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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문화·음악 예술

연재 12 - 내 고향 김천을 노래하다

권숙월 기자 입력 2013.11.06 06:39 수정 2013.11.06 06:39

이승하(중앙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 1935년 당시 자신의 동상 제막식에 참석한 최송설당 여사가 축하하러 온 고하 송진우(뒷줄 왼쪽), 몽양 여운형 선생과 자리를 함께했다.
ⓒ i김천신문
 최송설당 할머니의 말씀

역적은 3족을 멸하던 시대
역적에게 항복한 이도 멸문지화를 당하던 시대
살아남은 자의 후예는 고개 들지 못하고
하늘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살아야 한다
이것이 내 운명이라면 운명을 벗자
이것이 내 팔자라면 팔자를 뿌리치자

국운이 날로 쇠하여 갈 때 
내 뜻은 돈을 버는 데 두기로 했다네
낮에는 농사일, 밤에는 삯바느질
장사에 나서기도 했다네
돈 없는 설움만큼 큰 설움은 없기에
사람들은 말한다 저이 남편은 탐관오리라고
저 많은 돈을 다 어찌하려냐고

나라 빼앗겨 들판에 곡성 가득하던 시절
김천 교동 주민 구휼에 벼 50석 희사했고
경성부인회에 거금 기부하여
일본 적십자사 특별회원이 되었지
김천공립보통학교에 거액 기부해 총독 표창 받았고
금릉유치원과 금릉학원에도 유지비 기부했지
전국 큰 사찰 30곳에 불기와 불등 봉헌하기도 했고

일본에 아부해야 재산 지킬 수 있었지만
내 뜻은 재산 불리는 데 있지 않았다
사람 사귀는 데 타고난 재주
서울에 와 사업수완 발휘하던 중에
영친왕의 보모가 되었지 
귀비에 봉해진 뒤에 고종으로부터 받은
내 이름 송설당(松雪堂), 눈 속의 소나무

사육신 성삼문이 말했었지 소나무는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한다고
그런 절개로 그런 기개로
내가 지닌 이 돈, 좋은 데 쓰고 죽자고
다 비우고 가자고 그래, 먼 미래를 위해
학교를 세우자고, 인재를 기르자고
나라를 푸르게 할 동량을 키우자고

<시작 메모>
ⓒ i김천신문
 김천 출신의 육영사업가 최송설당(1855∼1939)은 김천사람들이 존경하는 분이다. 그이는 외가 쪽이 홍경래의 난에 연루되어 증조부와 조부가 억울하게 죽은 것을 알고 어려서부터 가문의 명예회복을 위해 그분들의 누명을 벗게 하리라 맹세하였다. 1886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후에 남편과도 사별하자 서울에 올라갔다. 권문세가의 부인들과 교제하던 중 입궐하게 되어 영친왕의 보모가 되었고, 귀비(貴妃)에 봉해지면서 고종으로부터 송설당(松雪堂)이라는 호를 하사받았다. 남편에게 물려받은 돈, 궁에서 받은 전별금에 자수성가로 모은 돈을 합쳐 전 재산이 30만 2,1000원이었다. 1931년, 이 돈을 몽땅 희사하여 재단법인 송설학원을 설립하였다. 김천고등보통학교는 오늘날의 김천중, 고등학교로 발전하였다. 시문에 능하여 200여수의 한시와 60여수의 국문시가를 남기고 있으며, 저서로 ‘최송설당문집’ 3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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