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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일반 종합

기획특집-휴가철 김천의 가볼만한곳

권숙월 기자 입력 2013.07.25 09:21 수정 2013.07.25 09:21

최고의 피서지 ‘수도계곡’ ‘공자동계곡’

관내 초중고등학교가 방학에 들어가면서 바야흐로 휴가철이 다가왔다. 때 이른 더위가 닥치는가 싶더니 장마라고는 하지만 비없는 장마가 몇 주째 계속되는 무더위가 김천을 덮쳤다.
7월 마지막 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될 휴가철을 앞두고 더위를 피해 전국 각처의 유명피서지로 집을 나설 테고 옛말에 “집 나서면 고생”이라하지만 요즘 같은 불경기에 수십만 원씩 들여 고생하느니 이제 눈을 안으로 돌려 김천에서 알뜰피서를 즐겨보자.
김천에도 알려지지 않은 숨겨진 피서지가 적지 않게 있다. 심신을 시원하게 식혀질 김천지역 피서지를 소개한다. 계곡 주변에 산재한 유서 깊은 문화재와 전설의 고향을 둘러볼 수 있는 것은 김천이 주는 보너스라 하겠다. <편집자 주>

↑↑ 수도계곡
ⓒ i김천신문


□ 증산 수도계곡
수도산에서 발원해서 증산면을 관류해 성주군으로 이어지는 수도계곡은 지역 최고의 경승지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마다 여름 휴가철이 되면 김천을 비롯한 대구, 구미, 성주, 등 도내 각처에서 피서객들이 몰려든다.
계곡은 형형색색의 인파로 가득 차 그야말로 물 반, 사람 반이다.
김천최고의 오지에 속하는 증산면은 때묻지 않은 태고적 비경을 감추고 있는 자연의 보물창고다.
정구선생을 매료시킨 수도계곡
그 경치가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영남예학을 정립한 조선 중기의 명문장가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선생이 평촌리 수도계곡 옆에 무흘재라는 공부방을 짓고 말년을 살았겠는가?
또 수도계곡의 절경지 아홉 곳을 찾아 무흘구곡(武屹九曲)이라 이름하고 시를 남겼는데 이것은 중국 송나라의 주희가 노래한 무이구곡(無二九曲)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라 전한다.

↑↑ 무흘구곡
ⓒ i김천신문


무흘구곡(武屹九曲) 5곡-9곡

오곡 사인암(五曲 捨印巖)
오곡청담기허심(五曲靑潭幾許深)
다섯구비 맑은 못은 그 깊이가 얼마인가
담변송죽자성림(潭邊松竹自成林)
못가의 솔과 대나무는 저절로 숲을 이루었다.
복건인좌고당상(巾人座高堂上)
복건 쓴 사람은 단위에 높이 앉아
강설인심여도심(講說人心與道心)
인심과 더불어 도심을 강론하네

육곡 옥류동(六曲玉流洞)
육곡모자침단만(六曲茅茨枕短灣)
여섯구비 초가집이 물굽이를 베고 누워
세분차격기웅관(世紛遮隔機重關
세상의 근심걱정 몇 겹으로 막았네
고인일거금하처(高人一去今何處)
고고한 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는가
풍월공여만고한(風月空餘萬古閑)
바람과 달만 남아 더없이 한가롭다.

칠곡 만월담(七曲滿月潭)
칠곡층만요석탄(七曲層巒遼石灘)
일곱구비 산 겹겹 돌 여울을 둘렀는데
풍광우시미증간(風光又是未曾看)
이런 절경은 예전에 본적이 없네
산령호사경면학(山靈好事驚眠鶴)
산신령의 장난에 학이 놀라 깨어나니
솔로무단낙면한(松露無端落面寒)
솔잎에 맺힌 이슬 얼굴에 떨어져 차갑 구나
팔곡 와룡암(八曲 臥龍巖)
팔곡피금안익개(八曲披襟眼益開)
여덟구비 마음을 여니 눈앞이 활짝 열리고
천류여거부여회(川流如去復如廻)
흐르는 냇물은 다시 돌아 나오고
연운화조혼성취(煙雲花鳥渾成趣)
구름꽃과 새에 홀연히 빠져
불관유인래불래(不管遊人來不來)
오는 이 있고 없고 관여할 바 아니라네

