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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기획시리즈

김천의 누정(樓亭)과 누정문학(樓亭文學) ⑤

김천신문 기자 입력 2024.12.12 10:12 수정 2024.12.12 10:12

민경탁(국어국문학자)


▣ 감호정(鑑湖亭)

조선 중기 1690년(숙종 16)에 조인상(趙麟祥) 현감이 지례 상부리에 건립했다. 1755년(영조 31)에 홍수로 유실된 것을 1760년(영조 36)에 이창원(李昌遠) 현감이 재건했다. 정자 앞에 못을 만들어 경관이 맑고 화려하며 주위에 뛰어난 경치가 많았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구성 광명리에도 같은 이름의 누정이 또 있었다.

○ 조선 중기의 학자요 정치가인 조경(趙絅 호 龍洲 1586∼1669)이 감호정에서 장시를 읊었다. 그는 광해군 때 거창에 숨어 살았고, 인조 때 지례현감을 지냈다. 그 장시 의 일부분을 살펴본다.
鑑川亦添天恩 감천은 역시 하늘의 은혜를 입어 흐르는데
好事古今孰雌雄 고금에 좋은 일 어느 것이 더, 어느 것이 덜 좋은가
美名華夷無內外 아름다운 이름은 중화와 오랑캐에도 안팎에 없네
縣前桃李三月時 현 앞에 복숭아꽃 오얏꽃 만발한 삼월, 이 때에
川原遠近紅雲靄 내와 들판은 멀리 가까이, 구름과 아지랑인 붉게 피어오르네
行春仍理釣魚舫 봄놀이 가려, 이에 고기잡이 배 수리하니
綠 平沙映衣帶 푸른 물결 이는 모랫벌에 의대(衣帶)가 비치네
浴鳧飛鷺自相賀 목욕하는 오리와 나는 백로는 절로 서로 하례하는데
魚子樵童任無賴 고기잡는 아이와 나무하는 아이는 서로 의뢰하지 않네

▣ 김천 8경의 하나, 교동 봉황대(鳳凰臺)
-원래 읍취헌( 翠軒)이라 부름

김천 교동은 김산이란 지명의 본거지다. 조선시대 김산군 관아가 있던 읍치지(邑治地), 문화의 중심지였다. 교동의 연화지, 봉황대, 김산향교는 이를 뒷받침하는 문화유적이다. 이 마을에 김산향교가 있기에 교동이라 불렀다. 교동, 삼락동, 문당동을 합쳐 김산동 또는 김산골이라 일렀다. 김산동은 1905년 경부선이 개통되면서 군의 중심이 평화동, 남산동으로 옮겨지자 구읍(舊邑)으로 불리게 되었다.
봉황대의 창건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변천과 개명이 심했던 것으로 역사에 전한다. 원래는 1700년대 초 김산 관아의 북쪽에 세워 읍취헌( 翠軒)이라 불렀다. 숙종 때에 윤택(尹澤) 군수(재임 1706년 숙종 33∼1711년 숙종 37)가, 솔개가 봉황으로 바뀌어 나는 꿈을 꾸고 봉황루(鳳凰樓)라 고쳐 불렀다(『김천시지』, 1989).
누정이 낡아지자 1771년(영조 47) 김항주(金恒柱) 군수가 구화산(九華山) 쪽(현 김천법원 뒤쪽)으로 옮겨 세우고 봉황대(鳳凰臺)라 이름했다. 이를 1792년(정조 16)에 이성순(李性淳) 군수가 개축하고, 1838년(헌종 4) 이능연(李能淵) 군수가 연화제(蓮花提)에서 못의 섬 가장자리로 옮겼다. 다시 1896년(고종 33)에 윤헌섭(尹憲燮) 군수가 주민들로부터 성금을 모아 중수했는데 현재는 봉서관(鳳棲觀)으로 편액이 걸려 있다.
1978년에 김천시에서 보수하여 1985년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15호로 지정되었다. 1993년에 김천시에서 시민 휴식 공간으로 조성, 2021년 김호중 소리길과 연계하여 테마관광지로 조성, 현재 김천8경의 한 곳이 되고 있다.
○ 조선 성종 때의 문신 유호인(兪好仁 호 林溪 또는 溪. 함양 태생. 1445∼1494)이 봉황대에 올라 쓴 시가 있다. 김종직의 제자인 유호인은 32세 때인 1476년(성종 7년) 가을에 이 고장을 오가며 채수ㆍ허침ㆍ권건ㆍ양희지ㆍ조위와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했다. 그는 성종의 극진한 총애를 받으며 『동국여지승람』 편찬에 참여했고, 거창 현감(1480), 의성 현령(1488), 합천군수(1494)를 지냈다.

김산의 봉황대. 현판에는 봉서관으로 씌어있다.

유호인(兪好仁)의 한시

金陵佳塵地 一沼貯淸波
금릉 아름다운 땅, 한 연못에 맑은 물을 가두었네
得所錦鱗 琦風楊柳斜
곳을 얻은 비단잉어 가득하고, 아름다운 바람에 수양버들 나부끼네
碧知三萬盖 紅見十丈花
삼만 개의 연잎이 푸름을 알겠고, 열 길 연꽃이 붉음을 보네
勝 非吾分 征輪獨此過
명승을 감상함은 내 분수 아니니, 가는 길에 홀로 이곳을 지나네

○ 조선 후기 김천 구성 출신의 의병장 여대로(呂大老 호 鑑湖. 1552 명종 7-1619 광해군 11)가 연화지에서 쓴 시가 있다. 그는 남명(南溟)의 문하생으로 정구(鄭逑)·장현광(張顯光)·정경세(鄭經世) 등과 교의(交誼)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켜 김면(金沔)·곽재우(郭再佑)·권응성(權應聖) 등과 지례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지례현감, 의성현령, 합천군수를 지냈으며 평생 권세에 굴복하지 않고 의(義)에 살았다.

金泉郵軒下詠蓮 김천우헌 아래 연꽃을 노래하다

何年移向小池開 어느 해에 이곳으로 옮겨 작은 연못 만들었나
到處傾珠碧玉杯 도처에 푸른 옥 술잔에 구슬이 기우는 듯하네
無地可容高十丈 열 길의 높이도 가히 용납할 땅이 아닌지라
晩香還 露華催 늦 향기에 도리어 이슬꽃 재촉될까 두렵네

爲愛荷香紅爛蒸 연꽃 향기 사랑스럽고, 붉은 꽃 찬란히 피어오르니
池樓今夜強攀登 오늘 밤 연못 가의 누각을 단단히 잡고 올라 보네
葉同世態風難定 연잎은 세태와 같아 바람에 고요 하기 어려우나
珠似人情露未凝 구슬은 인정과 같아 이슬에도 엉기지 않네.

* 우헌(郵軒) : 역참(驛站)에서 찰방(察訪)이 사무를 보는 곳. 우아(郵衙).
경주(傾珠) : 푸른 연잎에 이슬이 구슬마냥 기울어 구르는 듯하다는 것.
노화(露華) : 이슬의 아름다움을 꽃에 비유한 표현.
반등(攀登) : 높은 데의 것을 더위잡고 오름. 등반하다.
인정(人情) : 사람의 따사로운 마음. 남을 동정하고 이해하는 따뜻한 마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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