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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로 이어지는 국도 4호선의 좌우로 나뭇잎과 비슷한 형태를 이루고 있는 남면(南面). 동쪽으로는 금오산을 기준으로 구미시와 칠곡군, 아포읍에 접하고 서쪽으로는 농소면, 남쪽으로 성주군 초전면, 북쪽으로는 구부린 손가락처럼 길게 뻗어 나와 감천(甘川)을 경계로 개령면과 마주하고 있다.
자연적으로 볼 때 면의 동쪽으로 금오산과 제석봉, 남서쪽으로는 영암산과 백마산 등 산악지대를 이루고 있으나 북쪽으로 가면서 율곡천과 연봉천, 월곡천을 따라 넓고 기름진 평야지가 전개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남면은 줄곧 개령현 관할로 속했는데 조선시대까지 옥산, 봉천, 오봉, 초곡, 운남, 용전이 개령현 적현면(赤峴面)으로 속하고 송곡, 운곡, 월명이 남면(南面)에 해당하는 2개면으로 나뉘어 있다가 1914년 적현면과 남면을 통합하여 남면으로 하고 1916년에 운남동 종상에 있던 적현면사무소를 옥산으로 이전했다.
또 불교와 교통의 중심지로서도 주목을 받았는데 지금은 폐사가 됐으나 통일신라시대 초기에 창건돼 국가적인 비호를 받으며 대가람으로 성장한 오봉리의 갈항사가 유명했고 고려시대 부상리에 역이 설치되면서 부상역이 교통의 요지가 되기도 했다. 용전과 우래마을 등 일부면적을 KTX역과 혁신도시가 들어선 율곡동에 떼어주어 면적은 줄어들었으나 배후지역으로서의 입지여건상 잠재적인 발전가능성은 월등히 높아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마을과 전설
남면의 중심마을 옥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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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산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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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산리(玉山里)는 국도 4호선으로부터 안쪽 송곡천을 지나 운남산 아래에 자리 잡은 남면소재지 마을로 조선시대까지는 개령현 적현면 옥산동이라 했다. 1914년 인근의 지산과 석정을 합하고 1916년 운남동 종상에 있던 면사무소가 옥산으로 이전된 후 1971년 옥산(玉山)이 1동, 지산(池山)이 2동으로 분동했다.
이 마을은 김해김씨 일가가 맨 처음 입향해 마을을 이룬 것으로 전해진다. 옥산이라는 지명은 조선시대 중엽까지 개령현에서 관할하며 죄인을 가뒀던 감옥(監獄)이 있음으로 해서 얻어진 지명으로 원래는 감옥 옥(獄)자를 써서 옥산(獄山)이라 했다. 조선시대 말 옥(獄)이 없어지면서 뜻이 좋지 않다는 여론에 따라 구슬 옥(玉)자로 바꾸어 옥산(玉山)으로 고쳤다.
옥산마을은 2010년 11월 KTX 역사가 준공되면서 새로운 교통중심지로 부상했다.
옥산2리 지산은 옥산으로부터 농남중학교를 지나 운남리 석정으로 가다가 좌측에 있는 마을로 조선시대까지 개령현 적현면 지산동이었는데 1914년 남면 옥산동으로 합해졌다가 1971년 지산을 다시 옥산2동으로 분동했다.
이 마을은 평택임씨(平澤林氏) 전적공파(典籍公派) 집성촌으로 판결사(判決事) 벼슬을 한 임흥주(林興籌)가 1500년대 말 경기도 여주에서 이 마을로 들어와 개척한 것으로 전해지며 지금도 지좌동 호동마을과 함께 우리고장 최대의 평택임씨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마을의 지명인 지산(池山)은 마을 앞에는 못(池)이 있고 마을 뒤에는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山)이 있다 해서 붙여진 지명으로 못과 산이란 뜻으로 못산이라고도 했는데 음이 변해 모산으로 불린다.