구곡 용추(九曲 龍湫)
구곡회두갱위연(九曲回頭更?然)
아홉구비 고개 돌려 지난 일을 생각하니
아심비위호산천(我心非爲好山川)
내 마음 산천이 좋아 이러함이 아니로다.
원두자유난언묘(源頭自有難言妙)
오묘한 진리를 어이 말로 다하리오
사차하수문별천(捨此何須問別天)
이곳을 버려두고 어디 가서 물어야 하나

현재 무흘구곡은 1곡으로부터 4곡까지는 성주군, 5곡으로부터 9곡까지는 김천시로 나눠져 있으나 구비마다 안내판이 세워져 있어 찾기는 쉽다.
수도계곡에서 피서를 즐기다가 잠시 시간을 내어 9곡까지 옛날 선비로 돌아간 듯 시구(詩句)를 외며 한번 돌아보는 재미도 쏠쏠할 듯하다.

↑↑ 청암계곡
ⓒ i김천신문


인현왕후의 애환이 서린 청암사
수도계곡을 찾은 피서객이라면 지척에 있는 고찰로 인현왕후가 머물렀다하여 유명세를 떨친 청암사를 한번 쯤 돌아보면 좋다.
수도계곡을 품고 있는 수도산입구에 자리한 청암사는 1951년 소실된 쌍계사의 산내암자로 신라 헌안왕 3년인 859년에 창건된 고찰이다.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의 탄생을 3년 전에 예언했다 해서 고려왕실로부터 극진한 예우를 받았던 도선국사에 의해 창건됐다.
도선국사는 당나라에 유학을 갔다가 중국의 풍수지리를 배워 신라의 국운을 다시 일으키는 비보사찰로서 전국의 명당 2천800곳을 골라 절을 짓고자 했던 인물로 청암사가 그 중 한곳이다.
청암사는 창건 이래 큰 화재가 네 번 발생했는데 현재의 전각들은 1911년 마지막 화재이후에 새로 중건된 모습이다.
일제시대부터 불교강원으로 명성을 얻었고 1987년 비구니승가대학이 설립된 이후 현재도 100여명의 비구니 스님들이 공부하고 있는 도량이다.
청암사(靑岩寺)라고 하는 절 이름은 계곡의 바위에 푸른 이끼가 끼어 푸른 바위란 뜻으로 붙여진 이름으로 실제 푸른 이끼가 낀 바위들은 무수히 볼 수 있다.
일주문을 지나면 샘이 하나 있는데 그 유명한 우비천(牛鼻泉)이다. 풍수지리로 볼 때 청암사 일대의 지형이 소가 누워있는 와우형(臥牛形)이라 이 샘이 소의 코에 해당되어 소는 건강할 때 콧잔등에 땀이 물기가 맺히는 이치와 같이 사찰이 번성할 때는 우비천의 물이 많이 나왔다고한다.
그런데 절에 불이 나거나 우환이 있을 때는 먼저 샘물이 말랐다고 하는데 근년에 천왕문 옆으로 다리를 새로 낸 이후 갑자기 샘물이 마르는 일이 있었는데 이것은 새로 낸 길이 소의 목에 해당하기 때문에 목을 차와 사람들이 밟고 다녀서 소가 병이 들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돌기도 했다.
인현왕후와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인현왕후는 조선 제19대 숙종의 계비로 장희빈의 음모로 1689년 궁궐에서 쫓겨났다가 복위하기까지 3년간 청암사 극락전에 기거하며 보광전에서 복위를 기원하는 기도를 올린 것으로 전해진다.

