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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숙월 기자 입력 2015.01.28 16:52 수정 2015.01.28 04:52

우리 고장 어제와 오늘<2> 농소면(農所面) 편

김천자두의 발상지로 지역 과수농업을 선도하는 고장
박정희 대통령, 전국 최초 경지정리지구 용시마을 방문

ⓒ i김천신문

농소면은 동쪽으로 남면, 남쪽으로 성주군 초전면·벽진면과 경계를 이루고 서쪽으로 감천면, 북쪽으로 지좌동과 경계를 이루는 전형적인 농촌지역이다.
면의 남쪽으로 백마산과 고당산, 별미령 등 금오지맥으로 이어지는 험준한 산악이 둘러싸고 있으며 이들 산에서 발원한 율곡천과 연명천이 면의 중앙을 관류하면서 일찍이 벼농사와 과수농업이 발달했다.
‘농사를 짓는 곳’이라는 뜻을 가진 농소(農所)라는 지명도 타 지역에 비해 전답이 많고 농업이 앞선 까닭과 무관하지 않다.
농소면이 삼한시대에는 감문국의 영역에 들었으며 고려시대까지 개령군, 조선시대에 들어 개령현에 속했다.
그러나 연명리 일대는 나라에서 필요한 공물을 생산하는 연명향(延命鄕)이라는 행정구역에 속해 지역적으로는 개령현 관할이었음에도 김산군수가 관할하는 독특한 마을 형태를 유지했다.
조선시대에는 개령현 관할의 신곡, 조곡, 봉현, 둔동, 노산, 호동, 응곡, 농소, 신촌, 지동, 율곡, 대방 등 14개 마을을 농소면으로 면소재지를 월곡리 용시마을에 두었다.
1906년에는 신라시대부터 연명향으로 속했던 본리(연명리), 조로(노곡), 송방, 입석 등 네 마을을 김산군 연명면으로 개편함과 동시에 개령현 농소면으로 통합됐고 이때 면소재지가 용시에서 밤실로 이전됐다.
    
□마을과 전설
    
신비로운 용바위 전설을 간직한 용암리
ⓒ i김천신문

용암리(龍岩里)는 국도 4호선을 따라 지좌동에서 대구방면으로 가다가 밤실에서 우회전해 들어가면 밤실과 봉곡 사이에 있는 마을이다. 조선시대에는 개령현 농소면 소마리(所麻里)라 했는데 1914년 인근의 대방리(大坊里)와 합해 용암동(龍岩洞)이라 고쳤고 1971년 소마(씰미)와 수페를 용암1동, 대방을 2동으로 분동했다.
이 마을은 예로부터 김해김씨 판서공파 집성촌으로 내려왔는데 용암이라는 마을의 지명은 김용배(金龍培)라는 선비가 마을 뒤 웃골에 있는 바위위로 용이 치솟는 것을 보고 용바위(龍岩)라 했는데 이 바위이름을 따서 마을지명을 삼았다고 전한다.
용암1리는 예로부터 삼(麻)을 많이 재배하기로 유명했는데 이 때문에 삼과 관련된 지명이 자연부락 지명 곳곳에 등장한다.
조선시대의 마을지명인 소마(所麻)와 세마(洗麻)가 그것으로 삼을 재배하는 곳 또는 삼을 씻는다는 의미이며 세월이 흐르면서 음이 변해서 씻을마, 씰마, 씰미로 변해 정착됐다.
마을 옆 봉곡천변에는 수페라 불리는 작은 마을이 있는데 원래 숲만 울창한 곳이었으나 해방이후 민가가 들어서면서 마을이름을 숲이라 하다가 이 또한 변음이 돼 지금은 수페라 부른다.
마을입구 솟대배기에는 부락민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며 10년마다 세우는 새 형상의 솟대가 힘차게 서 있다. 옛날에는 솟대를 세울 때 무당을 데려다 3일씩 굿을 하며 마을잔치를 벌렸다고 하는데 근래에는 마을청년회에서 소나무를 베어다 조촐하게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솟대의 전통이 이어지고 있는 우리고장의 유일한 마을이었는데 규모는 축소됐지만 그 소박한 마음씨가 한없이 정겹다.
솟대로부터 우측으로 난 도로를 따라 한참을 더 들어가면 용암2리 대방 마을이 나온다.
씰미와 마찬가지로 김해김씨 판서공파 집성촌으로 옛날에는 제법 큰 마을이었다고 대방(大坊)이라 했다는데 이 마을은 특이하게도 마을이 생긴 이래 단 한 번도 40호(가구)를 넘긴 적이 없고 39가구까지만 유지한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경지면적이 좁은 상태에서 무작정 주민이 유입되면 삶이 곤궁해진다는 현실적인 문제와 함께 40호가 넘을 경우 사자수(四字數)가 돼 불길하다 해서 의도적으로 40호가 되는 것을 막았던 것으로 보인다.
    