지산마을 앞까지 혁신도시 부지로 편입돼 마을 형세가 크게 변모했다.
운남산 정기받은 명당 운남리
농소면 신촌리에서 오봉리로 향하는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도로변에 자리 잡고 있는 큰 마을 종상골을 만날 수 있다.
이 마을은 조선시대까지 개령현 적현면으로 속해 종상동(從上洞)으로 불리어오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종상을 중심으로 석정동과 지산, 용전의 일부를 합하여 인근 운남산을 따서 운남동(雲南洞)이라 했고 1971년 종상(從上)과 석정(石井)을 운남1리와 2리로 분동했다.
이 마을은 조마면 강곡과 함께 우리고장의 대표적인 진주강씨 집성촌으로 전체 100호 남짓한 가구 중 진주강씨가 70호에 달한다.
종상이라는 마을의 지명도 진주강씨 입향조인 강정년(姜檉年)이 1560년(명종15년) 성주군 벽진면에서 이거해 살면서 꿈에 용전마을에서 용이 솟아 이 마을로 따라 올라왔다 해서 따를 종(從)자에 윗상(上)자를 써서 종상(從上)이라 했다고 한다. 마을앞산의 지명도 용의 승천을 위해 구름이 필요함에 따라 구름운(雲)자를 넣어 운남산(雲南山)이라 했다.
종상골로부터 옥산2리 지산으로 넘어가는 아릇고개 못 미쳐 자리 잡고 있는 운남2리 석정마을은 우리고장의 대표적인 수원백씨 충숙공파(忠肅公派) 집성촌으로 전체 50가구 중 43가구에 달한다.
특히 석정마을은 1914년 적현면과 남면이 통합될 때까지 현재의 마을회관 자리에 적현면사무소가 있던 면소재지이기도 했다.
석정이라는 지명은 마을을 개척할 당시에 돌로 된 우물이 마을중앙에 있어 돌석(石)자에 우물 정(井)자를 써서 석정(石井)이라 하고 우리말로 돌정지라고 불렀다.
종상과 석정마을 앞으로 혁신도시가 들어서면서 마을일대의 면모가 크게 변했다.
봉화산 아래 첫 마을 초곡리
@IMG13@남면의 최북단에 위치해 감천을 경계로 개령과 접하고 봉우산을 경계로 아포읍 대신리와 접하고 있는 초곡리(草谷里)는 세실(草室)과 서원(書院) 두 마을로 구성돼있다.
초곡리는 원래 조선시대에 개령현 적현면에 속했는데 1914년 인근의 서원마을과 합해 초곡동으로 남면에 편입되고 1971년 세실을 초곡1리로, 서원을 2리로 분동했다.
초곡, 세실이라는 마을의 지명은 마을을 개척할 당시 주변에 억새풀이 많아 풀초(草)자에 골곡(谷)자를 써서 초곡(草谷), 또는 초실(草室)이라 했는데 뒤에 음이 변해 샐이라고도 했다.
봉우산 뒷골 속칭 큰까끔으로 오르다보면 능선에 집채만한 바위가 솟아있는데 이 마을에서는 꽤나 유명한 왕바위로 이 마을 흥양이씨의 산소와 얽힌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진다.
옛날 이 마을 흥양이씨 가문에서 임금의 부마(사위)까지 배출하며 크게 번성했는데 마을뒷골에 있던 사찰과 스님들을 박대해 절이 폐사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어느 날 스님이 이 집에 찾아와 이르기를 집안이 더욱 번성하자면 부마산소로 불리는 조상산소로 부터 맞은편의 왕바위가 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게 되고 이를 그대로 믿은 집안에서 왕바위를 가리기 위해 흙을 쌓다가 여의치 않자 아예 석공을 불러 왕바위를 깨트리니 바위가 갈라지며 그 속에서 금빛새가 날아갔다고 한다.
