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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령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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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시내에서 선산방면으로 감천을 따라 좌측 삼각형태로 펼쳐진 개령면은 예로부터 감천의 풍부한 용수와 비옥한 토질을 바탕으로 지역의 대표적인 곡창지로 알려져 왔으며 감문국의 옛 도읍지이자 개령현의 소재지로서 지역문화의 정체성을 간직한 역사의 보고(寶庫)이기도 하다.
‘삼국사기’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사료를 종합해 볼 때 지금의 개령면 동부리와 양천리 일대를 중심으로 개령면과 감문면일대를 지배했던 삼한시대의 변한계 12국 가운데 하나인 감문국(甘文國)은 일찍이 고대국가로서의 기틀을 확립하고 가야와 백제를 견제하려던 신라에 의해 231년 토멸돼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다.
개령일대에는 감문국 왕비의 능(陵)으로 추정되는 장부인릉과 감문산성, 궁궐터와 연못 등이 1800년의 세월을 넘어 우리에게 김천의 고대역사를 말없이 증언해 주고 있다.
이후 사벌주 아래의 감문군으로 있다가 진흥왕 18년(557년) 감문주, 문무왕 원년(661년) 감문군, 경덕왕 16년(757년) 개령군으로 개편된 이래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계속 이어지다가 조선조에 들어 태종16년(1416년) 개령현으로 격하됐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왜군 제7진 3만명이 개령에 진주해 후방사령부를 설치한 관계로 많은 현민이 고통을 당했고 임진왜란 직후인 1601년에는 개령현 아포출신 길운절이 제주도에서 역모를 꾀하다 발각돼 개령현이 인근 김산군에 폐합되기도 했다.
1896년 개령군이 됐다가 1914년 개령군에 속한 부곡면과 서면이 합해져 개령면으로 개편된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과 전설
감천변 채소산지 번개들을 낀 황계리
황계리(黃溪里)는 용두동에서 선산으로 이어지는 910번 지방도를 따라가다 만나는 개령면의 첫 마을로 황계1리인 황경골과 2리인 오송골로 이뤄졌다.
조선시대까지 개령현 서면에 속해 황경동(黃京洞)이라 했는데 1914년 서면과 부곡면이 통합되어 개령면으로 될 때 인근의 오송을 합해 황계동(黃溪洞)이라 고쳤다.
지명과 관련해서 황경, 횡강, 황계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데 비옥한 황토가 많은 큰 마을이라는 뜻으로 누를황(黃)자에 클경(京)자를 써서 황경(黃京)이라 했다고도 하고 마을에서 볼 때 감천이 가로로 누워 흐른다해 가로 횡(橫)자를 써서 횡강(橫江), 흙탕물이 흐르는 시내란 뜻의 황계(黃溪)로도 불렸다.
황경골은 160호에 달하는 개령최대의 마을로 처음 형성된 것은 김녕김씨 김문기(金文起)의 9세손인 김응남(金應南)이 임진왜란을 피해 지례에서 이곳으로 이주하고 이후 형조참판을 역임한 김해김씨 16세손 김명한(金命漢)이 1805년 이 마을로 입향한 이래 대대로 김녕김씨와 김해김씨가 집성을 이루어왔다.
이 마을은 화산과 치봉골 등의 야산이 마을을 감싸고 있어 밖에서는 마을이 드러나지 않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으로 자손이 번성하고 부유해진다는 명당터로 알려져 왔다.
마을주민들에 따르면 감천변에 드넓게 펼쳐진 ‘번개(蕃溪)들’은 원래 쓸모없는 갈대밭이었는데 1800년대 말 개간을 통해 경작지로 조성이 됐다. 예로부터 비옥한 사질토로 인해 무와 배추의 주산지로 유명해 조선말 궁중에까지 진상됐고 1970년대 초까지 전국의 채소중개인들이 몰려들어 마을 앞 주막거리가 흥청거렸었다고 한다.