못골뚝배기의 고향 월곡리
ⓒ i김천신문

월곡리(月谷里)는 밤실, 용시, 남곡, 못골 등 크게 4개 부락으로 이뤄진 마을이다. 조선시대까지는 개령현 농소면 율곡동으로 속했으나 1914년에 밤실과 용시, 남곡, 못골을 합해 월곡동이라 고치고 1971년에 4개 동으로 다시 나눴다.
월곡1리인 밤실은 국도4호선 변에 위치한 농소면 소재지로 172가구에 달하는 큰 마을이다.
밤실 또는 율곡(栗谷)이라는 마을의 지명의 유래와 관련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전해지는데 마을을 개척할 당시 마을뒷산인 소대산에 야생밤나무가 많아 밤실 또는 밤율(栗)자를 써서 율곡이라 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원래의 마을이 위치했던 윗밤실은 1936년 병자년 수해 때 율곡천의 범람으로 유실되고 지금의 마을위치인 아랫밤실로 집단이주하게 됐는데 이때 윗밤실에 살던 박희중(朴喜重)이란 분이 지금의 면사무소가 위치한 자리에 집을 짓고 살면서 마을이 새로 형성됐다. 작은 냇가를 넘어가 살았다고 월천동(越川洞)이라 했는데 점차 양 마을 사이에 집이 들어서면서 밤실로 한마을이 됐다.
마을 뒤의 소대산은 옛날 입석마을의 김해김씨 집안 암소가 사라져 수소문 하던 중 이 소가 산 정상에서 송아지를 낳았다고 길지로 이름이 났었다고 한다.
이 마을 앞으로부터 용시를 지나 신촌에 이르기까지 드넓은 들판이 펼쳐져있는데 1964년 전국에서 최초로 경지정리를 한 곳으로 준공식 때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하기도 했다.
밤실로부터 국도를 넘어 아포방면으로 따라가다 보면 삼태봉(三台峰)아래에 자리 잡은 월곡2리 용시마을이 나온다.
조선시대 개령현 농소면의 14개동을 관할하던 면사무소가 1906년 밤실로 이전되기 전까지 이 마을에 있었을 만치 농소면의 중심 부락이기도 했다.
이 마을은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참가해 공을 세운 경주이씨 정용(正用)이란 분이 1521년(인종7년) 이 마을로 낙향한 이래 대대로 경주이씨 집성촌을 이뤄왔다.
용시라고 하는 마을의 지명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예로부터 일대농경지가 비옥해 농사가 잘된다고 농소(農所)라 한 것이 음이 변해 용시가 됐다는 것인데 현재의 농소면이라고 하는 지명이 바로 여기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마을뒷산 삼태봉이 용(龍)의 형상이라 용이 머무는 곳 용소(龍所)라 했는데 역시 음이 변해 용시가 됐다는 것이 그것이다.
밤실과 마찬가지로 이 마을 앞들도 1964년의 경지정리 때 앞들 대부분이 혜택을 입었는데 주민들은 미군과 국군 공병장비들이 마을에 상주하며 공사를 펼치던 장관과 준공식 때 박정희 대통령과 악수한 손을 일주일간 씻지도 못했던 기억이 생생하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월곡4리 못골마을은 예로부터 큰 옹기점이 있어 유명했는데 생산된 옹기의 모양이 없어 못생긴 처녀를 일컬어 “못골뚝배기 닮았다”라는 속담이 생겨나기도 했다.
이밖에도 못골은 김천지방에서 최초로 자두재배가 시작된 마을로 알려지고 있다. 현 못골농원 이인배 대표의 선친이 일본에서 접목기술을 배워 해방과 동시에 이곳에 정착해 묘목상을 운영했는데 이때 대석이라는 신품종을 개발해 김천이 전국적인 자두산지로 발돋움하는데 기여했다.
못골농원은 김천에서도 손꼽히는 묘목생산농가로서 전국 각지에 우수 묘목을 판매해 과일의 수도로 일컬어지는 김천의 이미지를 선양하는데 일조하고 있다.
    