이후 집안이 점차 쇠락해 홍양이씨가 마을을 떠났다는 것인데 실제로 바위에 구멍을 뚫었던 흔적과 바위가 칼로 잘린 듯 갈라져있고 금빛 새가 날랐다는 구멍도 볼 수 있다.
또 마을 앞 포도밭에는 자연석이면서도 장군의 위용이 느껴지는 높이 3미터의 장수바위가 우뚝 서 있는데 원래 마을 앞 덕산자락에 비슷한 규모의 바위가 있어 서로 마주보는 형상으로 전설에 장수가 겨드랑이에 두 바위를 끼고 가다 떨어뜨린 것이라 한다.
맞은편 바위는 경부고속도로가 나면서 사라지고 지금은 홀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초곡2리 서원마을은 초실을 지나 대신리 한골마을 앞에서 굴다리를 지나 서원고개를 넘으면 덕산자락을 배후로 감천을 바라보며 앉아있다.
21가구의 작은 마을로 덕림서원(德林書院)이 있음으로해서 서원(書院)이라는 동명을 얻었다.
봉황새가 날아올랐다는 길지 봉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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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연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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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봉저수지에서 아포읍 봉산리 작동마을로 이어지는 도로변의 연봉천과 비봉산 사이에 연봉(延鳳)마을이 있다.
연봉이라는 지명은 마을뒷산인 비봉산(飛鳳山)과 관련이 있는데 비봉산은 풍수지리로 볼 때 봉황이 알을 품고 있다가 날아가는 형국이어서 날비(飛)자에 봉황새 봉(鳳)자를 써서 비봉산이라 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마을에서는 날아간 봉황을 다시 마을로 불러들인다는 염원을 담아 맞을 연(延)자에 봉황새 봉(鳳)자를 따서 연봉(延鳳)이라 했다는 것이다.
또 마을 이름을 ‘설개이’라고도 하고 ‘설광(雪光)으로 적었는데 이는 고려 말 한양조씨 일가가 마을을 개척할 때 마을 앞 연봉천의 맑은 물이 마을을 비추면 눈처럼 희고 밝다고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뒤에 김해김씨 김은현(金垠鉉)이 숙종 때 지례 관덕에서 이거해 정착하고 성산여씨 여치복(呂致復)이 정조 때 구성 광명에서 이거해 정착한 이래 대대로 김해김씨와 성산여씨 집성촌을 이뤄왔다.
1914년 연봉과 통합됐다가 1971년 봉천2동으로 분동된 천동은 용전에서 서낭대이고개를 넘어 봉우산 아래에 터를 잡고 있다.
봉우산을 경계로 아포읍 대신리, 서낭대이 고개를 경계로 종상골과 인접하고 있는 천동은 우리고장에서도 대표적인 밀양박씨 집성촌이다.
천동이라는 지명은 계곡이 얕아 물이 귀한 봉우산자락에 마을이 위치하고 또 율곡천과 연봉천의 혜택도 입지 못한 관계로 물이 귀해 논다랭이마다 작은 웅덩이를 팠다는 것이다.
위대홍 장군의 혼과 충정이 서린 운곡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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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대홍 장군 비석과 관산재 |
ⓒ i김천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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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소재지인 옥산으로부터 국도4호선을 따라 대구방향으로 가다보면 도로변과 운곡천 좌우로 자리 잡은 둔골(登谷)과 운양(雲陽)마을을 만날 수 있다.
둔골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장흥위씨(長興魏氏) 부장공파(副將公派) 집성촌으로 전체 120가구 중 60가구에 달한다.
이 마을에 처음 장흥위씨가 들어온 것은 임진왜란 직후인 1598년(선조31년)으로 전란 시 이순신(李舜臣)장군의 부장으로 큰 활약을 펼쳤던 위대홍(魏大弘) 장군이 퇴임한 후 은거지를 찾기 위해 전국의 명당을 물색하던 중 마을 앞에 이르러 운남산의 지세가 용이 하늘로 승천하는 비룡상천형(飛龍上天形)임을 간파하고 후손의 번성을 바라며 정착했다고 한다.