황계2리 오송골은 모광지 옆 산 아래에 자리 잡고 있는데 뒷산에 큰 소나무 다섯 그루가 있어 오송(五松)이란 지명을 얻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소나무송(松)자가 붙어있는 곳으로 피난하면 안전하다는 속설이 퍼지면서 사람들이 몰려들어 마을이 형성됐다고 전해진다.
곰과 용의 전설이 전하는 신룡리
묘광 연화지에서 감문으로 연결되는 도로변에 접해 광덕산 아래 자리한 신룡리(新龍里)는 곰내기와 오룡골 두 마을로 이뤄져있다.
곰내기(熊洛)라는 지명은 마을 뒷산인 광덕산의 형세가 곰이 머리를 내밀고 있는 것 같다 해서 곰내미라고 하다가 곰내기로 바뀐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자로 웅락(熊洛)이라 해서 곰웅(熊)자와 땅이름락(洛)자를 사용한 것은 이러한 곰과 관련된 산세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곰내기는 다양한 전설이 많이 남아있는데 애인고개, 나벌들, 장수천 전설이 그것이다.
애인고개(앵고개)는 대광동 묘광과 신룡리 경계의 나지막한 고개 이름인데 현재는 모광주유소가 자리 잡고 있는 지점이다. 옛날 감문국의 공주가 신라 총각과 사랑에 빠져 매일 이 고개에서 만났는데 이를 눈치 챈 집안에서 반대해 못 만나게 하자 공주가 궁을 도망쳐 나와 고개에서 총각을 기다리다 굶어 죽었다 해서 애인(愛人)고개, 앵고개, 앵고대 등으로 불리고 있다.
신룡2리 오룡골(五龍谷)은 곰내기로 부터 감문방면으로 가다가 덕촌 못 미쳐 딴동백이산 앞에서 좌측으로 깊숙이 자리한 마을이다.
이 마을은 고려시대 말 해주오씨(海州吳氏) 한 선비가 마을을 개척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지금은 평안강씨(平安康氏)와 김해김씨가 주로 살고 있다.
오룡(五龍)이라는 마을의 지명은 광덕산의 다섯줄기가 마을저수지인 오룡지를 향해 마치 다섯 마리의 용이 못으로 달려드는 형세이다.
취적봉 북서쪽에 자리한 덕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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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산이씨 효열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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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촌리(德村里)로 속한 마을은 독송(獨松), 터골(基洞), 산당(山堂), 자방(紫房) 등 네 마을이다. 이 가운데 독송과 터골은 조선시대까지 개령현 서면의 덕림동(德林洞)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인근의 산당과 자방을 합해 덕촌동(德村洞)으로 고쳤다.
덕촌1리 독송(獨松)은 신룡리 오룡골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다. 1800년대 말 흥양이씨(興陽李氏) 이인목(李寅穆)이란 선비가 마을에 들어와 살면서 마을 뒷산의 산세가 독수리의 형상이고 정상에 큰 소나무가 홀로 서있어 마을이름을 물수리악(鄂)자와 솔송(松)자를 써서 악송(鄂松)이라 했다. 또 홀로독(獨)자와 솔송(松)자를 따서 독송(獨松)이라 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음이 변해 독슬로도 불렸다.
독송마을과는 어모천을 사이로 두고 있는 덕촌3리 터골은 취적봉 아래에 자리한 마을로 임진왜란을 전후로 함안조씨(咸安趙氏)일가가 이 마을에 터를 잡고 정착하면서 터골이라 이름하고 한자로 터기(基)자와 터대(垈)자를 써서 기동(基洞), 대동(垈洞)이라 했다.
자방마을은 1480년 함양오씨(咸陽吳氏) 오식(吳植)이라는 선비가 경남 함양에서 이주하여 살기 시작한 이래 대대로 함양오씨가 집성을 이루며 살아왔다. 예부터 마을에 실을 짜고 염색을 들이는 일을 하는 공방이 있었다 해서 자주빛자(紫)자에 방방(房)자를 써서 자방(紫房)이라 했다고 한다.