선돌마을이 있는 입석리
ⓒ i김천신문

입석리(立石里)는 애말리(八味), 선돌(立石), 새터, 건너마, 꿀배미 등 다섯 마을로 이뤄져 있다.
선돌로도 불리는 입석은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나라에서 필요로 하는 공물을 생산하던 마을이다. 개령현 구역에 있으면서도 김산군 관할의 연명향(延命鄕)에 속한 마을이었는데 1906년 인근의 연명, 노곡, 송방(수오동)과 함께 개령현 연명면으로 개편했다가 1914년 연명면이 농소면으로 통합됐다.
1936년 병자년 수해 때 인근 율곡천의 범람으로 입석일대가 침수되면서 마을이 대파됐고 이때 수침(水沈)으로부터 안전하도록 지대가 높은 앞산 양지쪽으로 대거 이주해 마을을 새로 형성하면서 이름을 새터라 했다.
새터와 인접한 건너마는 입석교회가 있는 마을로 큰마로 부터 건너편에 있는 마을이라고 붙여진 이름이다.
중심마을인 입석은 돌부처가 세워져있어 설립(立)자에 돌석(石)자를 써서 입석(立石)이라 하고 선돌로 불렀다고 한다.
실제로 마을회관 앞에는 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약사여래불이 있는데 원래 북천산 끝에 있으면서 밤실 마을쪽으로 향해 있었다고 한다.
이 불상의 방향과 관련해 밤실 등 이웃한 마을과 논란이 일자 일제시대에 마을회관 옆으로 옮겼고 십수 년 전 회관창고를 지으면서 다시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허리 이하 부분이 콘크리트에 가려져 원래의 크기와 하반신의 형태를 확인할 길이 없고 또 6.25전쟁 중 총격을 받아 두상이 심하게 훼손되기는 했으나 동민들의 각별한 관심 속에 잘 보존돼 오고 있다.
옛날에는 이 불상에  불공을 들이면 효험이 있다는 소문이 나면서 발길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고 한다.
규모 있는 불상이 마을에 모셔진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일대에 절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이 되는데 수소문을 해본 결과 입석마을 앞산인 솔징이 골짜기에 옛날에 절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절샘으로 불리는 샘터와 기와장이 출토되고 있다.
국도변의 달배이 마을은 팔미(八味) 또는 애말리 등으로 불리는데 마을 인근 들판에서 달팽이가 많이 나와 마을이름을 달팽이라 부르던 것이 음이 변해서 달배이가 됐다고 한다.
꿀배미는 선돌에서 새마뒷산을 넘어서 있는 마을로 애말리로부터 예전의 국도4호선을 따라 2km 남짓 떨어져 있다.
    
