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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문화·음악 예술

연재 6- 내 고향 김천을 노래하다

권숙월 기자 입력 2013.09.20 21:44 수정 2013.09.20 09:44

이승하(중앙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 석가여래 좌상
ⓒ i김천신문
  슬픈 미소 

  고향에 내려왔다 처처에 빈집들
  밭이 된 논들과 황무지가 된 밭들
  푸근하지도 넉넉하지도 않은 땅 한켠
  남면 갈항사지 오봉동 석조 석가여래 좌상은
  아직도 미소를 띠고 있으나 누가 아직도
  미소 띤 얼굴로 들녘에 서 있는가 

  들녘 곳곳에, 도로변에, 마을 안길에
  벌렁 드러누워 있는 폐농기계들 시커멓게
  땅과 함께 썩어 내 고향을 천천히 썩게 할 뿐
  산간 고지에, 밭두둑에, 마을 곳곳에
  무수히 흩어져 있는 폐비닐과 빈 농약병들
  끝끝내 땅과 함께 썩지 않아
  내 고향을 죽이고 있을 뿐 

  폐가가 늘고 있는데
  폐교하는 학교가 늘고 있는데
  해마다 시민이 줄고 있다는데
  떠나가는 농촌에서 돌아오는 농촌으로 만들겠다는
  신농정계획을 가만히 귀기울여 듣고 있는
  남면 갈항사지 오봉동 석조 석가여래 좌상은
  그래서 슬픈 미소를 띠고 있는가 

↑↑ 이승하 교수
ⓒ i김천신문
 <시작 메모> 
 오봉동 석조 석가여래 좌상은 보물 245호로 김천시 남면 오봉리에 있다. 통일신라시대인 경덕왕 15년(758년)에 만들어졌다. 좌상은 갈항사(葛項寺) 터에 있는데 높이 1.22m로 군데군데 파손이 심한 상태이다. 손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좌선할 때의 오른손을 풀어서 오른쪽 무릎에 얹고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는 손 모양으로, 이는 석가모니가 수행을 방해하는 모든 악마를 항복시키고 성취한 정각을, 지신이 증명하였음을 상징함)이지만 오른손목과 손등뿐이며 왼손도 약간 깨어졌고 오른쪽 무릎도 파손이 심한 편이다.
  그렇지만 통일신라시대 때에 만들어진 불상으로 이만한 모양을 갖추고 있는 것도 흔치 않다. 둥글고 푸근한 얼굴, 신비스러운 미소, 풍만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 등 8세기에 유행한 불상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법의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를 감싼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얇으며 간략화했는데 굴곡이 선명한 신체에 밀착된 부드러운 옷 주름선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광배(光背)는 없어졌으며 불상의 뒷면에 광배 꽂이 구멍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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