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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기획시리즈

우리고장 어제와 오늘<5> 감문면(甘文面)편

권숙월 기자 입력 2015.03.25 06:06 수정 2015.03.28 06:06

백운산 중심으로 상주, 선산 연결되는 옛 교통의 중심
금효왕릉, 고인돌 등 고대유물 지천에 깔린 노천박물관

↑↑ 감문지도
ⓒ i김천신문

감문면은 김천시 북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으로 구미시 선산읍과 무을면, 북쪽으로 상주시 공성면, 서쪽은 어모면, 남쪽은 개령면, 아포읍과 경계를 이룬다. 북쪽의 속문산이 남쪽으로 뻗어내려 고산지대를 형성하며 외현천과 감문천이 면 중앙을 흘러 감천으로 합류한다. 감문면은 삼한시대에 개령을 중심으로 성립됐던 감문국의 영역이었던 관계로 금효왕릉을 비롯한 감문국과 관련된 유적과 전설이 많이 전해지는데 감문이라는 지명 또한 감문국으로부터 비롯됐다. 또한 문무리에는 감문국과 비슷한 시기에 문무국이라는 또 다른 소국이 있었다고 전하며 무수한 고인돌과 고분, 산성유적이 남아있어 김천 고대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대양리 천동은 김갑생과 아들 해종의 대를 이은 효행으로 부자효행비가 세워진 효행의 고장이기도 하다.
 
□마을과 전설
 
구래실 전설이 전하는 구야리
대광동 묘광 연화지를 지나 개령면 신룡리와 어모면 다남리를 따라 913번 지방도로 가다보면 도로변에 위치한 감문면의 남쪽 첫 마을인 구야리(九野里)를 만날 수 있다.
이 마을은 1590년(선조23년) 남양홍씨가 이주해 마을을 처음 개척했다고 전해지며 지금은 경주이씨가 집성을 이루고 동래정씨, 상산김씨가 많이 거주하고 있다.
구야 또는 구래실로 불리는 이 마을의 지명은 지덕, 장시, 버지, 칭지, 뒷골, 새암골, 방아다리, 새보, 왕치 등 마을 주위로 아홉 개의 들판이 있어 구야(九野)라 했다고 한다.
또 구래실(九來實)과 관련해서는 마을 뒷산인 구봉산 아래 아홉 개의 큰 과일 나무가 있어 마을에 흉년이 들었을 때 주민들이 이 과일로 배고픔을 면하게 했다고 해서 구래실(九來實)이라 전해지고 있다. 구야, 구래실, 구봉산 등 아홉 구(九)자와 관련된 지명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김천 왕골의 첫 재배지 은림리
어모면 군자리, 다남리와 이웃하고 있는 은림리(隱林里)는 상군, 하군, 본리(사래) 등 세 마을로 이뤄져 있으며 상군은 수원백씨, 하군은 현풍곽씨, 본리는 여흥민씨가 처음 정착해 마을을 이뤘다.
상군(上君)은 군자와 같이 밝은 인품을 지닌 큰 인물이 많이 나오기를 염원하는 뜻으로 군명(君明)이라 했는데 나중에 음이 변해 굴미로 불렸다.
마을 뒤 어모로 넘어가는 득뫼고개를 일본사람들이 지맥을 끊기 위해 고의로 고개를 자르고 길을 냈다고 한다.
김천지역에서 왕골이 처음 재배된 곳이 은림이며 사래 마을을 개척한 여흥민씨가 인조 때 한양에서 낙향한 후 전북 부안에서 왕골씨앗을 가져와 재배가 시작됐다고 전해진다.
상군마을 회관 앞에는 예사롭지 않은 느티나무 숲이 조성돼있는데 옛날 마을을 지나가던 한 스님이 마을 앞을 가리지 않으면 우환이 있을 거라고 해서 느티나무를 심어 숲을 조성해 마을을 가렸다고 한다.
이후 일제 때 아름드리 고목들은 배를 만든다며 대부분 베어가고 앞숲이 제 역할을 못해오다가 1996년에 마을주민들이 새로 나무를 심어 선조들의 깊은 뜻을 지켜오고 있다.
 