↑↑ 옥류정
ⓒ i김천신문


당시 서인과 남인이 극렬하게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있던 시기에 두 여인은 당쟁의 희생양이라고 볼 수 있다.
인현왕후는 아버지가 서인인 여흥민씨 민유중이고 어머니는 서인의 거두 은진송씨 송준길의 딸인 반면 장희빈은 당대 최고의 부호였던 남인 장현의 일가였기 때문에 두 여인은 공존할 수 없는 태생적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인현왕후가 머물렀던 극락전은 전통사찰 건축양식과 많이 다른 점을 볼 수 있는데 왕실 생활에 익숙한 인현왕후를 위해 왕실건축양식으로 건립해 극진히 예우하는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사극의 단골소재로 등장하는 장희빈과 인현왕후의 애증과 한이 서릿발처럼 서늘했던 탓에 수도계곡의 물이 더 차가운지도 모를 일이다.

□ 구성 공자동계곡
대항면 주례리 화실마을로부터 구성면 상좌원리 감천본류까지 연결되는 공자동계곡 또한 여름이면 인파로 북적이는 김천의 또 다른 피서지로 유명하다.
수도계곡이 타 지역에까지 널리 알려져 외지인들이 많은 반면 공자동계곡은 아담한 규모의 계곡인지라 아직까지는 외지인보다도 지역사람들이 주로 찾고 있다.
직지사의 산내암자인 삼성암이 있는 천덕산에서 발원해 여러 자연부락을 거치면서도 오염되지 않은 맑고 깨끗한 물과 골골이 숨어있는 기암괴석은 매년 여름 한철 어김없이 피서객을 불러 모으고 있다.
또한 ‘공자동(孔子洞)’이라는 지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인근에 유교와 관련된 의미심장한 문화재와 전설이 산재해 피서와 함께 김천유교의 흐름을 파악해볼 수도 있는 장소이다.
공자동계곡의 지명에 담긴 김천선비들의 삶
계곡주변으로 크고 작은 마을들이 점점이 박혔는데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 공자와 인연이 닿아있는 이름들이다.