옛 연명면의 면소재지 연명리
ⓒ i김천신문

연명리(延命里)는 연명과 수오, 두 부락으로 이뤄져있다. 연명은 신라시대부터 조선말까지 수오, 입석, 노곡과 함께 개령현 지역에 위치하면서도 김산군에 속한 연명향(延命鄕)에 딸린 특수한 형태의 마을이었다.
1906년 연명면으로 개편되면서 이 마을은 본리(本里)라 해서 면소재지로 1914년 연명면이 농소면에 폐합될 때까지 면사무소가 이 마을에 있었다.
연명(延命, 延明)이라는 마을의 지명과 관련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이 마을의 지세를 풍수지리로 볼 때 배(船)의 형국이라 마을이 떠내려가는 것을 막아야 마을이 안전하다고 마을 뒤 백마산 골짜기에 밧줄을 매어야 목숨을 연명할 수 있다는 속설에 따라 목숨을 잇는다는 의미의 연명(延命)이라 했다는 설이 대표적이다.
실제로 밧줄을 매었다는 배밧골이라는 골짜기지명이 마을 뒤에 남아있어 신빙성을 더해주고 있다.
그러다 1914년 연명면이 농소면에 폐합되면서부터 연명의 명자가 목숨명(命)에서 밝을명(明)자로 바뀌어 나타나고 있다.
마을에 들어서면 입구에 예사롭지 않은 돌무덤과 거대한 장승이 이방인을 먼저 맞는데 그 규모가 대단하다.
이 마을의 장승제는 예로부터 유명했는데 10년마다 마을주민들이 인근 산의 소나무를 베어다가 유능한 목수를 구해 정성으로 지하여장군과 천하대장군을 깎아 세우고 무당을 불러 거창한 굿을 하며 두 장승이 마주보게 세웠다고 한다.
마을입구로부터 우측, 당산 끝자락을 따라 우측으로 돌면 연명으로 딸린 작은 마을 수오동이 나온다.
숫골, 숯골, 송방(松方), 수오(樹梧, 水梧)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이 마을의 지명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남자들이 많이 살아 숫골이라 했다하고 또 마을에 소나무가 많아 송방(松方), 숯을 굽었다고 숯골, 마을입구에 큰 오동나무가 있어 수오라 했다고도 한다. 여러 정황을 살펴 볼 때 마을 앞에 큰 오동나무가 있어 나무 수(樹)자에 오동나무 오(梧)자를 써서 수오(樹梧)라 했으며 나중에 물수(水)자 수오(水梧)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수오동은 풍수적으로 볼 때 가득 차면 비워야하는 소쿠리형이라는 이야기가 전하는데 10여 가구가 살던 마을의 주민들 대다수가 인근부락으로 떠나고 지금은 서너 집만이 남아 있을 따름이다.
    
은퇴한 관리들이 살던 마을 노곡리
노곡리(老谷里)는 활굿재를 사이로 성주군 초전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도 1906년까지 김산군 연명향에 속했던 마을로 과거 관직을 그만둔 연로한 노인들이 이 마을로 들어와 노년을 평온 하게 보내며 살았다 해서 노리실(老夷室), 노곡(老谷)이라 했다고도 하고 또 험준한 백마산과 비백산 일대에 노루가 많아 노루실 또는 노루장(獐)자를 써서 장곡(獐谷)이라 했다고 전한다.
이 마을은 조선 영조 때 김해김씨 김석휘(金碩彙)가 어모 도암에서 이주하고 정조대에 밀양박씨 박유춘(朴有春)이 조마면 나부리에서 이주한 이래 밀양박씨와 김해김씨가 집성촌을 이루며 살아왔다.
이 마을에서 성주로 넘어가는 고개는 활굿재라 불리는데 고개가 험준하고 예로부터 도적이 많아 고개를 넘고자하는 사람은 누구나 동쪽으로 세 번 절을 해야만 무사하다는 속설이 전해진다. 
    
김천의 시조(市鳥)가 사는 마을 봉곡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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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샙띠마을에는 매년 2월이면 김천의 시조인 왜가리가 집단으로 서식하며 장관을 이루고 있다.
    
