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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묘지기행

김천묘지기행(25)

권숙월 기자 입력 2013.11.18 17:01 수정 2013.11.18 05:01

서산정씨 김천입향조 정윤홍(鄭允弘)의 묘

ⓒ i김천신문
   봉산면 인의리 배암골에는 서산정씨 김천입향조로 백귀선(白貴旋), 김효신(金孝信)과 더불어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김천으로 낙향해 김산삼절(金山三絶)로 불린 부성부원군(富城府院君) 정윤홍(鄭允弘)과 숙부인 강양이씨의 합분 묘가 있다.
 공의 묘소는 문암산을 주산으로 멀리 황악산을 안산으로 하고 문암산에서 흘러내린 작은 뱀골을 좌청룡, 큰 뱀골을 우백호로 삼았다.
 이 터는 뱀골이라는 지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뱀의 기운이 서린 사혈(蛇穴)로 알려졌는데 바로 앞에는 개구리와 비슷한 형태의 야산이 있어 뱀의 먹이가 놓여있는 형국이니 가히 명당이라 할만하다.
 그러나 이 자리는 2011년 이장해 새로 조성한 터로 원래의 묏자리는 맞은편 극락산자락 분통골이었다. 

 속칭 분통골 전설로 불리는 묘터에 얽힌 유명한 이야기가 전한다.
 정윤홍에게는 사인(斯仁), 사의(斯義), 사예(斯禮), 사지(斯智), 사신(斯信) 등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 임종에 이르러 유언하기를 “내 시신을 넣은 관(棺)은 반드시 10개의 빈 관을 앞에 묻은 뒤에 마지막에 묻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명당으로 이름이 난 분통골에 묘터를 잡은 후 부친의 유언을 따라 빈관을 차례로 묻어나가던 중 인부들이 “관 한 개쯤 덜 묻으면 어떠랴”하고 9개만 묻고 시신이 든 관을 10번째 묻고 봉분을 만들고 말았다. 

 세월이 흘러 다섯 아들은 모두 과거에 급제하며 출세가도를 달리자 주위에서 분통골 명당에 부친의 묘를 들여 후손이 발복한 것이라고들 했고 서산정씨 문중은 일약 지역을 대표하는 명문가로 성장했다. 

 그러던 중 이를 시기한 한 권력가가 서산정씨문중에서 역모에 가담한 정황이 있다고 고변하여 결국 그 화가 부친의 묘소에까지 미쳐 부관참시(剖棺斬屍)의 명이 내려졌다. 나라에서 군사를 보내어 파묘(破墓)를 하는데 9개의 관을 열었으나 하나같이 시신이 없는 빈 관만 나오니 허묘라고 판단하고 철수하기로 했다. 순간 한 군사가 이왕 9개를 열었으니 한 개만 더 열어 10개를 채우고 가자고 하는 바람에 마지막 관을 열었더니 관속에서 하얀 학이 나와 남쪽으로 날라 갔다는 것이다. 

 이후 후손들이 부친의 유언대로 11개의 관을 다 묻었더라면 명당이 온전히 보존되어 문중이 더욱 번성했을 것인데 참으로 안타깝고 분통이 터진다 하여 이 골짜기를 분통골이라 했다는 것이 전설의 요지이다. 

 정윤홍은 중국 송나라의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있다가 원나라가 건국되면서 고려로 망명한 정신보(鄭臣保)와 그의 아들 정인경(鄭仁卿)의 후손으로 정인경은 고려에서 상장군으로 공을 세워 서산군(瑞山君)에 봉해져 서산정씨의 시조가 되었다. 시조로부터 5세손인 정윤홍은 상서(尙書)와 판장작감사(判將作監事) 벼슬을 지낸 정숙(鄭璹)과 고성이씨부인 사이에 차남으로 고려 공민왕 때 태어났다. 일찍이 학문이 출중하여 군기부정(軍器副正)을 역임하고 부성부원군(副城府院君)에 봉해졌는데 다섯 아들 중 장남 사인(斯仁)이 예안현감, 사의(斯義)가 교수, 사예(斯禮)가 군수, 사신(斯信)이 이조판서를 역임했고 광해군 때 영의정을 지낸 정인홍(鄭仁弘)이 5대손이다. 

 또한 정윤홍의 차녀(次女)가 조심(曺深)에게 출가한 인연으로 창녕조씨가 처향인 김천에 정착하게 되어 봉계로 통칭되는 봉산면이 김천을 대표하는 반촌으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되었다. 봉산면의 중심인 봉계의 지명이 인의리, 예지리, 신리 즉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으로 정해진 연유가 정윤홍의 다섯 아들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설도 있을 만큼 정윤홍이 끼친 영향은 자못 크다 할 것이다. 

                                                         <글/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송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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