등골에서 국도와 운곡천을 건너 맞은편 운남산 자락의 운양마을은 경주이씨와 나주임씨 일가들이 세거하는 총35가구의 작은 마을로 운남산 아래 양지쪽에 마을이 있다하여 구름 운(雲)자에 볕양(陽)자를 써서 운양(雲陽)으로 했다고 한다.
부상고개 길목에 자리 잡은 송곡리
운곡과 부상 사이의 국도변에 위치한 송곡리는 1914년 솔방(松坊), 살구점(杏店), 마곡(麻谷)을 합해 송방의 송(松)자와 마곡의 곡(谷)자를 따서 송곡동(松谷洞)이라 하고 1971년 솔방과 살구점을 송곡1리, 마곡을 2리로 분동했다.
마을의 이름을 솔방 또는 송방(松坊)이라 한 것은 옛날 마을 뒤에 송방사(松方寺)라는 절이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또 마을에 소나무가 많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살구점은 마을에 살구나무가 많아 살구점이라 했다고도 하는데 옛날 사기그릇을 구웠다 해서 사기점 또는 자기점이라고도 불렀다.
송곡2리 마곡마을은 솔방에서 부상고개를 따라 올라가다가 우측 골짜기에 위치한 전체 36가구의 작은 마을로 본동인 마곡과 도로변의 샘물터 두 마을로 구성돼 있다.
옛날 마을뒷산에 고려시대에 창건된 마곡사(麻谷寺)라는 절이 있어 마을이름을 마곡(麻谷)이라 했다고 하고 달리 진골이라고도 하는데 진골에 대한 연원은 알 길이 없고 마곡사는 폐사가 되고 절터만 남아있다.
조선시대 교통의 중심마을 부상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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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상터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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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고개마루에 위치한 부상(扶桑)과 모산골, 칠곡과의 경계에 있는 지경(地境) 세 마을로 구성된 부상리(扶桑里)는 예부터 교통의 요지로 성주에서 개령 양천역으로 연결되는 관로(官路)에 위치해 고려시대에 역(驛)이 설치됐던 역촌(驛村)으로 이름이 높았다.
역의 위치는 폐교된 부상초등학교 일대인데 말구리, 당말리 등 말과 관련된 지명이 마을 인근에 일부 남아있다.
부상이 갖는 교통 요지로서의 가치는 일제시대 경부선 철도가 원래 대신역, 아포역, 구미역 구간이 아니라 김천에서 부상역을 거쳐 약목역으로 가는 구간이었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 흔적은 부상고개를 관통하고 있는 길이 200미터의 금오산터널(金烏山隧道)로 남아있는데 김천방면으로 터널 앞에 제방이 축조돼 절반이상이 물에 잠겨있기는 하지만 100년의 세월을 무색하게 할만치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뒤에 부상고개 철로 구간이 지대가 높아 문제가 발생하자 일제는 비교적 평지인 아포, 구미방면으로 우회하면서 1916년 부상철로 시대는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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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운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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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마을 뒤 골짜기에는 직지사 말사인 백운사(白雲寺)가 있는데 부상역에 소한 역마(驛馬)의 안녕을 기원하는 안마제(安馬祭)를 올렸다고 전해진다.
성주와의 경계에 자리 잡은 월명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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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섶밭마을과 남북저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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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명리(月明里)는 섶밭(薪田), 운봉(雲峰), 상릉(上陵), 하릉(下陵) 등 네 마을로 이뤄져있다.
부상리를 지나 남북저수지 안쪽, 바위암산 아래에 위치한 섶밭은 성주군 초전면과 경계를 이루는 마을로 조선시대까지 개령현 남면에 속해 신전(薪田)이라 적고 섶밭이라 했는데 1914년 인근의 운봉, 동릉을 합해 월명동이라 고치고 1971년 섶밭을 월명1리로 분동했다.