자방마을로부터 산당고개 너머에는 산당(山堂)이라 불리는 작은 마을이 있다. 1420년 밀양박씨 박응(朴應)이란 선비가 마을을 개척하면서 산자락에 자리를 잡았다 해서 마을이름을 산당(山堂)이라 했다고도 하고 마을에 산신당(山神堂)이 있었음으로 산당이라 했다고도 한다.
자방마을 입구에는 성산이씨효열각이 있는데 성산이씨부인은 병자호란 때 의병장으로 나라에 큰 공을 세우고 전사한 감천 도평리 출신 의병장 이언의(李彦儀 1600~1639)의 따님으로 자방마을 오여권(吳汝權)에게 출가해 지극한 효성으로 시부모를 섬기고 남편이 병사하자 삼종지의(三從之義)를 쫓아 자결을 택한 효부이자 열녀로 알려지고 있다.
옛 개령현 관아 서쪽에 자리잡은 서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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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자사 절터의 삼층 석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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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리(西部里)는 개령면사무소가 있는 동부리로부터 신룡리로 이어지는 한티고개와 호두산 아래 자리 잡고 있다.
서부리는 조선시대까지 개령현 서면에 속한 부억골(富億谷), 화목골(和睦谷), 우량골(友良谷)로 나눠진 별개의 마을이었는데 개령현청 소재지였던 동부동과 인접한 관계로 마을이 커지면서 1914년 개령면 서부동으로 통합됐다.
서부리로 속한 마을 중 우량골(友良谷)은 개령중학교와 접해있는데 예로부터 주민이 우애 있고 순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마을회관이 있는 화목골(和睦谷)은 마을주민들이 화목하고 사이좋게 살자 해서 화목이라 마을이름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또 부억골(富億谷)은 마을에 부자가 많이 생기라는 염원을 담아 부자 부(富)자로 이름했다고 한다.
마을 뒤 호두산으로부터 신룡리 방면으로 호랑이의 긴 꼬리처럼 야트막하게 뻗어가던 야산은 뱀의 형상이라는 사산(蛇山)으로 연결되는데 사산아래 도로변에 우측으로 웅장한 규모의 삼층석탑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 탑은 김천 최대 규모의 석탑으로 원래 신라시대에 창건된 사자사(獅子寺)가 있던 절터었는데 조선 초기 임시 개령향고로 사용되다가 1473년(성종4년) 개령현감 정난원(鄭蘭元)이 절을 허물고 그 목재와 석재를 이용해 유동산 아래 감천변에 개령향교를 세웠다.
탑 뒤로는 야산크기는 족히 돼 보이는 구릉지가 있는데 감문국시대의 왕비 노로부인의 능(陵)으로 알려진 장부인릉(獐夫人陵)이다. 주변에 민묘가 들어서고 정상부가 포도밭으로 개간이 되어 본디 형체를 찾을 길이 없다.
조선후기의 북학파 실학이며 ‘발해고(渤海考)’의 저자인 유득공(柳得恭 1749~?)은 전국의 고도(古都)를 답사하다 이곳에 들러 시 한수를 읊어 장부인과 감문국을 회고했다.
獐姬一去野花香
장부인은 가고 들꽃은 향기로워
埋沒殘碑古孝王
묻히다 만 비석은 옛 금효왕의 것일세
三十雄曾兵大發
서른 명의 용감한 군사 크게 뽑아
蝸牛角上鬪千場
달팽이 뿔 위에서 천 번은 싸웠으리
삼한시대 감문국의 중심지였던 동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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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부리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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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리(東部里)는 옛 삼한시대 감문국으로부터 조선시대 개령현에 이르기까지 도읍지이자 읍치(邑治)로서 감문산을 진산(鎭山)으로 크게 교동(校洞), 구교(舊校)로 이뤄져 있다.