신라와 감문국의 국경 도명리
도명리(道明里)는 1539년 경주김씨, 여양진씨가 처음 정착해 마을을 개척했다. 원래 김산군 위량면 고도리였던 것을 1914년에 도명으로 고쳤다고 하는데 고도(古道), 도명(道明)과 같이 마을명이 길(道)과 관련돼 있음을 알 수 있다.
구전에 따르면 신라 선덕여왕 때 이웃한 문무리에 있었다고 하는 문무국(文武國)의 동태를 살피기 위한 신라 군(軍)의 순찰로가 마을주변에 있었다고 한다. 또 마을 뒷산을 통해 어모면 두원으로 넘어가는 질매재가 서울로 가는 지름길이어서 과거 시험을 보러가는 선비들이 거쳐 가는 과거길로도 이용돼 ‘옛길’이라는 의미의 고도(古道)리라 불렸다고 한다.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지금은 흔적밖에 남지않았지만 수십 년 전까지도 김천으로 통학하는 인근마을 학생들이 이 고개를 통해 두원역에서 기차를 타고 다녔다.
 
문무국의 기상이 서린 문무리
↑↑ 고인돌
ⓒ i김천신문

상여, 하여, 장전(긴밭사래) 등 세 마을로 이뤄진 문무리(文武里)는 마을 주변으로 속문산을 비롯한 험준한 산으로 둘러쳐진 전형적인 산골마을이다.
이 마을은 여무(余武), 여산골(余山谷) 등으로도 불렸는데 예로부터 길이 험하고 산이 깊어 마을 주민들은 김천장보다 빈천고개 너머의 상주 공성면 옥산장을 주로 이용했다고 한다.
구전에 따르면 삼한시대에 문무국(文武國)이라는 소국이 상여마을을 중심으로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현재는 이를 고증할만한 관련 자료가 없다. 다만 마을 주변으로 산재한 무수한 고인돌과 고분, 성곽의 흔적들을 통해 미뤄 짐작 할 따름이다.
특히 공성면으로 넘어가는 빈천고개의 도로변에는 지석묘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고 마을 앞 고소산으로 가는 성산골에는 도굴로 인해 파헤쳐져 석실을 드러낸 채 수많은 고분들이 방치돼 있다.
마을 앞산인 고소산에는 감문국시대에 쌓은 것으로 전하는 석성이 있는데 많이 훼손하기는 했으나 일부 구간은 완벽한 형체를 갖추고 있기도 하다.
 
↑↑ 고소산성
ⓒ i김천신문

경주정씨 집성촌 남곡리
조선시대까지 김산군 위량면에 속했던 이 마을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에 경주정씨 정금오(鄭琴五)가 상주 남실에서 난을 피해 정착한 이래 원래 살던 고향의 지명을 따서 남실(南室)이라 불렀다고 한다. 또 이 마을이 백운산의 남쪽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해서 남곡(南谷) 혹은 남실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지금도 70호에 달하는 경주정씨가 살고 있는 지역 최대의 집성촌을 자랑하고 있다.
폐교가 된 도명초등학교 옆으로 난 마을 진입로를 따라 들어 가다보면 마을 못 미쳐 좌우로 나무가 우거진 숲이 있는데 이곳이 마을 주민들의 휴식처이자 자랑인 앞숲이다. 앞숲은 경주정씨 입향조인 정금오가 처음에 집을 짓고 살면서 정원에 많은 나무를 심었었는데 지금도 그 터에 고목들이 남아 숲을 이루고 있다 해서 앞숲이라 불리고 있다.
마을 입구의 앞숲에는 수백년은 족히 됨직한 소나무가 위용을 자랑하는데 그 속에 경주정씨가 이 마을에 터를 잡았음을 기념하는 경주정씨세장비(慶州鄭氏世庄碑)가 세워져 있다.
 