이 마을은 임진왜란 때 김해김씨 김홍일(金洪一)이 칠곡에서 이주한 후 대대로 김해김씨 집성을 이뤄왔다.
섶밭이라는 마을이름은 옛날 마을에 나무를 태워 숯을 굽던 밭이 있었다 해서 숯밭이라 하고 한자로 땔나무 신(薪)자에 밭전(田)자를 써서 신전(薪田)이라 했는데 숯밭이 섶밭으로 변했다.
1954년 축조됐다는 마을 앞 저수지 땅은 남면에 있고 모아둔 물은 북삼에서 이용한다고 남북지(南北池)라 했다.
성주방면으로 가다보면 성주와의 경계를 이루는 신거리고개로 불리는 작은 고개가 나오는데 이 고개 아래의 미륵암(彌勒庵)에는 고려시대 초기에 조성된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20호 석조미륵불 입상이 있다.
전설에 따르면 옛날 한 도둑이 김천에서 소를 훔쳐 고개를 넘어가는데 밤새도록 걸어도 미륵불 주위만 맴돌고 있어 화가 나 도끼로 미륵불을 내리쳤는데 왼팔이 떨어지면서 도둑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절에서 죽은 도둑을 묻은 도둑묘라고 전해지는 봉분이 근년에까지 내려왔다고 한다.
섶밭에서 성주방면 지방도를 따라 가다가 고속도로 아래 굴다리를 통과해 골짜기를 따라 한참을 더 들어가면 내봉산 자락에 운봉이라 불리는 마을이 나타난다.
월명2리는 운봉, 상릉, 하릉 등 세 마을로 이루어졌는데 일대의 지대가 높아 항상 산에 구름이 걸려 있어 운봉(雲峰)이라 했다고 한다.
명산 금오산의 정기 머금은 오봉리
오봉리(梧鳳里)는 모래등(沙嶝), 봉곡(鳳谷), 오수(梧水), 원골(院谷), 갈손(葛孫), 갈항(葛項), 삼가(三家), 우장(牛場) 등 8개의 작은 마을로 이뤄져있다.
모래등 마을은 연봉천변의 모래언덕에 집을 지었다 해서 모래사(沙)자에 고개등(嶝)자를 써서 사등(沙嶝)이라 적고 모래등이라 했다고 하며 그 아래 봉곡마을은 마을 뒤 골짜기가 봉황의 형상을 닮았다 해서 봉황새 봉(鳳)자에 골곡(谷)자를 써서 봉곡(鳳谷)이라 했다고 한다.
봉곡 맞은편의 연봉천 너머 수리님고개 아래에 있는 오수마을은 나주나씨(羅州羅氏) 나기림(羅起林)이라는 선비가 임진왜란 때 피난을 왔다가 정착한 이래 대대로 나주나씨 집성촌을 이뤘는데 마을주변의 다섯 골짜기에서 물이 흐른다고 처음에 마을이름을 오수(五水)라 했는데 뒤에 다섯오(五)자가 오동나무오(梧)자로 바뀌어 사용되고 있다.
오봉저수지 옆에 위치한 원골마을은 옛날 오수와 갈손마을에 살던 나주나씨와 밀양박씨가 이주해서 형성된 마을이다. 성주에서 상주, 선산방면으로 연결되는 관로(官路)에 설치됐던 관용숙소인 여신원(與信院)이라는 원(院)이 마을에 있었기 때문에 원골(院谷)이라는 지명을 얻게 됐다.
갈항은 갈항사(葛項寺)라는 절이 있음으로 해서 얻은 지명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주변에 칡(葛)이 많았다는 사실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갈항사는 신라 32대 효소왕(孝昭王)때 승전대사(勝詮大師)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현재 절터의 보호각에는 보물 제245호인 석가여래좌상과 맞은편에 비로자나불이 남아있다.