교동은 교촌, 윗마을, 윗곡, 조동 등으로도 불리며 개령향교가 있어 학교교(校)자의 교동(校洞)으로 불리는 마을로 호두산(虎頭山)과 맞은편에 관학산(觀鶴山)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동부리 마을 뒤 관학산 자락에는 내신정(來新亭)이라는 건물이 한 채 있는데 우리고장에 남아있는 유일한 향약소(鄕約所)로 조선시대 개령고을의 풍속을 바로잡던 향촌자치기구의 집회소이자 개령향약안의 보관소였다.
현재의 개령면사무소와 개령지서, 개령초등학교 등 관공서 터는 옛 개령현의 관아터로 당시 관아에 딸린 연못이 면사무소 앞에 그대로 남아있다. 원래 서부리 남산 정상에 있던 개령의 명물 팔승정(八勝亭)이 1900년대 초 현재의 면사무소 앞으로 이전됐고 2008년 연못과 함께 대대적으로 보수가 돼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다.
옛 개령관아 앞 속청 비석거리에 소재한 비석은 1700년대 초부터 1900년대 초까지의 역대 개령현감, 군수의 선정비와 말에서 내릴 것을 알리는 하마비, 수로 관리책임자 등의 공적비로 그 수가 20기에 달한다.
동부2리 구교마을은 동부1리 교동과는 수로로 이용되고 있는 굴다리가 경계를 이루며 양천리와는 역마고개를 경계로 유동산과 관학산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구교(舊校), 구교동(舊校洞), 교천(校遷) 등으로 불리는 마을의 지명은 개령향교가 1610년부터 1837년까지 200여 년간 이 마을에 있었음으로 해서 얻게 된 것이다.
동부2리 마을 앞 동부연당과 선산방면 지방도 사이에는 직경이 수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버드나무 몇 그루가 길게 늘어져 있다.
1833년(순조 33)에 경상도 71개 군현의 읍지를 함께 수록해 발간한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 제12책의 개령현편에도 개령임수(開寧林藪)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개령임수는 개령현 남쪽 2리에 있다. 사예(司藝) 김숙자(金淑子)가 현감이 됐을 때 점필재(畢齋) 김종직(金宗直)이 관아에 따라와 나무를 심어 숲을 이루도록 해서 고을의 물난리를 방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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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신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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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승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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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양천역의 있었던 역촌마을 양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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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천리 고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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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개령현 부곡면으로 속했던 양천리(楊川里)는 동쪽으로 감천, 서쪽으로 감문산 취적봉이 가로막고 남쪽으로는 역마고개를 경계로 동부2리 구교동, 북쪽으로는 광천리와 접하고 있는 마을이다.
조선시대 초기에 설치돼 1800년대 말 폐지된 양천역(楊川驛)이 이 마을에 있었다는 사실을 통해 볼 때 일찍이 역촌(驛村)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양천이라는 마을의 지명은 마을 앞 감천변에 수양버들이 장관을 이뤄 버드나무양(楊)자에 내천(川)자를 써서 양천(楊川)이라 이름 했다고 하는데 지금도 유동산 아래 도로변에는 몇 그루의 버드나무 고목이 남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마을은 동부리와 함께 감문국의 중심지였던 관계로 감문국과 관계된 지명과 흔적들을 엿볼 수 있는데 성안골(城內谷)과 진대골(陣大谷)이 대표적이다.
성안골은 마을뒷산인 감문산의 가장 큰 골짜기로 옛날 감문국시대에 이곳에 성을 쌓고 살았다고 하는데 1960년대 말 까지만 해도 운동장크기는 족히 됨직한 넓은 공터와 성(城)의 형태가 뚜렷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이 마을에는 1967년 발굴돼 학계에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양천리 고분’이 있는데 당시 삼국시대의 투구와 칼이 출토됐고 석실내부의 벽에 채색의 흔적이 보이는 문양이 있었다고 한다.
빗내농악의 발상지 광천리
양천리와 빗내마을 사이 당고산 아래에 자리 잡은 광천1리 광한마을은 조선시대까지 개령현 부곡면에 속하여 광한이라 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이웃한 횡천과 합하면서 광한(廣漢)의 광(廣)자와 횡천(橫川)의 천(川)자를 따서 광천동(廣川洞)이라 했고 1971년 광한을 1동, 횡천을 2동으로 분동했다.