노래, 가매실로 이뤄진 금곡리
금곡리(金谷里)에 속한 노래(露來)와 가매실(釜谷)은 조선시대 말까지 김산군 위량면 적하리와 부곡리라 했다. 1914년 노래와 가매실, 배실마을을 합해 금곡동으로 고치고 1934년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신설된 감문면으로 이속되고 1971년 노래가 금곡1동, 가매실이 2동으로 분동됐다. 금곡1리 노래는 조선 중기 이후 김천의 대표적인 파평윤씨(坡平尹氏) 집성촌으로 자리를 잡았다. 노래라는 마을의 지명은 백운산 자락인 보광산과 봉화산, 남실재 등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해가 일찍 지고 노을이 빨리 오기 때문에 노을래 또는 노래라 했는데 이를 한자로 적으면서 이슬로(露)자에 올래(來)자로 표기된 것으로 보인다.
금곡2리 가매실마을은 1605년 광주노씨(光州盧氏)가 이주해 마을을 형성한 후 달성서씨와 옥천육씨가 들어와 집성촌을 형성했다.
원래 부곡동(釜谷洞)이었던 이 마을은 1914년 인근의 적하마을과 합해 금곡동(金谷洞)으로 동명을 바꿨는데 가메실이라 불리는 이 마을이 부곡에서 금곡으로 바뀐 사연이 아주 흥미롭다.
마을의 형상이 풍수적으로 가마솥과 같아서 가마솥부(釜)자를 써서 부곡동(釜谷洞)이라 했는데 마을 선비들이 가마솥은 물이차면 넘치게 돼 부자가 나오지 않는다 해서 부(釜)자의 양쪽 혹을 떼어내고 재물을 상징하는 쇠금(金)자를 만들어 금곡동(金谷洞)으로 고쳤다는 것이다.
일제시대 때 이러한 사정을 모르는 일본 금광업자들이 이 마을 지명으로 봐서 반드시 금이 나올 것이라며 금을 찾아 마을을 다녀가기도 했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백운산 아래 첫 마을 송북리
송북리(松北里)는 감문면소재지로부터 북쪽으로 8㎞ 거리에 있는 산간오지로 북쪽은 삼두봉, 서쪽은 속문산이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다.
송북(松北)이라는 지명은 1914년 송문과 성북마을을 통합하면서 등장했는데 송북의 송(松)자와 성북의 북(北)자를 따서 만든 지명이라고 한다.
송문(松門)은 마을주변으로 소나무가 많아 소나무 숲에 들어가는 입구 즉, 대문에 해당하는 마을이라는 뜻이라고 하며 성북(城北)은 속문산성의 북쪽에 마을이 있음으로 해서 붙은 지명으로 알려지고 있다.
송북1리는 송문과 안송문으로 나눠져 있는데 조선중엽까지는 속문산성(俗門山城) 아래에 마을이 있어 산성이름을 따서 속문리(俗門里)라 했다. 안송문, 중기리, 외송문 등 세 마을로 나눠져 있었는데 중기리는 폐동이 됐다.
1971년 송북2리로 분동한 성북골은 1590년(선조23년) 경주이씨 이종성(李鍾聖)이 안동에서 이주해 처음 살았다고 전해지는 백운산 아래 첫 마을이다. 성북골(城北谷)이라는 지명은 속문산성으로부터 북쪽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성성(城)자에 북녘북(北)자를 써서 성북골이라 했다.
속문산성은 감문국시대에 쌓은 이래 조선시대까지 군영과 봉수대로 이용된 성이었으며 속문산 해발 600미터 지점부터 능선을 따라 동북쪽으로 석성(石城)과 토성(土城)이 혼용돼 축조됐고 성북골 마을 방향으로는 자연절벽을 그대로 성벽으로 활용했다.
 