갈항마을 아래에는 1930년대 형성된 씨집매라는 마을이 있는데 당시에 손씨, 백씨, 강씨 등 세 집만 살았다고 삼가(三家), 또는 세집마라 불렸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씨집매로 불린다.
씨집매 안쪽 금오산 아래에는 쇠바탱이, 쇠마당, 우장(牛場) 등으로 불리는 또 다른 마을이 있는데 옛날 금오산성을 보수하거나 군수품을 운반할 때 이 마을까지는 소로 운반하고 여기서부터 산성까지는 사람이 등짐으로 지고 나르면서 몰고 온 소는 이곳에 매어두고 갔다 해서 생긴 지명이다.
□남면의 산
금오산
김천시 남면 오봉리와 구미시 남통동의 경계에 있는 금오산(金烏山)은 높이 약 976.6m로 김천시 동부와 구미시 서부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이다. 금오산 정상부는 경사가 완만하고 기복이 낮은 U자형의 산줄기를 이루며 그 내부는 대체로 평탄하고 넓은 골짜기를 이루고 있는데 이러한 지형을 이용하여 U자형의 산줄기를 따라 산성을 쌓은 것이 금오산성이다. 금오산은 정상에서 서남향으로 800m 정도 내려오면 고위 평탄면의 분지 내에 성안마을이 형성돼 있다. 이곳을 중심으로 행정 구역상 그 위치가 크게 3등분돼 서쪽으로는 김천시에 속하며 남쪽으로는 칠곡군 북삼면, 그리고 동북 방향으로는 구미시에 속한다. 따라서 금오산의 정상부는 김천시의 행정 구역이 아닌 구미시 남통동 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금오산 정상 남쪽의 금오산성의 능선을 따라 김천시와 구미시의 경계가 접하고 있다.
금오산은 본래 대본산(大本山)이었으며 외국의 사신들이 중국의 오악(五岳) 가운데 하나인 숭산(崇山)에 비해 손색이 없다 해서 남숭산(南崇山)이라 불렸다가 아도화상에 의해 금오산으로 불리게 됐다. 산 능선은 ‘왕(王)’자 같기도 하며 가슴에 손을 얹고 누워 있는 사람의 모습과도 비슷하다.
산 대부분이 화강암으로 이뤄진 바위 봉우리가 나타나는 고도가 높고 경사가 급한 산지를 이루고 있는 금오산은 정상부와 주변 산줄기의 능선부에서는 암석이 노출된 전형적인 바위산을 이루고 있다.
운남산
남면 운남리·운곡리·오봉리에 걸쳐 있는 운남산(雲南山)은 절골산(330.4m)과 함께 남면 중앙부 산지를 이루는 산으로 운남리 석정마을과 운곡리 운양마을 배후에 자리 잡고 있다. 석정마을에서 동쪽으로 약 1.2㎞, 운양마을에서 북쪽으로 약 1.8㎞ 떨어져 있으며 높이는 376.8m이다.
남면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는 김천시와 구미시 경계에 있는 금오산(약 976m)이며 금오산에서 남서쪽으로 이어진 산줄기가 남면 부상리와 오봉리 사이의 갈항고개를 거쳐 북서쪽으로 뻗어 절골산을 지나 운남산까지 이어진다.
따라서 운남산과 절골산 부근의 하천은 전체적인 지형·지세에 따라 남동쪽에서 북서쪽으로 흐른다. 운남산과 절골산 남쪽은 금오산에서 이어진 갈항고개 남쪽 비탈면에서 발원한 송곡천(松谷川)이 북서 방향으로 흐른다. 옥산리에서 율곡천과 만나 감천으로 흘러들고 운남산과 절골산 북쪽에서는 갈항고개 북쪽 비탈면에서 발원한 연봉천이 북서 방향으로 흘러 아포읍을 지나 감천으로 흘러든다.