광한이라는 마을의 지명은 1636년 병자호란 때 순흥안씨(順興安氏) 안연(安璉)이 난을 피해 경기도 광주에서 이 마을로 이주해 살면서 일대에 들과 하천이 넓다 해서 넓을광(廣)자에 강이름한(漢)자를 써서 광한(廣漢)이라 했다고 한다.
광한, 남전과 이웃하고 외현천을 경계로 감문면 태촌리와 접해 사달산(四達山) 아래에 자리 잡은 광천2리 빗내(橫川)마을은 1971년 광천2동으로 분동했다.
이 마을은 1600년대 초에 김녕김씨(金寧金氏) 김응래(金應來)가 농소 연명에서 이거한 후 대대로 집성을 이루며 살았다. 횡천 또는 빗내라 부르는 마을의 지명은 마을 앞을 흐르는 감천이 마을에서 봤을 때 가로로 비켜서 흐른다 해서 가로횡(橫)자와 내천(川)자를 써서 횡천(橫川)이라 적고 우리말로 비스듬히 흐르는 내라는 의미의 빗내라 했다고 한다.
빗내마을은 우리고장의 자랑인 빗내농악의 발상지로 유구한 전통풍물을 전승해 나가는 전초기지로서 2003년 빗내농악전수관을 마을 어귀에 건립해 명실공히 빗내농악의 성지(聖地)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정감록에 명당터로 전하는 남전리
광천리(廣川里) 광한마을에서 감문면 금라리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가다보면 팔용산과 대양산 사이의 도로변 좌우로 있는 남밭, 못안마을을 만날 수 있다.
마을의 원래 지명은 없을 물(勿) 또는 아니 불(不)자에 늙을로(老)자를 써서 물로리(勿老里), 불로리(不老里)였는데 이유도 없이 소년들이 죽는 일이 잦았고 마을을 지나던 한 스님이 그 이유가 늙은이가 없다는 마을이름 때문이라 하며 쪽람(藍)자에 밭전(田)자의 남전(藍田)으로 고치게 했다고 한다.
남전리(藍田里)는 6.25사변 때 피난처로 유명했다고 하는데 이는 예언서인 ‘정감록(鄭鑑錄)’에 밭전(田)자가 들어간 마을로 들어가면 목숨을 보존할 수 있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으로 실제 마을 앞 강변들에 수많은 피난민들로 넘쳐났었다고 한다.
마을을 품고 있는 팔용산 아래는 20년 전까지 동제(洞祭)를 지냈던 장소로 여덟 마리의 용이 승천을 했다는 팔용샘(八龍泉)이 있다. 동제는 새벽에 팔용샘에 목욕을 하고 돼지를 잡아 제물을 장만해 제를 올렸는데 신기하게도 동제를 지내지 않으면서부터 물이 말라버렸다고 한다.
마을입구의 우측 도로변으로는 1500년대에 축조됐다는 4천여 평에 달하는 남밭저수지가 있는데 풍수지리로 볼 때 이곳 일대의 혈맥이 모이는 명당터인지라 장차 나라를 위태롭게 할 큰 인물이 나올 것을 두려워한 조정에서 원래 광산김씨 소유이던 땅을 파 못으로 만들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저수지 뒤로는 현재 4가구가 사는 작은 마을이 있는데 저수지 안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못안이라는 동명을 얻었다.
남전마을과는 용정고개(龍井峴)를 경계로 하여 대양산아래에 자리한 대양묘마을은 개령면소재지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마을이다.
마을의 지명인 대양묘(大陽妙)는 대양산 아래의 아름다운 마을이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고 한다.
