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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묘지기행

김천묘지기행(26)

권숙월 기자 입력 2013.11.26 17:41 수정 2013.11.26 05:41

창녕조씨 김천입향조 조심(曺深)의 묘

 
ⓒ i김천신문
  봉산면 예지리로 속하는 외입석마을 방목산에는 창녕조씨 김천입향조인 병조참의 조심(曺深)과 서산정씨부인의 묘가 있다.
 이 터는 극락산을 주산(主山)으로 하고 멀리 황악산을 안산(案山)으로, 샘골과 큰골을 각각 좌청룡(左靑龍)과 우백호(右白虎)로 삼아 예부터 현침혈(縣枕穴)의 명당으로 꼽혀왔다. 이 자리는 원래 조심의 장인인 서산정씨 김천입향조 부성부원군 정윤홍(鄭允弘)의 묏자리로 잡아놓은 터로서 묘 옆에 있는 옹달샘과 관련한 흥미로운 일화가 전해진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정윤홍이 졸(卒)한 후 당대 최고의 지관을 불러 후손이 번창할 명당터로 잡아놓았는데 출상일에 상여가 묘역에 당도해보니 전날 파놓은 묘광(墓壙)에 물이 가득 찼더라는 것이다. 상주들이 크게 놀라 즉석에서 논의하기를 “아무리 명당이라고는 하나 물이 솟는 땅은 불길하니 다시 지관을 불러 살피게 하자”고 하여 다시 잡은 곳이 산 너머 분통골이다.

 훗날 정윤홍의 차녀(次女)로 조심의 아내인 서산정씨부인이 남편이 졸하자 친정에 부탁하여 방치되어있던 방목산 친정아버지의 묏자리를 자신에게 달라고 간청하여 사위인 조심의 묘소가 들어서게 된 것이다.
 밝혀진 바에 따르면 정씨부인이 친정아버지의 묘터가 후손이 크게 발복할 대명당터라는 이야기를 지관으로부터 전해 듣고는 시댁인 창녕조씨 문중의 번성을 위해 밤새 묘 옆 샘골 옹달샘에서 물동이로 물을 퍼 날라 묘광에 물을 채워두었던 것이다. 

 명당의 기운을 받은 덕분인지는 모르겠으나 조심이 처향(妻鄕)인 봉계에 입향한 이래 창녕조씨문중에서 현인달사(賢人達士)와 고관대작을 무수히 배출하며 김천을 대표하는 명문가로 발돋움하기에 이르렀다. 훗날 친정아버지의 묏자리에 남편의 묘를 들인 정씨부인에 대해 세상 사람들은 “출가한 여인의 몸으로서 이미 명문가로 자리매김한 친정보다는 갓 뿌리를 내리려는 시댁의 번성을 염원하는 마음에서 두려움을 떨치고 밤새 물을 날랐으니 오히려 가상하다”고들 칭송했다.
 또한 명당에 입향조의 묘소를 들인 덕분으로 번성하게 된 창녕조씨문중에서도 그 고마움을 잊지 않고 해마다 영일정씨 입향조의 묘제에 참석했다하니 이 또한 아름다운 일이라 할 것이다. 

 조심은 고려 말 요동정벌군의 좌군도통사로 출전했다가 회군한 조민수(曺敏修) 장군의 동생인 밀직부사 조경수(曺敬修)의 아들로 1385년(우왕11년) 개경에서 태어났다. 훗날 이성계와의 대립으로 집안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할 때 조카인 조심도 연좌되어 위해가 예상되자 처향인 김천 봉계로 낙향했던 것이다. 공은 문음(門蔭/조상의 덕으로 내려지는 벼슬)으로 관직에 나아가 무관직인 산원(散員)을 지내다 1414년(태종14년) 30세를 일기로 졸했다. 

 서산정씨부인과의 사이에 아들 둘을 낳았는데 장남 조승중(曺承重)은 선무랑(宣務郞), 차남 조계문(曺繼門)은 울진현령을 지냈으며 1493년 병조참의로 추증되었다. 
 조계문의 아들로 조심의 손자가 되는 조위(曺偉)는 성종 때 도승지와 호조참판, 성균관대사성을 지낸 대문장가로 이름을 떨쳤다. 또 영남사림의 종주로 추앙받는 점필재 김종직이 조심의 손녀사위가 되는 등 성종조에 이르러 창녕조씨문중이 지역을 대표하는 명문가로 발돋움하게 된다.


                                 <글/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송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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