↑↑ 용추폭포
ⓒ i김천신문


공자동(孔子洞), ‘창평(昌平), 대성리(大聖里), 백어(伯魚), 주공(周公), 문도동(聞道洞), 명덕(明德), 지리대(知理臺)가 그것이다.
지금은 번듯한 신작로가 나서 내왕이 편리하지만 십수 년 전 까지만 해도 첩첩산중 오지였을 이 골짜기가 수백 년 전 시끄러운 세상을 피해 학문의 길을 쫓아 은둔을 택한 김천사람들의 심성이 담겨있는 곳이다. 김천시 대항면 대성리로 속하는 공자동은 방하재를 뒤로 두고 마을 앞을 흐르는 하원천이 한눈에 조망되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명당터에 자리 잡고 있다.
1670년 경주이씨, 김해김씨, 밀양박씨 세 선비가 세상을 멀리하고 학문에만 전념하기로 의기투합하고 인적이 드물고 조용하며 경치가 아름다운 곳을 물색하던 중 이곳에 이르러 감탄해마지않으며 정착해 마을을 이룬 것으로 전한다.
선비들은 유학의 종주인 공자를 흠모해 마을이름을 공자동이라 했는데 전국 어느 곳에도 이같이 직역한 사례는 없는 것으로 알려진다.
또 마을 앞 하천변 넓은 바위에 선비들이 모여 시를 짓고 회합을 하곤 했는데 안연대(顔淵臺)라 불렀다.
안연은 공자의 가장 촉망받던 제자인 안회(顔回)인데 공자 다음가는 성인으로 숭상되는 인물이다. 공자동마을에서 방하재고개 방면으로는 역시 대성리로 속하는 또 다른 마을인 창평마을이 있다.
1750년 강릉유씨 한 선비가 정착한 이래 대대로 강릉유씨 집성촌을 형성해왔다. 창평은 공자의 고향인 중국 산동성 곡부의 옛 지명인데 얼마나 공자를 흠모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공자동 마을 위쪽으로는 주례리(周禮里)로 속하는 주공(周公)마을이 있는데 주례는 유교규범의 근본인 종법이 모범적으로 시행된 주나라의 예법을 따라 살겠다는 의미이고 주공은 원래 주공(周孔)이었었다고 알려진다.
계곡 아래쪽으로는 구성면 상거리로 속하는 지리대와 백어, 명덕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지리대(知理臺)는 김녕김씨 집성촌으로 단종복위를 도모하다 순절한 백촌 김문기(金文起)의 증손인 김숙연이 상주 관노로 있다가 목사의 배려로 피신하여 정착한 마을이다.
지리대라는 지명속에는 두 임금은 섬길수 없다는 추상같은 선비의 신념을 표본으로 삼아 세상의 이치와 도리에 합당하게 살겠다는 후손들의 의지를 담았다고 할 것이다. 또 달리 저익촌(沮溺村)으로도 불리는데 이는 논어에 나오는 장저(長沮)와 걸익(桀溺)의 일화에서 따온 말이다.
장저와 걸익은 밭을 갈고 있다가 제자인 자로를 시켜 길을 묻는 공자에게 자신의 뜻을 펴겠다는 핑계로 세상을 피해다니는 행태를 실랄하게 꾸짖었다는 인물로 평생을 은둔하며 몸소 예를 실천했다고 전해진다. 역시 유학자적 삶을 살겠다는 의미가 담겼다고 할것이다.
호초당산 아래에 자리 잡은 백어는 공자의 아들 이(鯉)의 자(字)인 백어(伯魚)에서 따온 것이다.
그 아래의 명덕(明德)마을에 이르러 마침내 성현을 두루 본받아 큰 덕으로서 세상을 밝히고자하는 염원을 담았다. 명덕마을에서 하원천을 따라 조금 내려오다 보면 구성면 상좌원리로 속하는 도동(道洞)이 있다. 원래 문도동(文道洞)이었던 것이 축약된 것으로 인근의 원터, 상좌원과 함께 대표적인 연안이씨 집성촌이다.
도동은 논어에 나오는 ‘朝文道夕死可易’ 즉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공자의 가르침에서 따온 것이라 하니 이보다 절묘하게 유학자적 의지가 지명에 고스란히 투영되어있는 사례는 전국적으로도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공자동 계곡에 가면 철저한 유학자적 삶을 살고자 했던 옛 김천인들의 높은 도덕적 신념을 읽을 수 있다.

