, 박남수 동국대 선임연구원이 이 비석 건립의 배경을 탐구했다.
 

가장 주목할 발표는 기존 판독을 보완하고 새로운 글자를 보강한 내용을 토대로 새로운 접근을 시도한 박남수 연구원 연구 성과였다.

박 연구원은 탁본과 정밀 사진 촬영 자료를 토대로 분석한 결과 이전에 보고한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 ‘원화3년무자3월(元和三年戊子三月)’, 김생서(金生書)와 같은 구절에 더해 ‘진적(眞蹟)’이라는 글자를 비롯해 ‘불흥산(佛興山)’, ‘죽산(竹山)’, ‘밀연감□□(密演甘□□)’, ‘항중방당(斻中方啺)’, ‘고김□충(考金□冲)’, ‘금88푼(金八十八分)’, ‘임인개기(壬寅開基)’ 등의 글자를 새로 판독했다고 주장했다.
 

이를 토대로 그는 이 비석이 기록한 내용은 대체로 “본 수도암이 있는 불흥산(수도산의 옛 이름)에 비로자나불이 나투는 진적이 있었고, 여기에 두 명의 큰 스님이 불법을 강설하다 죽산에서 중국으로 떠났다가 되돌아왔다. 이에 고 김▢충을 위해 금 88푼을 기부하여 비로자나불상을 조영하였는데, 본 사찰은 임인년(762)에 개창하였고, 원화 8년(808)에 비로자나불을 만들었다. 이러한 연기와 사적을 김생의 글씨로 본 비명을 새겼다.”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나아가 762년에 개창한 수도암은 이 수도암의 개창이 수도암 석조 비로자나불 조상을 만들도록 돈을 댄 사람은 금 88푼을 기부할 정도로 재력을 갖춘 김씨 성의 진골 귀족으로 인정되며, 불흥산에서의 비로자나불 출현이라는 진적에 힘입어 수도암을 돌아가신 아버지 김▢충(考金▢冲)이 모시는 원찰로 삼았다고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박홍국 교수는 2019년 발표를 보강하는 관점에서 시종 이 비석이 김생 친필임을 주장하는 논거를 보강하고자 했다. 이를 증명하고자 기존에 김생 친필이라 알려진 금석문들을 비교하며, 나아가 그의 글씨를 집자(集字)했다는 자료들도 분석했다.

박 교수 발표에서 특히 논란이 되는 부분은, 이 비석을 원화 8년(808)에 김생이 직접 쓴 비석이라 했을 때, 삼국사기에서 말하는 김생 출생연대 711년과 어떻게 합치 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 수도암 신라 비를 세울 때 김생은 백수에 가깝게 된다.

이때까지 김생이 살아있을 가능성도 희박하지만 백수 노인이 글씨를 쓴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이에 박 교수는 삼국사기가 말하는 김생 출생연대는 믿을 수 없고, 그의 출생연대는 그보다 뒷 시기로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두고서 토론과정에서 여러 의견이 오갔다.

미술사 관점에서 수도암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하며, 특히 절에 남은 석조 비로자나불 좌상과 삼층석탑을 비롯한 여러 성보 문화재를 탐구한 김정원 연구원은 수도암 역사를 조망할 때 가야산 해인사와의 관계 설정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간단히 말해 가야산 해인사 문화권이라는 관점에서 수도암을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발표들을 토대로 좌장을 맡은 김창겸 김천대학교 기초교양학부 특임교수의 사회로 진행된 종합토론에서는 여러 의견이 활발히 오갔다.

김태식 국토 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은 수도암이 해인사 문화권이라는 김정원 연구원 발표에 동조하며, 두 사찰을 연결하는 산상 교통로 해명이 중요함을 역설했다.

나아가 종합토론 사회자인 김창겸 교수는 생김새와 내용으로 보아 현존하는 이 신라비는 본래 비석의 전부가 아니라 부분일 수도 있음을 제기하며, 이를 주목해 비석을 분석해야 하며, 아울러 나머지 부분들이 수도암 경내 일대에 있을 여지도 있으니 주목해서 살펴야 한다고 주문했다.

김천시에서는 이처럼 중요한 수도암 신라 비에 대한 정밀 조사와 분석을 거친 후에 경상북도 문화유산으로 지정을 신청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번 학술회의를 계기로, 김천 지역 내 더 많은 다양한 문화유산을 발굴, 보존하고, 나아가 주민들과 함께 소중한 역사문화와 관광자료로 활용 계획이 수립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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