□개령의 문화유산
계림사(鷄林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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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림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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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문산 계림사는 직지사 창건주인 아도화상이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창건 당시의 사적은 알 수가 없고 1804년에 발견된 ‘감주계림사개건기(甘州鷄林寺改建記)’와 1954년 간행된 ‘계림사사적기(鷄林寺寺蹟記)’ 등을 통해 볼 때 계림사는 동부리 일대의 호랑이 지형을 진압하기 위해 건립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료의 기록과 민간의 전설을 종합해보면 계림사 창건의 비밀은 다음과 같다. 개령면 동부리 마을뒷산인 감문산은 풍수지리로 볼 때 호랑이가 누워있는 와호형(臥虎形)으로 그 중 한 봉우리인 호두산은 호랑이의 머리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그 호랑이의 머리가 바라보는 방향이 감천을 넘어 아포읍 한골마을인지라 한골마을사람들은 호랑이의 살기에 눌려 일 년에도 몇 명씩 멀쩡한 사람이 죽어 나갔다는 것. 직지사를 짓기 위해 선산에서 김천을 내왕하던 아도화상이 이 같은 이야기를 듣고 감문산을 둘러본 후 호랑이의 기세를 누르기 위해 호랑이의 심장에 해당하는 지점에 절을 짓고 밤을 상징하는 호랑이와 상극으로서 낮을 상징하는 닭을 절에 기르고 절 이름마저도 닭이 무리를 지어 산다는 의미인 닭계(鷄)자에 수풀림(林)자를 써서 계림사(鷄林寺)라 했다는 것이다.
개령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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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령면 동부리에 소재한 개령향교는 가장 작은 규모인 소설위(小設位)로서 30명의 유생을 교육했으며 개령현에 속했던 옛 곡송면 일대의 감문면과 아포읍, 개령면, 농소면, 남면을 관할로 하고 있다. 감문산 자락의 구릉지에 위치한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식이며 외삼문과 명륜당, 동재, 서재, 내삼문, 대성전으로 구성돼있다. 개령향교는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초에 서부리 웅현(熊峴) 고개마루의 사자사(獅子寺)를 임시향교로 사용했다. 그러다 1473년(성종4년)에 개령현감 정난원이 유동산 앞 감천변에 새로 향교를 세우면서 사자사 절에서의 향교 더부살이 시대를 면하게 되는데 사자사를 허물 때 나온 목재와 석재들을 새 향교 건립에 재사용했다고 한다. 1837년(헌종3년) 현감 이창재(李昌在)가 수해로부터 안전한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개령면의 자랑
빗내농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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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빗내농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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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령면 광천리 빗내마을에 전승돼온 농악으로 1984년 12월에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됐다. 개령면일대는 삼한시대에는 감문국(甘文國)이라는 부족국가가 있었고 개령들이라는 대표적인 곡창지대를 형성했는데 빗내마을에서는 음력 정월 초엿새에 동제(洞祭 빗신굿)를 열었고 풍물놀이와 줄다리기를 이어왔다.
빗신굿 본제에 앞서 당산에 올라가 고하는 당산매구를 친 다음 마을로 내려와 지신밟기를 했다. 빗신굿 본제 뒤에 이어지는 줄다리기는 동네를 동(東)과 서(西)로 나눠 줄을 당겼고 이때 농악대와 각지에서 모여든 무당들도 두 패로 나뉘어져 다드래기 가락으로 응원을 했다.
빗내농악은 단순한 농악이 아니라 유래에 있어서 빗신과 연결되는 점, 농사굿이 아닌 진(陣)굿으로 발전돼온 점, 상쇠의 계보가 전재진이군선윤상만우윤조이남춘김홍엽-한기식에서 현재의 상쇠인 손영만에 이르기까지 뚜렷하게 이어오는 점, 자진모리류가 주종을 이루며 가락이 다양하고 힘이 있는 점, 판놀음의 대북춤·양손을 벌려 활개치는 기러기춤·풍물패가 서로 짝을 맞추어 박수를 치는 수박치기 등이 특색으로 꼽힌다.
빗내농악의 체계적인 전승을 위해 빗내마을 입구에 2003년 빗내농악전수관을 건립해 풍물교육을 진행하고 있으며 2011년 제52회 한국민속예술축제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특히 빗내농악을 포함한 대한민국 농악(풍물)이 지난해 11월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에 등재됨으로써 세계적인 농악으로 의미를 더했다.
