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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묘지기행

김천묘지기행(16)

권숙월 기자 입력 2013.09.12 09:19 수정 2013.09.12 09:19

김해송씨 김천입향조 송길정

ⓒ i김천신문


김천출신이거나 연고가 있는 역사인물의 묘지를 찾아 풍수지리와 전설, 인물의 일대기를 조명해 보기 위해 지난 2009년부터 2010년 초까지 본지에 연재했던 김천묘지기행’을 이번호부터 다시 연재하게 됐다. <편집자 주>
 
ⓒ i김천신문


조마면사무소가 소재한 강곡리 구곡마을에서 강바대마을 방향으로 가다가 오른편 구성면 방면으로 접어들면 조마면과 구성면을 경계 짓는 말미기고개가 나온다.
고갯마루에서 왼편으로 산길을 따라 100여미터 남짓 올라 연만산(年萬山) 중턱에 이르면 김해송씨 김천입향조로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송길정(宋吉貞)과 경상우도병마절도사를 지낸 송희명(宋熙明)의 묘소가 있다.

조손(祖孫)간에 위아래로 자리 잡은 이 묘터는 연만산을 주산(主山)으로 하고 도롱골을 좌청룡, 외양골을 우백호로, 맞은편 불두산을 안산(案山)으로 삼았는데 연만산으로부터 뻗어 내린 좌우의 지맥이 강곡천에까지 이어져 풍수지리에서 기본으로 삼는 배산임수(背山臨水)와 좌청룡(左靑龍),우백호(右白虎)의 명당 조건을 손색없이 갖추고 있다.

주인공인 송길정은 고려 충숙왕 때 대사헌을 지내고 김해군(金海君)으로 봉해진 문정공(文貞公) 송천봉(宋天逢)의 5세손으로 1401년(태종 1) 성주군 월항면에서 태어났다. 1426년(세종8) 문과에 급제한 이래 병조참의와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했다.

평소 풍수지리에 조예가 있었던 공(公)은 김천지방을 순시하던 중 지금의 구성면 광명리 도지미고개에 이르러 송수봉(頌壽峯)과 연만산 중간에 감천이 들판을 휘감아 흐르는 반월형의 지세를 눈여겨보게 된다. 경상도관찰사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난 후 구성면 광명리 하촌(下村)으로 낙향해 마을이름을 기동(耆洞)이라 하고 이곳에 정착했다.

정부인 철원최씨와의 사이에 절충장군으로 동래부사와 검지중추부사를 지낸 송중문(宋仲文)과 목사를 지낸 송인문(宋仁文) 형제를 두었다.
아래로는 입향조의 손자인 송희명(宋熙明)과 정부인 성산이씨의 묘가 연이어 있다. 송희명은 무과에 급제한 후 성종 때 경상우도절도사를 역임했다.
김천의 김해송씨 문중은 송길중이 하촌에 입향한 후 8명의 당상관을 배출하며 명문가로 자리를 잡았는데 고관을 지내다 낙향한 김해송씨 문중 인사들을 만나기 위해 전국에서 유력인사들이 마을을 찾다보니 말을 메어 놓는 마당이 마을 앞에 있어 이곳을 마점(馬店)이라 불렀고 지금도 지명으로 남아있다.

송희명의 묘터는 원래 연만산의 다른 자리였는데 현재의 위치에 자리잡게 된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공이 작고하자 문중에서는 전국의 내로라하는 유명한 지관을 초빙해 자손이 번창하는 명당터를 물색해 바로 하관할 수 있도록 준비를 마쳤다. 다음날 발인을 하여 준비해 둔 장지에 이르러 하관을 하려고 보니 묘혈(墓穴)에 물이 가득 차 있더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대경실색하여 묘터를 잘못 잡은 것이라 하며 지관에 대한 원성이 대단했다. 하는 수 없이 지금의 자리인 입향조 아래로 다시 묘터를 잡아 모시었다.

훗날 송희명의 따님은 남편 이계공(李繼恭)이 사망하자 방치되어있는 친정아버지의 원래 묏자리를 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연유로 김해송씨 문중 선산인 연만산에 구성 상좌원의 연안이씨 가문의 사위 묘소가 들어서게 되었는데 이후 연안이씨 문중에서는 자손이 번창하고 과거급제자가 무수히 배출된 반면 정작 김해송씨 문중에서는 독자가 속출하는 등 자손이 귀해졌다는 것이다.

뒷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송희명의 따님이 천하의 명당을 차지할 요량으로 밤새도록 물동이를 이고 감천물을 퍼 날라 물을 채웠던 것이라고 한다. 후손발복에 대한 할머니의 열정에 힘입어 크게 번성한 연안이씨 문중에서는 해마다 묘사를 지내고나면 돼지다리 하나를 김해송씨 문중에 보내었는데 해방이후부터는 이러한 전통이 끊어졌다는 것이다.

<글/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송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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