운남이라는 산 이름은 풍수지리적으로 용전리 용밭마을에서 솟아난 용이 이 산에 낀 구름을 타고 승천하는 형국이라 붙여졌다는 설이 전해진다.
□남면의 문화유산
숙청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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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청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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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면 운남리 종상골에 있는 강민첨(姜民瞻)(?~1021)을 기리기 위한 일제 강점기에 건립된 사당이다. 강민첨은 고려 목종(穆宗) 때 과거에 급제한 문신이며 이름난 장군이다. 1012년(현종 3년) 안찰사(按察使)(고려 때의 지방 장관)로서 영일(迎日) 등지에 쳐들어 온 동여진(東女眞)을 무찌르고 1018년(현종 9년)에는 강감찬(姜邯瓚)의 부장으로서 흥화진(興化鎭)에서 소배압(蕭排押)이 거느린 10만의 거란군을 무찌르는데 공을 세웠다.
1920년에 강민첨을 기리기 위해 숙청각(肅廳閣)을 건립하고 영정을 봉안했다. 위패를 봉안할 때 봉안문은 옥산(玉山) 장석영(張錫英)이 지었다.
3칸 규모의 산형대문(山形大門)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재실인 숭덕재(崇德齋)가 자리 잡고 있으며 강당 뒤에 내삼문과 사당인 숙청각이 단을 달리해서 별도의 공간을 이루며 자리 잡고 있다.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팔작 기와집이며 평면은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둔 중당협실형(中堂夾室型)이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맞배 기와집이다.
보존 상태는 비교적 양호한 편이며 진주 강씨(晉州姜氏)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음력 3월과 9월에 제사를 올리고 있다.
갈항사 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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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항사 터와 석가여래좌상 보호각 |
ⓒ i김천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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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항사(葛項寺)는 남면 오봉리에 있던 신라시대 화엄종 계열의 사찰로 692년(신라 효소왕 1년) 승전(勝詮)이라는 고승이 창건한 이래 왕실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금오산의 약사암을 암자로 거느린 대찰로 발전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
현재 갈항사 터에는 갈항사지 석조여래좌상 및 쌍탑(雙塔)을 옮긴 포석 2기가 있을 뿐 밭으로 변했으며 간혹 기와조각 등이 발견되고 있다.
갈항사 터에는 현재 갈항사 삼층석탑(국보 제99호)과 갈항사지 석조여래좌상(보물 제245호)이 있다. 특히 갈항사 삼층석탑은 동탑의 기단부 금석문이 외부에 알려져 탑 내 유물이 도난당했고 1918년 총독부에 의해 경복궁 내 총독부 박물관으로 옮겨졌으며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소장돼 있다. 금석문에 이 탑이 신라 경덕왕 때인 758년 신라 38대 원성왕의 어머니와 이모, 외삼촌 등 3인의 발원으로 건립됐다고 기록돼있다.
미륵암 석조미륵불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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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조미륵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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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면 월명리 미륵암(彌勒庵)에 있는 고려 전기 불상인 미륵암 석조미륵불 입상은 1997년 조사 당시 하반부가 매몰된 상태였으나 1999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됐다. 2002년 4월 15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20호로 지정됐다.
1997년 조사 당시 미륵암의 불전 내부 시멘트 바닥에 하반부가 매몰된 채로 보관돼 있었다. 돌로 만든 둥근 보관을 쓰고 있으며 보관까지의 높이는 177㎝이다. 현재 복원된 불상은 원 위치에서 후방으로 약 2m 정도 이동됐고 하반부 확인 당시 불상의 연화문 좌대는 지하 2m 지점에서 발견돼 세척 후 현상과 같이 복원됐다.
미륵암 석조미륵불입상은 신라 양식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과도기적 양식을 띠고 있다. 팔 부위와 하반부를 보수했으나 석불의 규모나 형태, 완전한 보관이나 연화 대좌는 원상을 지니고 있어 당시의 석불 양식을 파악할 수 있다.