봉곡리(鳳谷里)는 밤실로부터 용암을 지나 지방도를 따라 한참을 더 들어가다 보면 자리하고 있는 샙띠와 우봉골로 이뤄진 마을이다.
두 마을 중 샙띠는 조선시대까지 개령현 농소면에 속한 봉현리(鳳峴里)로 불리다가 1914년 봉현과 인근의 사실, 노산을 합해 봉곡동이라 했고 1960년대 초부터 인근 우봉골에 새로 마을이 형성되면서 1971년 샙띠마을이 우봉골과 함께 봉곡1리로 분동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샙띠라는 지명은 예로부터 마을 뒷산에 왜가리와 백로가 집단으로 날아와 산다 해서 새터 또는 봉황새 봉(鳳)자를 써서 봉현(鳳峴)이라 했는데 음이 변해 샙띠로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우봉골은 연명리 수오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아래의 작은 마을로 우봉골이라는 골짜기에 마을이 형성됐다고 골의 지명을 따서 우봉골이라 했다고 한다.
이 마을에도 예부터 10년마다 장승을 깎아 세우고 온 동민이 모여 장승제를 올리던 풍습이 있었는데 지금은 장승배기, 장승골이라는 지명으로만 남아있을 따름이다.
마을 뒤에는 조선말 이 마을에 살았던 이종화(李鍾華)의 처로 남편이 병사하자 자결을 선택한 열녀인 김해김씨의 열녀각이 섰는데 1847년 나라에서 정려가 내리고 1853년 정려문을 세워 후손의 부역이 면제됐다고 전해지는 마을의 자랑이다.
샙띠마을 위 백마산 별미령을 경계로 성주군 벽진면과 접하고 있는 봉곡2리는 사실과 노산 두 마을로 이뤄져있다.
샙띠와 마찬가지로 김해김씨가 집성을 이루고 있는 마을로 마을뒷산인 백마산에 소재한 고방사(高方寺)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고 사실(寺室), 사곡(寺谷)이라 했다고도 하고 마을에 새가 많아 새실 또는 새 조(鳥)자를 써서 조곡(鳥谷)이라 했다고도 한다.
또 노산마을은 뒷산에 갈대가 많아 갈대노(蘆)자를 써서 노산(蘆山)이라 했다고 전해진다.
백마산을 넘어 성주로 연결되는 험준한 고개인 별미령(別味嶺)은 예부터 성주에서 서울로 갈 때 거쳐야하는 고개로 백마산의 갈대밭을 헤치고 고개를 넘다가 숨을 돌리며 걸치는 막걸리 맛이 일품이라 해서 별미령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백마산에는 예로부터 묘를 들이지 않는 산으로 유명한데 산에 묘가 들어서면 가뭄이 든다는 속설 때문이다.
    
태봉산이 있는 신촌리
신촌리(新村里)는 무실삼거리에서 구미로 이어지는 지방도를 따라 가다보면 좌측으로 농소면 말단부로 돌출돼 덕곡동과 개령면, 남면과 접하고 있는 마을이다.
신촌은 조선시대까지 개령현 농소면 사곡(沙谷)으로 지금의 권동못(灌東池, 속칭 끼꿀못) 옆에 있던 마을이었는데 조선중엽 율곡천의 범람과 화적의 잦은 출몰로 마을을 폐동하고 태봉산 앞으로 집단이주를 해서 새로 마을을 형성하면서 신촌(新村)이라 했다.
현재 신촌, 봉촌, 싸리미등으로 불리는 지명은 사곡에서 이주할 때 본동인 신촌과 구별을 짓기 위해서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붙인 골목단위의 지명으로 결국 신촌, 봉곡, 싸리미는 서로 다른 부락이 아닌 사곡에서 이주한 한 부락으로 보는 것이 옳다.
마을 뒤에는 해발 100미터 남짓한 야산인 태봉산(胎封山)이 있는데 예로부터 조선시대 왕가의 태(胎)를 모신 명산으로 알려져 왔다.
김천지방에서 왕손의 태를 모신 태실이 소재한 태봉은 조선2대 정종대왕(定宗大王)의 태실이 있는 직지사 태봉과 17대 효종(孝宗)의 3녀인 숙명(淑明), 6녀인 숙경(淑敬) 두 공주의 태실지인 지례면 관덕리 태봉 등 두 곳이 확인됐다. 신촌 태봉산의 경우 일제강점기까지 아름드리 소나무가 울창했으며 정상부에 사각의 조형물과 비석이 있었고 예전부터 왕자의 태가 묻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왔다는 등의 증언을 통해 볼 때 태봉으로서의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
또 예로부터 신촌마을 일대 들판은 쌀이 많이 생산돼 쌀미들 또는 싸리미들이라 했는데 1970년대 초 마을중앙으로 고속도로가 나면서 일부가구가 분리되자 들 이름을 따서 싸리미라고 했다.
마을주민들에 따르면 수백 년 전부터 자손이 없이 전 재산을 마을에 희사하고 사망한 황씨와 하씨 두 노인을 위해 매년 제사를 지내고 있다.
    