□개령면의 숨겨진 보물
감문국 궁궐 연못 동부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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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부연당 |
ⓒ i김천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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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에 왕이 살았던 시절이 있었을까요?”
시민을 대상으로 이런 질문을 던진다면 과연 그 반응은 어떨까?
지금으로부터 1700여년 전 신라의 공격을 받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 비운의 소국이 있었다. 다름 아닌 개령면 동부리를 중심으로 김천일대를 지배한 삼한시대 부족국가 감문국(甘文國)이 있었던 것이다.
동부2리 마을 앞에는 동부연당이라 불리는 작은 저수지가 있는데 1934년 우문(禹文)이 집필한 ‘감문국개령지(甘文國開寧誌)’라는 책에 이 못을 가리켜 감문국 시대에 왕이 살았던 궁궐에 딸린 연못으로 기록하고 있다.
김천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의 하나인 동부리는 서기231년 신라에 복속되기 이전까지 어엿한 왕국의 도읍이었다는 엄청난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실제로 동부2리 구교마을과 양천리의 경계인 역마고개 정상부에는 감문국시대 궁궐의 초석이라고 전해지는 다듬어진 석재가 몇 개 남아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동부연당으로 불리는 작은 연못과 이웃한 역마고개 초석을 통해 감문국 백성들의 못다 이룬 웅혼한 기상을 엿볼 수 있다.
□개령면의 산
감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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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령들 중앙에 봉곳 솟아있는 감문산(甘文山)은 해발 239m에 불과하지만 감문국의 후예인 개령면 주민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생명의 산이다. 추풍령으로부터 불어내는 북풍한설을 묵묵히 막아내고 뗄감을 제공해 매운 겨울을 나게 했으며 험한 비바람을 가로 막아준다.
역사적으로 삼한시대 소국 감문국이 동부리에 섰을 때 산성을 쌓아 백성의 피난처가 되기도 하는 등 동부리 사람들과는 유사 이래로 불가분의 관계를 이어왔다. 개령면에 속해있으면서도 감문이라는 산 이름을 가지게 된 것 역시 감문국의 진산이었음을 상징해주고 있다. 달리 불취(吹취), 피리적(笛)을 써서 취적봉이라고도 했는데 이것은 적이 쳐들어 올 때 산위에서 피리를 불어 위험신호를 했음에서 비롯됐다. 또 성황산이라고도 했는데 감문산이 나라와 백성을 지켜내는 성황신이 깃들어 있다 해서 붙인 이름이라 전한다.
감문산은 개령면 동부리와 서부리, 양천리, 덕촌리 등 여러 마을에 걸쳐 있으며 주봉인 취적봉을 중심으로 호두산, 사달산, 당고산, 관학산, 유동산 등 여러 봉우리를 거느리고 있다. 산내에는 천년고찰 계림사와 개령향교, 내신정 등 유서 깊은 사적과 문화유산을 품고 있으며 풍수지리와 관련된 흥미로운 전설이 전해진다.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감문산은 호랑이가 엎드려있는 와호형(臥虎形)의 길지로 알려진다. 호두산과 취적봉의 두 봉우리로 구성된 감문산은 멀리서보면 실제 호랑이가 머리를 감천방면으로 두고 엎드려있는 형국인데 호두산은 이로 인해 생긴 이름이다.
옛날 감천 너머의 아포 대신 사람들이 호랑이의 살상기운에 눌려 궂은일을 많이 겪게 되자 직지사를 창건한 아도화상이 현재의 계림사자리가 호랑이로 상징되는 감문산의 혈(穴)자리로 보고 절을 짓고 절 이름을 호랑이와 상극인 닭계(鷄)자를 넣은 계림사라 이름 해서 호랑이의 성난 기운을 눌렀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개령면의 특산물
번개들 토마토 서울서도 인기
개령면의 특산물은 포도가 단연 으뜸이다. 380농가가 195ha에서 연간 3천680톤의 포도를 생산해 부자농촌이 되도록 했다.
