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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종합

특집-세심 김세영(洗心 金洗塋) 추모(追慕)

권숙월 기자 입력 2010.08.26 14:27 수정 2010.08.31 03:59

50년 세월 ‘최송설당 교주 건학 이념 맥 이어’

명문 사학 김천중·고등학교 있게 했네!

ⓒ (주)김천신문사
학교법인 송설당교육재단 김세영 명예이사장이 91세를 일기로 8월11일 오전 3시30분 별세해 13일 오전 8시 연세의료원에서 고인의 가족과 친지, 송설당교육재단 이사진, 송설동창회 회원, 김천중고 교직원과 학생 등이 참석한 가운데 영결식을 갖고 고인의 유언에 따라 벽제에서 화장을 한 후 황영조 기념공원이 있는 강원도 삼척 앞바다에 모셔졌다. 이에 본지는 고인에 대한 특집을 마련했다. <편집자 주>

약력
△1920년 1월5일 상주시 함창읍 출생
△김천중학교 졸업(송설 4회)
△평양 대동공업전문학교 졸업
△함태탄광 자영(강원도 태백시)
△금정광산 자영(경북 문경시)
△대한석탄협회 및 대한광업회 이사
△송설당교육재단 이사장
△가야산업(주) 대표이사
△근해상선(주) 대표이사
△세심장학회 설립 운영
△제5대, 제6대 국회의원

올곧은 외길, 젊은 날의 초상

김세영 이사장은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 상주시 함창에서 태어났다. 한반도에 대한 일제의 식민지 경영이 점차 본격화되던 시절이었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함창을 떠나 김천에서 청소년기와 학창시절을 보냈다. 지방 명문 사학으로 이름을 드날린 김천중학교, 후일 재단 육성에 정성을 쏟아 부은 김천중학교가 바로 청운의 큰 꿈을 길러 주었던 곳이다.
그는 그의 미래 꿈을 탄광 사업에 두었다. 그래서 당시로는 타관객지나 다를 바 없는 평양으로 어렵사리 유학의 길을 떠났다.
처음에는 형님이 졸업한 대구사범학교에 진학하려 마음먹었다. 그러나 모든 진로에서 사람의 생각을 넘어서는 하늘의 명운이 있다고 했던가, 그 무렵 절친한 친구를 통해 알게 된 탄광 분야의 이야기가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소년 김세영에게 여러 가지 갈래의 길이 있었지만 어느 새 그의 발길은 평양에 있는 전문학교로 옮겨지고 있었다. 그의 첫 인생 도전은 친구와 더불어 광업 분야의 진로를 결정한 데서 시작된다. 그의 훗날 자취를 더듬어 볼 때 아마도 김세영이사장과 탄광은 이처럼 미리부터 하늘이 준비시킨 각별한 연을 지니고 있었던가 보다. 이렇게 해서 그는 평양의 대동공업전문학교에 진학하게 된다.
하지만 다들 어려웠던 시절 그의 유학길인들 오죽했을까. 스무 살을 갓 넘긴 청년의 나이에 평양 대동공업전문학교를 졸업한 김세영은 곧바로 중국의 산동성 천탄망에서 사회인으로의 첫걸음을 시작했다. 공업전문학교에서 배운 탄광을 발굴하고 개발하는 것을 그대로 살릴 수 있는 직장이었다. 지금처럼 직업군이 다양하지 못했던 시절이라 전공을 제대로 살리는 직장을 가지기 힘들던 때이었다. 그의 초지일관하는 자세는 전공 이외의 다른 직업 분야로 휩쓸리는 것을 스스로 허락지 않았다. 비록 머나먼 중국 땅이었지만 자신의 전공을 제대로 찾아 첫 직장의 첫 걸음을 옮긴 셈이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국내 최대의 석탄 탄광으로 명성이 자자하던 강원도 태백의 ‘함태탄광’, 그리고 다시금 적잖은 생산 가능량으로 태백 주민들에게 희망을 안겨주고 있는 함태탄광을 직접 일구어 낸 저력을 어디서 찾아야 할까? 아마도 청년 김세영의 이러한 소신 있는 진로 결정과 굽히지 않는 추진력에서 함태탄광의 명성이 만들어지고 있있던 것 아닐까.
중국 땅에서 펄펄 날리는 탄가루와 더불어 생활한지 삼 년 남짓, 온 나라가 영원하던 광복이 됐다. 꿈에서도 그리던 조국으로 돌아오던 날, 그는 일제의 36년 지배 아래서 헐벗은 나라 곳곳을 바라보면서 다시금 탄광 개발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다고 한다. 하여간 그는 그간의 이력을 바탕으로 국내 굴지의 탄광회사에 두루 재직했다. 그리고 이성 교제가 자유롭지 못했던 당시로서는 드물게 친구 소개로 만나 백년해로한 김동운 여사와 결혼하게 된다.
하지만 이들 부부의 신혼은 현실의 고소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당장의 끼니 걱정이 앞서는 당시의 상황이 이 젊은 부부에게 신혼의 단꿈조차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김세영 이사장과 송설학원

