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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종합

남면편(마을이야기 92)

관리자 기자 입력 2007.02.23 00:00 수정 0000.00.00 00:00

 


 ▷월명1리(섶밭)


  부상리를 지나 남북저수지 안쪽,바위암산 아래에 위치한 월명1리는 성주군 초전면과의 경계를 이루는 마을로 조선시대까지 개령현 남면에 속해 신전(薪田)이라 적고 섶밭이라 했는데 1914년 인근의 운봉,동릉을 합해 월명동이라 고치고 1971년 섶밭을 월명1동으로 분동한후 오늘에 이르고있다.


  이마을은 임진왜란때 김해김씨 홍일(洪一)이란 분이 칠곡에서 이주해온후 대대로 김해김씨 집성을 이루어왔다고 한다.


  섶밭이라는 마을이름은 옛날 마을에 나무를 태워 숯을(薪)을 굽던 밭(田)이 있었다하여 숯밭,섶밭이라 하고 한자로 신전(薪田)이라 적었다.


  1954년 축조되었다는 마을앞 저수지는 땅은 남면에 있고 모아둔 물은 북삼에서 이용한다하여 남북지(南北池)라 했다는 재미있는 일화를 발견할 수 있었다.


  수년전까지 마을앞 성주방면 지방도 변에 있던 말구리라는 작은 부락은 얼마전 아포,현풍간 고속도로가 나면서 폐동이 되고 형체를 찾을길이 없다.


  말구리는 성주,김천간 도로변에 위치한 관계로 예로부터 인마의 통행이 빈번해 말발굽을 갈아주는 대장간이 있어 말구리라는 지명을 얻게되었다고 한다.


  말구리로부터 성주방면으로 가다보면 신거리고개로 불리는 작은 고개가 나오는데 이 고개아래의  미륵암(彌勒庵)에는 고려시대 초기에 제작된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20호  석조미륵불 입상이 보존되어있다.



   ▷섶밭마을 미륵암의 석조미륵불 입상


 


  전설에 따르면 옛날 한 도둑이 김천에서 소를 훔쳐 고개를 넘어가는데 밤새도록 걸어도 미륵불 주위만 맴돌고 있어 화가난 도둑이 도끼로 미륵불을 내리쳤는데 왼팔이 떨어지면서 도둑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도둑을 묻은 도둑묘라고 전해지는 봉분이 근년에까지 내려왔다고 마을 노인회장 엄석주(72세)씨가 전한다.


  수년전 훼손된 미륵불을 정비하면서 미륵암 안쪽으로 이전을 해서 보호가 되고있는데 1999년 미륵암터에서 나당연합군으로 백제정벌 에 참여했던 당나라 시장군(柴將軍)의 비석이 출토됨에따라 미륵암이 신라때 창건된 사찰임이 확인되었다.


 


 ▷월명2리(운봉,상릉,하릉)


  섶밭에서 성주방면 지방도를 따라 가다가 현풍간 고속국도 아래 굴다리를 통과해 골짜기를 따라 한참을 더 들어가면 내봉산 자락에 운봉이라 불리는 마을이 나타난다.
월명2리는 운봉,상릉,하릉등 세 개부락으로 이루어졌는데 일대의 지대가 높아  항상 산에 구름이 있다하여 운봉(雲峰)이라했다고 전한다.


  운봉마을은 영월엄씨 집성촌으로 수사공파(水使公派) 22세손인 엄환이란분이 영조때 어모면 상남에서 이주한이래 집성을 이루어왔다고 후손 엄태정(77세)씨가 전한다.
운봉마을을 지나 감징이 고개(서낭대이)를 넘어서면 신기하게도 산정상부로부터 논밭이 펼쳐지면서 상릉,하릉마을이 눈앞에  들어온다.


  상릉,하릉 두마을을 합해 동릉(東陵)으로 불리는 이 두 마을은 의령여씨(宜寧余氏) 종록(宗綠)이라는 분이 영조때 선산에서 상릉으로 입향한 이래 집성을 이루어왔다고 한다.
동릉이라는 마을의 지명은 마을을 개척할 당시에 마을동쪽에 큰 무덤이 있어 동릉(東陵)이라하고 무덤의 위쪽에 있는 마을을 상릉(上陵)아래의 마을을 하릉(下陵)이라 했다고 마을이장 엄태봉씨가 전한다.


  풍수지리로 볼때 상릉, 하릉마을은 떠나가는 배(船)의 형국인지라 마을을 세울 때 한 도사가 마을의 상·중·하에 돛대를 상징하는 느티나무 세 그루를 심어 마을의 안녕을 기원했는데 근년에 두 그루가 잘려나가고 하릉의 나무마저 2002년 태풍으로 가지가 잘려나가자 마을주민들은 부러진 나무가지로 장승을 만들어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고 있었다.



 


▷돛을 상징하는 세그루의 정자나무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하릉의 정자나무


<글/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송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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