김녕김씨 집성촌 금라리
조선시대에 김산군 위량면에 속했고 1920년까지 위량면의 면소재지이기도 했던 금라리(金羅里)는 나가동, 금보동, 양지뜸, 웃뜸, 음달뜸 등 다섯 마을로 구성됐다. 1914년 금보동(金寶洞)과 나가동(羅伽洞)을 합할 때 금보동의 금(金)자와 나가동의 나(羅)자를 써서 금라(金羅)라 했다.
120여호에 달하는 가구 중에서 80여 호가 김녕김씨(金寧金氏)일 정도로 지역 최대의 김녕김씨 집성촌을 형성하고 있다.
마을의 본동이라 할 수 있는 나가동(나아골, 나골)은 임진왜란 때 김이환(金爾環), 김이방(金爾芳) 형제가 난을 피해 이곳으로 이거해 마을을 개척했다. 또한 마을 뒷산의 숲이 울창하고 산세가 수려해 그 경치가 빼어났다. 뿐만 아니라 많은 꽃이 만발해 신라와 가야의 경승지와 비견될만하다 해서 신라(新羅)의 라(羅)와 가야(伽倻)의 가(伽)자를 따서 나가동(羅伽洞)이라 이름했다고 한다.
이 마을이 예전 위량면 소재지였다는 것은 1950년대까지 2일과 7일에 5일장이 섰었다는 사실로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도살제의 전통이 전하는 보광리
금라리에서 삼성리로 가는 도로변에 위치한 보광리(寶光里)는 원래 개령현에 속한 상보(上寶)와 하보(下寶)마을이었는데 1914년 두 마을을 합해 보광동으로 바뀌어졌다.
일설에는 마을 뒷산 탑골에 조선 정종 때 세워진 보광사(寶光寺)라는 절이 있어 마을이름을 보광이라 했는데 절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지금은 탑의 일부만 남아있다.
보광마을은 임진왜란 때 청주에서 피난 온 청주한씨 한건(韓建)이란 선비가 처음 정착해 살았으며 이후 1608년 한건의 딸과 과객으로 마을을 지나던 해주오씨 오명건(吳命乾)이라는 선비가 혼인해 마을에 정착, 해주오씨 입향조가 됐다고 한다.
이 마을은 예로부터 마을 뒷산에 감문국시대 한 장군의 넋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호랑이가 자주 출몰해 주민들을 놀라게 했는데 마을 주민들은 호랑이를 달래기 위해 국신바위 앞에 제단을 차리고 매년 정월 초이튿날 소를 잡아 도살제(屠殺祭)를 지내왔다. 지금도 그 전통이 이어져 산신제를 올리고 있다.
 
금효왕릉이 있는 삼성리
↑↑ 금효왕릉
ⓒ i김천신문

감문면 사무소가 있는 보광리로부터 배시내 방면으로 2km 남짓 가다 보면 감문중학교와 농협, 우체국이 소재한 둔들마가 나오는데 이곳이 삼봉, 외삼봉과 함께 삼성1리로 불리는 마을이다.
조선시대까지 개령면 북면에 속했던 삼봉마을은 1914년 인근의 오성마을과 통합될 때 삼봉(三峰)의 삼(三)자와 오성(午盛)의 성(盛)자를 따서 삼성동(三盛洞)이라 고치고 곡송면에 편입됐다가 1971년에 오성을 제외한 둔들마와 외삼봉을 삼성1리로 분동했다.
이 마을은 1589년 조선 선조 때 구례장씨 장예복(張禮福)이 처음 이거해 마을을 개척했는데 대대로 구례장씨 집성촌을 이루며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삼봉(三峰)이란 지명은 마을의 앞과 뒤로 왜퇴산과 삼밭골, 청룡산 등 많은 산이 둘러싸고 있어 멀리서 마을을 보면 이들 세 개의 봉우리 아래에 마을이 놓인 형세인지라 삼봉이라 이름했다고 한다.
둔들마에서 금곡, 속문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우측으로 오성마을이 나타난다. 조선시대까지 개령현 북면에 속했던 이 마을은 1914년 삼봉마을과 합해서 삼성동이 됐다가 1934년 곡송면과 위량면이 통합, 감문면으로 개칭되고 1971년 오성이 삼성2리로 분동됐다. 김해김씨, 평산신씨 등 50여 호로 이뤄진 오성은 뒷산의 형새가 말(馬)과 비슷하다고 십이지(十二支) 중 말에 해당하는 오(午)자를 따서 오성(午盛)이라 이름했다고 한다.
마을로부터 모 업체 연수원 방면으로 나가다보면 삼성리 930번지 밭 가운데 작은 산을 연상하리만큼 거대한 고분이 있는데 이 무덤에 대해 주민들은 말무덤이라 부르고 있었다.
말무덤은 말(馬)의 무덤이 아니라 보통의 무덤보다 큰 무덤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하므로 이 무덤은 삼한시대 이 지방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감문국의 왕릉으로 알려지고 있다.
 