김세영 이사장의 일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업적 가운데 하나는 현재의 김천중·고등학교 재단(송설재단) 이사장으로서의 활동이다. 김세영 이사장은 최송설당 여사가 설립한 김천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 제4회로 졸업했고 송설학원이 위기에 처한 1956년 제4대 송설당교육재단 이사장에 취임해 2006년까지 50년 세월을 헌신했다.
재임 중 재학생들을 위해 세심장학금을 지급하고 졸업생들을 위해서는 고등학교 졸업 후 서울의 대학에 진학한 가난한 학생들을 위해 서울시 중랑구 상봉동에 세심장학사라는 기숙사를 설립, 무료로 숙식을 제공하고 학비를 전액 지원했다.
또한 기회 있을 때마다 학생과 교직원들에게 송설학원의 창교정신과 전통을 강조해 왔다. 즉 송설학원을 빼놓고 김세영 이사장의 일생을 이야기하거나 김세영 이사장을 빼 놓고 송설학원을 이야기할 수 없을 만큼 김세영 사장은 평생을 송설학원과 같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세영 이사장은 광산업을 운영해 자수성가한 사업가로 후세의 교육에도 남다른 애착과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1957년 1월10일 송설교육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하게 된 것도 이런 그의 교육에 대한 애착과 신념의 일환이었으며 교육을 통해 국가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서였다.
그가 송설학원의 이사장으로 취임한 1957년 당시 송설교육재단의 재정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재단의 기본재산이라고는 한 푼도 없어 교사들의 봉급마저 몇 달씩 미뤄오던 상태에서 학교와 후세 교육을 바로 세우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비록 부족한 사람이지만 모교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 있다면 미력이나마 사양하지는 않겠습니다.”
그의 이런 취임사는 지역의 주민과 동문, 그리고 교육을 염려하는 많은 이들에게 새로운 빛이 되기에 충분했다.
1931년 최송설당 여사가 전 재산을 투입해 설립한 송설교육재단은 초창기 교사들의 봉급을 타 학교의 배액으로 지급해 우수 교사를 초빙하는 등 국내 일류학교로 손색이 없는 출발을 했으나 일제강점기와 해방, 토지개혁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1957년에는 재정적으로 최악의 상태를 맞고 있었다. 기본재산이 없어 교주의 제수답(祭需沓)마저 재단에 편입해 가까스로 중·고등학교의 모습은 갖추고 있었지만 재정은 핍박한 상태여서 새로운 지원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었다. 송설교육재단이 이와 같은 심각한 국면에 봉착해 있을 때 기사회생의 활력소로 등장한 사람이 바로 김세영 이사장이다.
이사장으로 취임해 학교 건물의 보수 및 신축을 추진하고 재단의 재건을 위해 그동안 재단의 재산이면서도 가치를 발휘하지 못하고 방치됐던 서산염전(42만 평)을 농장으로 개발해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이로써 송설학원은 절박했던 재정적 어려움에서 벗어나 교육에 전념할 수 있는 부흥기를 맞을 수 있었으며 명실공히 교육에 있어서 ‘영남의 오아시스’로 다시 발돋움하는 전기를 맞게 했다.