□농소의 산
    
말의 형상을 한 백마산
ⓒ i김천신문

백마산(白馬山)은 농소면 봉곡리와 성주군 초전면 월곡리의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해발 715.5m이다.
백두대간에서 분기돼 가야산으로 이어지는 수도지맥이 수도산에서 다시 갈라져 염속산, 글씨산, 빌무산, 고당산, 별미령, 백마산을 거쳐 금오산으로 연결되는 금오지맥으로 속한다.
옛날에는 물이 귀한 산이라고 목마를갈(渴)자에 물수(水)자를 써서 갈수산(渴水山)이라 했는데 음이 변해 걸수산(乞水山)으로도 불렸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풍수지리로 볼 때 말의 형상이라 백마산(白馬山)이라 고쳤다고 한다.
신라 때 창건된 고방사(高方寺)와 신흥사(新興寺)를 품고 있으며 가뭄이 들면 산 정상에서 기우제를 지내왔고 예로부터 신성한 산이라고 무덤을 들이지 않았다.
농소면에서는 2014년 12월 이곳 백마산(해발 715.5m) 정상에 1.5m 높이의 화강암 자연석에 산 이름을 새긴 표지석을 설치했다.
    
▢농소의 문화유산
    
고방사
ⓒ i김천신문

고방사(高方寺)는 농소면 봉곡리 사실마을 뒤 백마산자락에 자리한 사찰로 직지사를 창건한 아도화상이 418년 창건했다.
창건당시에는 고방사(古芳寺)라 했는데 뒤에 고방사(高方寺)로 고쳤고 임진왜란 때 왜적의 방화로 법당을 제외한 모든 전각이 소실됐다고 전한다.
보광명전에는 1670년 조성된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목조관음보살좌상, 목조대세지보살좌상 등 삼존불이 봉안돼있는데 2004년 10월 14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67호로 지정됐다. 아미타불의 좌대에 새겨진 명문으로 인해 1670년 조성됐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며 17세기에 유행된 목조아미타삼존불상의 전형적인 양식을 반영하고 있다. 이 불상은 상주의 북장사, 예천 용문사의 아미타불과 함께 17세기 후반 경상도 북부 지방에서 조성된 아미타불상을 대표하는 귀중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1972년 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청동여래입상이 고방사 인근 산에서 발견돼 현재 경북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돼있다.
    
신흥사
ⓒ i김천신문

신흥사(新興寺)는 농소면 봉곡리 수오동 뒤에 자리한 사찰로 삼국통일 후 신라불교가 절정기에 달했던 834년 도의선사(道義禪師)에 의해 창건됐다. 창건 이후의 내력은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으나 1901년에 소실됐다가 1959년 중건됐다. 건물은 법당인 대웅전, 극락전, 삼성각, 요사가 있다.
대웅전에는 1987년 조성된 지장보살좌상과 철조비로자나불좌상, 옥석약사여래좌상, 관음보살좌상, 후불탱, 지장보살탱, 신중탱이 소장돼 있다. 극락전에는 아미타불좌상이 봉안돼있다. 삼성각에는 칠성탱, 산신탱, 독성탱이 봉안돼 있다. 대웅전 뒤에는 신도가 자연석에 새긴 미륵보살상이 있다.
    
3.김해김씨 정려각
ⓒ i김천신문

농소면 봉곡리 샙띠마을에 있는 김해김씨(金海金氏) 정려각은 경주이씨 이종화(李鍾華)의 처인 김해김씨부인의 열행을 기리기 위해 내린 열려각이다.
김해김씨부인은 시부모를 정성으로 봉양해 칭송이 끊이지 않았고 남편이 병이 들자 지극으로 간병하다 임종직전에 이르자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먹였다.
남편의 시신을 입관하는 날 가족들에게 말하기를 “사람의 목숨은 하늘이 정하는 것이니 어찌 사사로운 힘으로 용납할 수 있으리요. 내가 죽으면 남편과 함께 묻어주오”라고 유언한 후 자결했다.
부인의 열행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가 아들 이기연이 나라에 상소해 1847년(헌종13년) 정려가 내리고 일가친척의 부역이 면제됐다. 1853년 정려각과 정려비가 세워졌으며 2001년 개축됐다.
    