□남면의 자랑
오봉저수지
@IMG11@남면 오봉리에 있는 오봉저수지는 농업용수 공급을 목적으로 한 농업용 저수지로 1979년 1월 1일 착공, 10년만인 1989년 1월 1일 준공했다.
총 공사비는 89억 원이 소요됐고 58억 원은 국고 보조를 통해 충당됐다. 구미, 대구, 김천 방면으로 통하는 교통이 편리한 곳에 위치해 관광객이 연간 1만 명 이상 찾아오고 있는 1종 저수지로 2000년 9월 수상 스키 연습장으로 허가를 받아 전국 각지의 수상 스키 동호인들이 많이 찾고 있다.
오봉저수지가 드림밸리 오색테마파크로 거듭나는 것도 특기할만한 일이다. 100억원(국비 50%, 도비 10%, 시비 40%)의 사업비를 들여 내년 준공을 목표로 조성하게 되는 오색테마파크는 ‘만날누리-오봉을 만나고 즐기고 누린다’가 컨셉. 생태관광시설 조성으로 김천시 브랜드를 향상시키기기 위한 것. 다목적 공간 조성으로 볼거리, 즐길거리, 이야깃거리를 제공해 관광객 유입 등 지역경제 활성화를 도모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에는 수변테라스, 휴게쉼터, 농촌경관체험장, 포도체험길, 생태체험원, 수변산책로, 전망대, 분수 등이 조성된다.
□남면의 특산물
사과·자두·참외·복숭아
남면의 대표적인 특산물은 사과라고 해야 할 것이다. 생산량만 보면 포도가 단연 많지만 맛 좋고 때깔 좋은 연봉사과는 전국 소비자들에게 인기다. 운곡자두도 종상참외도 유명하다.
사과는 연봉, 오봉을 중심으로 149농가가 71ha에서 1천128톤을 생산하고 자두는 운곡, 옥산을 중심으로 340농가가 108ha에서 970톤을 생산하며 참외는 종상을 중심으로 30농가가 27ha에서 891톤을 생산하고 있다. 복숭아는 운곡, 오봉, 옥산을 중심으로 82농가가 32.7ha에서 390톤을 생산하고 포도 역시 송곡, 운곡을 중심으로 369농가가 231ha에서 3천582톤을 생산,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
이와 같은 특산물 덕분에 남면엔 억대농업인이 많다. 연봉, 운곡, 오봉 등에서 사과·자두·복숭아·참외·포도농사로 억대의 수입을 올리는 농업인이 30여명에 이른다.
□남면의 산업
녹색농장
@IMG12@남면 연봉1길 100-11번지에 위치한 녹색농장 영농조합법인. 김태조(59세) 대표가 2014년 3월 설립해 오늘에 이른 녹색농장은 사과(세척사과), 복숭아, 포도 등 과일과 감자 등 채소를 삼성홈플러스, 롯데마트, 이마트 등에 납품하고 포털쇼핑 등 사이버 판매를 하는 농장이다.
김태조 대표에 의하면 녹색농장은 지역 내 생산농업인과 소비자 직거래를 통해 유통마진을 줄여서 양질의 농산물을 저렴하게 공급,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가 만족하도록 하는 영농조합법인이다.
한편 남면 관내에는 ㈜지텍 등 47개 기업이 가동 중이며 종사원은 923명에 이른다.
□남면의 학교
운곡초등학교
남면 운곡리에 소재한 면내 유일의 초등학교로 예절 바른 생활을 실천하는 어린이, 튼튼하고 명랑한 어린이, 개성 있고 자율적인 어린이, 창의성을 지니고 탐구하는 어린이 육성을 교육 목표로 하고 있다.
1948년 9월 1일에 개교한 이래 1997년 3월 1일 부상초등학교를 통폐합하고 2010년 3월 1일 금오산초등학교를 통폐합했다. 2015년 2월 현재 63회에 걸쳐 1,756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