조사(弔辭)
오늘 고 세심 김세영(洗心 金洗榮) 이사님을 영결하는 자리에 선 우리 모두의 마음은 너무도 허전합니다. 고인을 잃어버린 우리의 슬픔은 폐부에 미치도록 극진합니다. 마음의 고향을 안온하게 감싸주던 큰 산이 무너진 듯합니다. 이 망연함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푸른 그늘을 넉넉하게 베풀어 주던 낙락장송이 넘어진 듯이 막막함을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고인께서 인생을 통하여 뜨거운 모교사랑과 장학이념으로 일구어 내신, 전통과 비전의 명문 송설학원을 두고 떠나신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게 아려오고 눈물이 솟구칩니다. 저를 비롯한 송설교육재단과 송설학원의 모든 구성원과 송설 동문들은 깊고도 아득한 추모의 정을 되새기게 됩니다.
돌이켜 볼 때, 고 김세영 이사장님의 헌신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송설학원의 존재는 생각할 수조차 없을 것입니다. 일제의 수탈과 6.25 전쟁을 겪으면서, 학교는 폐허가 되고, 재정은 피폐하여 송설학원 자체가 위기를 맞은 시기에, 고인께서는 선뜻 재단이사장직을 맡아 50년이란 긴 세월 자신의 사재를 털어가면서 김천중고등학교를 명문 사학으로 발돋움하게 하는 대들보 역할을 하였습니다.
고인의 헌신과 노력으로 교주 최송설당 여사의 건학 이념이 제대로 맥을 잇게 되었습니다. 특히 고인이 생전에 일구어 놓으신 서산 농장 개척 사업은 최근 김천고등학교가 경북유일의 자율형 사립고로 선정되어 글로벌 인재양성이란 시대적 소명을 향하여 자랑스럽게 새 출발할 수 있도록 든든한 뒷받침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특히 이사장님께서는 온 나라가 가난하던 1960년 ‘세심장학회’를 설립하시고 향토 출신 인재들을 국가적 인재로 기르는 일에 정성을 쏟으셨습니다. 서울에 세심장학사를 건립하여 서울대학교를 비롯하여 명문대학에서 공부하는 김천 지역 인재들에게 등록금은 물론 숙식까지 제공하면서 오로지 학업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커다란 배려를 해 주셨습니다. 세심학사 출신 인재들에게 고 김세영 이사장님은 바로 하늘같이 높고 크신 어버이 같은 분이시기도 합니다.
그 장학의 공덕으로 우수한 엘리트들이 오늘날 정치, 경제, 학술, 문화, 과학 등 우리 사회의 곳곳을 밝히고 있습니다. 참으로 누구도 따르기 어려운 값진 일을 하셨습니다.
또한 김세영 이사장님께서는 산업 개척자로서도 선구자의 면모를 보여 주셨습니다. 일찍이 에너지 개발의 중요성을 간과하시고, 석탄 산업의 개발을 위하여 개척자다운 소명으로 열정을 불태우셨습니다. 새로운 탄맥을 발굴하기 위하여 탐험가와도 같은 집념으로 태백산맥의 능선과 계곡을 누비시며 온각 고생과 고주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발굴한 석탄을 국내 여러 산업에 공급함으로써 소위 ‘한강의 기적’이라 일컫는 경제성장에 숨은 원동력을 제공하셨습니다. 이제 그 경륜과 포부를 누구에게서 배워야 하겠습니까.
고인께서는 한국 정치의 일선에 몸담고 있는 동안 권력에 굴하지 않는 강한 소신을 보여 주셨습니다. 호연한 기상을 지니고 있기도 하셨지만, 외정활동을 하는 동안 어떤 억압에도 감연히 맞서고 어떤 회유에도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국회의원직에 조금도 연연함이 없이 3선 개헌 반대정치투쟁에 먼저 몸을 던지셨고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야당을 바로 세워야 한다는 신조에 따라 많은 기업들이 외면하던 야당에 정치자금을 공공연히 지원하는 일화를 남기셨습니다. 이익에 민첩하고 기회에 영합하는 세상 정치 풍속으로부터 멀리 떨어지는 것이 곧 옳은 길이었음을 보여주심으로써 우리 모두에게 큰 귀감이 되었습니다.
이사장님께서는 인간적 면모에 있어서도 가히 대인의 기품을 보여 주신 분입니다. 말을 아끼시고 행동의 신실함을 먼저 보이시는 분이셨습니다. 무엇보다도 감명을 주는 것은 고인께서는 공을 내세우지 않으셨습니다. 누군가 고인의 공덕을 거론하면 서둘러 그 입을 막으려 하셨습니다. 참으로 소탈하고 진중하셨습니다. 겉으로는 무뚝뚝하셔도 안으로는 깊은 사랑과 정을 나누어 주셨던 대목들을 떠올리면서 그 천양 같은 무게감에 다시 옷깃을 여밉니다.
고 김세영 이사장님! 저희들은 이사장님의 헌신과 노고 그리고 업적을 뜨거운 마음으로 기립니다. 이제 이사장님께서 평생을 사랑으로 가꾸어 오신 송설학원은 웅비의 날개로 힘차게 비상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도전에 임할 때는 이사장님의 정신과 가치를 되돌아보고 교훈을 찾겠습니다. 하늘에서라도 송설학원의 중흥과 발전을 지켜보아 주시기를 빕니다. 이제 이 세상에서의 짐과 수고를 모두 내려놓으시고 부디 부디 극락왕생하소서.
2010년 8월 13일
학교법인 송설당교육재단
이사장 정해창

