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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묘지기행

김천묘지기행<23>

권숙월 기자 입력 2013.11.06 21:07 수정 2013.11.06 09:07

장암 안동권씨 권응시, 권응성의 묘

ⓒ i김천신문
  조마면 장암리는 안동권씨 집성촌으로 세종 때 좌의정을 지낸 문경공(文景公) 권진(權軫)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왔다.
 상장암 샘골에는 문경공의 6세손으로 관직을 버리고 평생을 후학양성에 매진한 권응시(權應時)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순국한 권응성(權應聖)의 묘가 있다. 두 분의 묘는 안동권씨 재실인 경원당(景遠堂) 뒤로 나란히 자리를 잡았는데 마을 뒷산인 배산(盃山)을 주산으로 하여 장수바위로 이어지는 마당골을 좌청룡으로, 새암골과 배암골을 우백호로 삼았다.
 또 감천을 넘어 조마면의 진산인 불두산(佛頭山)을 안산으로 했는데 후손의 재물을 좌우한다는 우백호의 지세가 목마른 말이 물을 마신다는 갈마음수(渴馬飮水)의 형국인지라 예사롭지 않다.
 권응시는 통덕랑 권상(權鏛)과 창녕성씨 부인 사이에 1541년(중종36년) 조마 장암에서 태어나 호를 송학(松鶴)이라 했다. 1578년 효행과 학행으로 천거되어 성혼(成渾), 김장생(金長生)과 함께 관직에 나아가 감역(監役)과 군위현감, 양구현감을 지내다 당쟁으로 나라가 시끄러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낙향했다. 장암에 송학헌(松鶴軒)을 세우고 여생을 후학양성과 시문을 지으며 살았는데 “산새 날으니 물새도 날고 바위꽃 드리워져 개울꽃과 어울려 피네. 찾는 객은 없는데 푸른 바람이 꿈결에 스치네”라는 시에서 자연과 벗하며 살아가는 선비의 기개가 느껴진다. 남인의 영수로 우의정을 지낸 허목(許穆)은 “평생을 지조를 지키며 남과 다른 삶을 살았다”라고 공을 평했다.
 1587년 47세를 일기로 졸하자 도승지 홍봉상(洪鳳祥)이 묘갈명을 찬했고 ‘명현록’에 이름이 올랐다.

ⓒ i김천신문
 김천지역 의병사의 첫 순국자로 기록된 권응성은 만호(萬戶)벼슬을 지낸 권흠(權欽)의 아들로 장암에서 태어났다. 무반의 후손답게 일찍이 병서를 즐겨 읽으며 “대장부로 태어나 나라가 위태로울 때 백성을 편안하게 하지 못한다면 죽어도 이름 없는 귀신이 되겠다”라고 호언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동생에게 “충과 효는 한가지인데 나는 나라를 지키고 너는 가문을 보존하라”고 당부하고 출전했다. 전답을 처분하여 군자금을 모으고 인근 동리의 청년 30여명을 모집, 의병장이 되어 왜적에 대항했다. 김천이 왜적의 수중에 들어가자 의병장 김면(金眄), 여대로(呂大老)와 함께 지례전투에 참전했으며 구성 송죽리 석현(돌고개)전투에서 화살이 떨어지자 돌을 던지며 적진으로 뛰어들다 장렬히 전사했다. 의병으로서 첫 순국자가 된 공에게 나라에서 1593년 첨정(僉正)벼슬을 추증하고 충절록(忠節錄)에 행적을 기록하게 했다.
 지례현감을 지낸 의병장 여대로는 묘갈명에서 “의리에 살아 충절을 이루었으며 떳떳한 이름을 만대에 밝혔다”라고 했다.


<글/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송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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