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철이 들면서 아버지는 아주 고독한 존재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소리내어 웃으시는 걸 보지 못했고, 필요 이상의 일을 하시는 것도 보지 못했다. 따라서 주위의 사람들도 아버지 앞에서는 소리를 죽여 웃어야 했고, 필요 이상의 말을 해서는 안 되었다. 아버지가 계시는 곳에는 항상 긴장된, 엄숙한 분위기가 떠돌아 누구나 참을 수 없는 압박감을 느끼기 마련이었다. 어쩔 수 없는 용무로 찾아온 사람들도 용무가 끝나는 대로 곧장 돌아갔고, 어쩌다 장기나 두려고 찾아온 노인들이 두세 시간 지체하다가 자리를 뜨는 게 고작이었다. 밤에 주무실 때는 금고 옆에 창을 세워 놓고 혼자 주무시는 것이었다. 식사 때 외에는 안방으로 오시는 일이 없었다. 시종 말 한 마디 없이 식사를 마치시고는 담뱃대를 물고 사랑으로 건너가시는 것이었다.
내가 중학교 다니던 어느 날 밤이었다고 기억한다. 식사를 마치자, 내 방으로 건너가려는 나를 부르셨다.
“너 거기 좀 앉거라”
나는 주춤 놀라 멀찍이 무릎을 꿇고 앉고 말았다. 마치 대죄하는 심정이었다. 밥상을 물리시고 담뱃대에 담배를 재우시며, 아버지는 조용히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어떤 둔재의 이야기였다. 둔재의 아버지가 그 아들을 불러서 앉혀 놓고, 앞집 아무개는 한 마디만 들어도 열 가지 뜻을 헤아린다는데, 너는 왜 그렇게 우둔하냐고 한탄을 했다. 그러자 그 둔재는 조금도 꿀리는 기색 없이 아주 어엿한 어조로 “아버지, 송곳으로 구멍을 뚫으면 빨리는 뚫리지만, 그 구멍은 크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먹으로 구멍을 뚫으면, 더딜망정 그 구멍은 클 줄로 압니다.”라고 대답했다. 과연 앞집 재사는 자기 재주만 믿고 빈둥대다가 소인밖에 못 되었고, 그 둔재는 꾸준히 노력해서 큰 인물이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덧붙여서
“네 이 말을 명심해라.”
하시고는 사랑으로 건너가셨다. 나는 한동안 그대로 앉아 있었다. 필경, 평소의 나의 경망함을 경계하신 말씀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오늘날 나에게 뼈저리게 느껴지는 교훈이기도 하다.
그 후부터 나는 더욱 아버지가 어렵고 두려웠다. 집에서는 물론, 학교에 가서도 아버지의 엄숙한 표정과 말이 앞서며, 나 자신도 차츰 그런 표정으로 굳어져 가고 있었다. 잘 웃지도 않았고 보다 많이 침묵을 지켰다. 동무는 언제나 한 사람 이상을 넘지 않았다. 아버지와 똑같은 고독은 나도 모르는 새에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교정에서 활발하게 운동하는 동무들을 도서실에서 내다보며 속으로 경멸했다. 마치 아버지가 명랑하고 쾌활한 사람들을 경하다고 경멸했듯이 ….
아버지의 고독은 또한 어머니를 일평생 고독 속에 방치해 두었다. 내가 소학교 때 일이었던 것 같다. 고작 소설 읽기로 고독을 메꾸려던 어머니는 육전소설 애독자였다. 어느 겨울 밤, 「춘향전」을 읽으시다가 갑자기 소리가 딱 멎었다. 그 뜻은 잘 모르면서도 낭독하는 가락이 듣기 좋아 귀를 기울이고 있던 나는, 의아스러운 시선으로 어머니를 살폈다. 눈물을 담뿍 머금고 계셨다. 나에게서 외면하시며 한탄하셨다.
“세상에 이런 인생도 있는데 ⋯.”
아마 이 도령과 성춘향이 서로 희롱하며 즐기는 장면이었던가 싶다. 나는 이따금 어머니의 그 말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 으레 내 입가엔 쓸쓸한 웃음이 떠오른다. 아버지의 고독의 제물이 된 어머니는 “사람의 한 평생이 고작 이런 것이냐”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운명하셨다.
나는 고독이 두렵고 싫다. 많은 사람과 사귀고 싶고, 엄숙하고 침울한 얼굴보다 명랑하고 쾌활한 얼굴들이 아쉽다. 남을 이해하고 포용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를 양보하고 죽이기까지라도 하고 싶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본질을 버리지 못한 채로다. 친구의 선택이 까다롭고, 어렵사리 택한 친구에 대해서는 혹독하리만치 완전을 바란다. 그 복장으로부터 언동, 사상, 감정에 이르기까지 내 안목에 들어차기를 바란다. 그 친구가 그렇지 못하면, 나는 건질 수 없는 고독에 빠진다.
내가 나의 이 고독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내가 선택한 친구가 내 안목에 들어찰 수 있도록 노력해 주거나, 아니면 그 자신의 안목 속에 나를 완전히 정복하거나 하는 것밖에 없는 것이다.
˙국어교사, 소설가(1928~1999). 대표작 : 장편소설「광상곡이 흐르는 언덕」.
경북 김천 감호동 태생. 김천여고, 숙명여대 국문과 졸업. 박흡 시인과 결혼함.
한국문인협회원, 한국펜클럽회원, 한국소설가협회원, 한국여류문학인회원.
허균문학상(1980), 한국펜문학상(1989), 한국소설문학상(1993)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