▢농소의 자랑
    
이화만리 녹색농촌 체험마을
ⓒ i김천신문

농소면 봉곡리 샙띠마을에 있다가 폐교된 봉곡초등학교를 주민들이 매입해 체험마을로 탈바꿈시킨 농소면의 대표적인 자랑거리이다.
2010년부터 숙박시설과 야외공연장, 다양한 체험공간을 확보, 전국에서 체험객이 몰려들기 시작해 2014년 한해만 해도 4천700명이 다녀가는 명소로 탈바꿈했다.
마을의 특산물인 자두와 복숭아, 사과 수확 체험과 김천의 시조(市鳥)인 왜가리 등 주변의 여건을 최대한 장점으로 활용해 인기를 끌고 있다.
2014년 농식품부와 한국농어촌공사가 공동주최한 농촌체험마을 10선에 선정됐고 2015년에는 인성학교로 지정, 운영될 예정이다.
    
▢농소의 특산물
    
전체 농가의 절반 이상이 자두농사
    
김천 자두 생산량이 전국 1위라면 그 중심에는 농소 자두가 있다. 김천 자두의 발상지인 농소면 관내에는 전체 농가(1,016호)의 절반이 넘는 566농가가 자두농사를 짓고 있으며 재배면적 261ha에서 연간 2천986톤을 생산해 73억 4천200만원의 수익을 올리고 있다.
자두농사를 짓는 농업인이 이처럼 많은 것은 토질이며 기후조건이 맞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이 적고 농사짓는 기간이 짧은데 비해 수익성이 높기 때문에 효자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또한 이곳 농소에는 자두 다음으로 포도가 많이 재배돼 지난 한 해 1천863톤을 생산, 46억1천600만원의 수익을 올린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전국에서 알아주는 농소메주
    
농소메주는 전국에서 알아준다. 입석․신촌․월곡․노곡․용암마을에서 50농가가 메주 만들기에 참여해 호당 농외소득이 3천506만원에 이른다. 이들 농가에서는 2014년 국내산 콩 40kg들이 1천115포대, 수입산 콩 50kg들이 2만1천840포대를 구입, 메주를 만들어 17억5천300만원의 순수익을 올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수입산 콩으로 만든 메주도 철저한 세척에 발효를 잘 시켜 만드는데다 국내산 콩으로 만든 메주에 비해 가격대가 낮기 때문에 소비자들이 선호하는 편이다. 
메주는 농한기라고 할 수 있는 12월~1월 2개월 정도면 끝나는데다 노인들도 할 수 있는 일이어서 메주를 만드는 농업인은 줄지 않는다.
    
□농소의 산업
    
대도중공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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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소면 용암리 21-1번지에 위치한 대도중공업(주)는 2011년 7월1일 설립된 철구조물 설계·제작, 설치하는 전문기업이다. 
현재 백계자 대표 외 32명의 종업원이 6천130㎡ 규모의 공장에서 기술과 경영혁신을 통해 2014년 한 해만 해도 매출액 200억원을 돌파한 기업이다.
대도중공업은 2013년 경상북도 신성장 10대 기업에 선정된바 있다. 경상북도 신성장 기업은 연간 매출액 10억원 이상, 최근 2년간 당기 순이익 발생, 10% 이상 성장한 기업 중에서 경북의 창조경제를 이끌어갈 기술 혁신으로 미래 성장 지향적인 도내 중소제조업체를 선정하는 것이다.
농소면 관내엔 현재 대도중공업을 비롯한 22개 기업체가 가동 중이며 350여명의 근로자들이 지역경제 발전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농소의 학교
    
농소초등학교
농소면 월곡리 밤실마을에 있는 유일한 학교로 1937년 7월 1일 농소국민학교로 개교했으며 1981년 1월 22일 농소국민학교 병설 유치원을 개원했다. 1996년 3월 1일 농소초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하고 농소초등학교 연명분교장을 흡수통합했다. 1999년 9월 1일 봉곡초등학교가 농소초등학교 봉곡분교장으로 격하되고 2008년 3월 1일 농소초등학교 봉곡분교장이 통폐합됐다. 농소초등학교는 제74회에 걸쳐 5천1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권숙월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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