추도사(追悼辭)
사학의 명문 송설당교육재단 제 2의 창설자이시고 4만 동문의 큰 별이신 고 김세영 이사장님의 영전에 송설동창회를 대표하여 삼가 심심한 애도의 뜻을 올립니다.
재단이사장직을 물려주신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홀연 이승을 하직하시니 우리 동문들로서는 앞이 캄캄하고 애통한 마음 더욱 가눌 길이 없습니다.
회고하건데 이사장님께서는 살아생전 학교법인 송설당교육재단의 교주이신 최송설당 여사의 유지를 너무도 잘 그리고 참으로 훌륭히 계승하신 대표적인 후예이십니다.
생전의 이사장님께서는 모교를 설립하신 최송설당 여사의 업적과 배견될 수 있는 훌륭한 업적을 우리 후배에게 남겨 주셨습니다.
고인께서 제 4대 이사장으로 취임하실 당시 모교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거액의 사재를 흔쾌히 기부하여 모교를 재건하신 것은 교주와 조금도 다를 바 없습니다.
재단이사장 재임 50년 동안 학교를 위해 상상을 넘는 거액을 기부한 일과 세심장학사를 설립하고 우수인재를 위한 눈물겨운 후원은 교주의 유지를 계승하는 데 참으로 크나큰 역할을 하신 것입니다.
또한 이사장님께서는 서산에 40만평의 농장을 손수 일구시어 학교재단의 튼튼한 재원으로 삼으신 일은 송설의 만대를 기약하신 역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데 결과적으로 고 김세영 이사장님께서는 모교를 위해 참으로 놀랍고 위대한 일을 하신 송설인의 상징적인 인물이 되셨습니다.
남아있는 우리 4만 동문들은 이사장님의 고귀한 업적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며 앞으로 제 2의 제 3의 이사장님 같은 인물이 될 수 있도록 더더욱 갈고 닦으며 정진하겠습니다.
이제 이사장님께서는 이승의 모든 시름을 거두시고 부디 극락왕생하시길 전 송설동문들은 두 손 모아 빌면서 추도사에 대신합니다.

2010년 8월 13일
송설총동창회
회장 송석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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