김천판 사랑과 영혼 방초정(芳草亭)
중장년층이라면 명배우로 수년전 유명을 달리한 페트릭 스웨이즈와 데미무어가 주연해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헐리우드 영화 ‘사랑과 영혼’을 기억할 것이다.
불의의 사고로 사랑하는 연인을 잃고 방황하는 연인을 잊지못하고 저승에서조차 지켜주기 위해 애Tm는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가슴 찡한 러브스토리로 당시 젊은이들의 가슴을 흔들었다.
이런 감동적인 사랑이야기가 김천에도 있다. 공자동계곡이 숨을 고르고 감천과 합류하는 지점인 상원리 원터마을 입구에 있는 방초정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방초정은 오래전 경북 관광을 소개하는 책자의 표지모델로 쓸 정도로 그 경관이 수려한 경북을 대표하는 정자로 알려졌는데 외형 못지않게 그 정자가 지어지기까지의 숨겨진 사연이 더 아름답다.
방초정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6호로 연안이씨 집성촌인 원터마을 입구에 있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다락 형태의 정자이다.
연안이씨(延安李氏)집성촌으로 김천을 대표하는 반촌인 원터마을은 지금도 주민의 대부분이 연안이씨일정도로 예나 지금이나 전형적인 집성촌의 면모를 유지하고 있다. 이 마을 출신 선비로 호를 방초정(芳草亭)이라 했던 이정복(李廷馥.1575-1637)이 1625년(인조3년)에 자신의 호(號)를 따 건립한 정자가 방초정이다.
1689년 훼손된 것을 이정복의 손자 이해(李垓)가 중건하고 1727년에 다시 보수했으나 1736년의 큰 홍수로 유실된 것을 1788년 후손 이의조(李宜朝)가 수해로부터 안전하도록 지금의 위치로 옮겨 중수했다.
방초정의 건립과 관련해서 아름다운 사랑이야기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인 1591년 이정복이 양천동 하로마을 화순최씨 부인에게 장가를 들었다.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죽더라도 시댁에 가서 죽겠다며 신행길을 나섰다가 시댁마을에 들이닥친 왜병을 만났다.
능욕을 당할 지경에 이르자 정절을 지키기 위해 마을 앞 웅덩이에 투신, 자살을 택했다.
이때 부인을 따라온 하녀 석이(石伊)도 부인을 구하려 연못에 뛰어들었다가 함께 죽었다.
어린 신부를 졸지에 잃은 이정복은 부인을 그리워하며 여러해 동안 웅덩이를 떠나지 못하고 울기만 했다.
후사를 이어야한다는 집안 어른들의 뜻에 따라 재혼을 하게 된 이정복은 부인이 투신한 웅덩이를 확장해 ‘최씨부인의 연못’이라는 뜻의 최씨담(崔氏潭)이라 이름지었다.
또 그 옆에 자신의 호(號)를 딴 방초정을 지어 이승에서 이루지 못한 부부의 인연을 영원토록 함께하기를 기원했다.
비록 몸은 떠나지만 절개를 지키기 위해 먼저 간 어린 부인에 대한 사랑의 증표로서 방초정과 최씨담을 함께 세운것이다.
이 같은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고 지역 유림에서 조정에 상소를 올리니1632년 인조임금은 어필정려문을 내렸고 부인의 정려각이 방초정 옆에 세워졌다.
1975년 최씨담 연못 준설 공사 도중에 작은 비석이 발견되어 또 한번 세상을 놀라게 했다.
‘충노속이지비(忠奴石伊之碑)’
상전이었던 화순최씨 부인을 구하기 위해 웅덩이에 뛰어들었던 종 석이의 비석이었던 것이다.
이로써 전설처럼 떠돌던 노비에 대한 비석의 존재가 사실로 밝혀진 것이다. 석이의 비석은 동민들에 의해 380년의 세월을 넘어 다시 주인인 부인의 정려각 앞에 세워졌다.
주인을 구하려다 목숨을 잃은 한 노비의 충성심에 감복한 연안이씨문중에서 비석을 제작했으나 반상(班常)의 신분이 엄격했던 당시의 사정상 차마 노상에 세우지는 못하고 연못에 던져주었던 것이다.
방초정은 세워진지 3백여 년에 달한다는 정자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당당한 기품을 자랑한다.
2층 다락의 사면에 문을 달아 이를 걷어 올리면 넓은 마루가 되고 내려 닫으면 방이 되는 실용적인 구조로 설계되었다. 아궁이를 따로 설치하여 불을 떼면 겨울에도 능히 사용이 가능하도록 하는 등 우리 조상들의 실용적인 지혜가 물씬 묻어난다.
정자 앞 연못인 최씨담의 중앙에는 섬을 두개 배치했고 가장자리에 땅버들나무와 백일홍을 심어 절경을 이루고 있다. 이같은 정원형태는 조선시대 사대부 집성촌의 정자와 연못 조경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그 독창적인 건축양식은 김천지방의 대표적인 정자인 만취정, 모성정, 무송정, 쌍호정 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방초정에는 유명한 문장가들이 찾아와 시와 글씨를 남겼는데 특히 방초정에서 바라다보이는 각 방면의 절경을 노래한 방초정십경(芳草亭 十景)이 유명하다.
권숙월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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