그 다음 많이 생산되는 것이 완숙토마토. 지금으로부터 50~60년 전 번개들에는 토마토를 재배하는 농업인이 적지 않았다. 일반인들이 토마토를 구경도 못하던 그때 황계리 사람들은 토마토농사를 지었는데 노지재배가 대부분이었다. 대형비닐하우스에서 26농가가 8ha에서 780톤의 토마토를 생산하고 있다.
완숙토마토와 마찬가지로 번개들을 중심으로 방울토마토농사를 짓는 농업인도 13농가에 이른다. 5ha에서 연간 300톤의 방울토마토를 생산해 서울 등지로 납품, 호평을 받고 있다.
□개령면의 산업체
사람과 자연이 함께하는 ㈜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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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계리 소재 ㈜부영은 콘크리트 수로관, 생태블록 등을 제조하는 기업으로 2011년 설립됐다. 2만7천61㎡의 부지에 공장 2동과 사무실 등 건축면적 3천505㎡의 ㈜부영의 근무인원은 30명. 시공이 간편한 축조식생블록 생산으로 인건비는 물론 시공기간을 단축했으며 수생동물이 다닐 수 있는 길을 열어 생태계 복원에도 앞장서왔다.
(주)부영은 ‘사람과 자연이 함께하는 기업’이란 경영이념을 바탕으로 친환경업체라는 자부심을 갖고 더 좋은 제품 생산에 주력하며 끊임없는 신제품 개발로 저탄소녹색환경을 선도해 나가고 있다. “인간 삶의 질에 초점을 맞춘 친환경제품 공급을 위해 새로운 기술개발과 최고의 봉사정신으로 무장해 미래를 창조하는 기업, 김천과 구미를 아우르는 기업으로 지역경제발전에 일조하도록 하겠습니다.”
㈜부영 정현석 회장의 말이다.
개령면 관내에는 현재 건설 중인 4개소 포함 16개소의 기업체가 있다. 그러나 ㈜부영과 미래(주) 외에는 종업원 수 12명 미만의 소규모 업체이다.
□개령면의 학교
<개령중학교> 개령면 동부리에 있는 공립중학교로 1952년 3월 2일 개령중학교 설립 기성회를 조직, 1953년 4월 1일 개령고등공민학교를 개령중학교로 6학급 승격해 인가를 받았다. 1958년 1월 5일 3학급으로 학칙 변경 인가를 받았고 1971년 9학급으로 학칙 변경 인가를 받았다. 1993년 10월 30일에 가사실과 컴퓨터실 2칸을 증축했으며 1996년 11월 4일 방송실을 설치했다. 2015년 현재 62회 졸업식을 통해 총 4천200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개령초등학교> 개령면 동부리에 있는 초등학교로 1909년 4월 9일 사립 개진학교를 인가 받아 개교했으며 1912년 4월 1일 4년제 개령공립보통학교로 승격했다. 1938년 4월 1일 개령공립심상소학교로 교명을 변경했고 1941년 4월 1일 개령공립국민학교로 변경했다. 1946년 9월 1일 개령서부국민학교가 분리됐으며 1996년 3월 1일 개령초등학교로 교명을 변경, 오늘에 이르렀다. 2015년 현재 102회 졸업식을 통해 6천300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전통 문화 계승 활동으로 빗내풍물단을 운영, 전국농악대회에 출전해 우수한 성적을 거뒀다.
2009년으로 개교 100주년을 맞은 개령초등학교는 2011년 8월 15일 ‘개령초교 100년사’를 발간했다.
<개령서부초등학교> 개령면 서부리에 있는 초등학교로 1946년 10월 1일 개령서부국민학교 신룡분교장으로 개교했다. 1947년 4월 7일 개령서부국민학교 승격했으며 1996년 3월 1일 개령서부초등학교로 교명을 변경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15년 현재 66회 졸업식을 통해 4천468명의 졸업식을 배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