‘탄동지’의 배경이 된 마을 광덕리
↑↑ 광덕저수지
ⓒ i김천신문

광덕리(廣德里) 1리에 속한 가척마을은 1454년(단종2년) 강릉유씨 두 가구가 현재의 방아다리고개 감로사 절 부근의 안터라 불리는 곳에 들어와 살았는데 훗날 밀양박씨가 추풍령에서 입향할 때 현재의 마을로 옮긴 후 밀양박씨, 영월엄씨, 강릉유씨가 집성을 이뤄 살아왔다.
가척이라는 지명은 처음에 주민들이 가척고개(안터)에 살 때 산적이 자주 출몰해 주민을 괴롭히자 현 마을자리로 옮기면서 한 자의 땅이라도 더 늘려서 잘살아보자는 뜻으로 더할 가(加)자에 자 척(尺)자를 써서 가척(加尺)이라 했는데 뒤에 음이 변해 개자로도 불린다.
광덕1리에서 광덕저수지를 지나 아래로 가면 광덕2리 담안마을이 있다. 조선 숙종 때 평해황씨 세 가구가 들어와 살면서 세 집을 하나의 담으로 둘러쳐 쌓고 대문도 하나만 내어 의좋게 함께 살았다는 마을로 장내(牆內), 안내라는 이름을 얻었다.
담안과 같은 광덕2리에 속한 탄동마을은 가척으로 이어지는 골짜기를 따라 마을이 들어서 있는데 그 유명한 ‘탄동지(炭洞誌)’의 배경이 된 마을이다.
조선 초 해주정씨가 난을 피해 정착해 개척한 마을이라고 하는데 정씨는 오행(五行)으로 화성(火姓)에 해당하므로 불화(火)자가 들어있고 또 땅에 묻어도 변함이 없는 숯과 같이 고고한 충절과 효심을 간직하자는 뜻으로 마을이름을 탄동(炭洞)이라 했다고 한다.
옛날 이 마을에 유가희라는 노처녀가 살았는데 조금 모자란 노총각과 정을 통하게 됐고 이를 알아차린 처녀의 아버지 유호달이 총각을 우물로 유인해 우물에 밀어 넣어 죽여 버렸다는 것이다. 그 이후부터 비가 오는 날이면 우물에서 여우 우는 소리가 들려 여우우물이라 불렸는데 그 우물일대가 광덕저수지가 돼 이 고장의 중요한 농수원이 되고 있다.
 
신풍, 곡송으로 이뤄진 덕남리
덕남리(德南里)는 신풍(新豊)과 곡송(谷松) 두 마을로 이뤄져 있는데 조선시대 말까지 개령현 곡송면으로 속했다가 1914년 두 마을을 통합해 덕남동이라 고치고 193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김천군 감문면이 되고 1971년 신풍이 덕남1리, 곡송(시술)이 덕남2리로 분동했다.
신풍마을의 지명유래에 대해서 몇 가지 설이 전하는데 조선 중종 때 동래정씨 한 선비가 이곳을 지나다가 양지바르고 들이 넓어 정착한 후 농사가 풍년이 들자 새로 생긴 마을에 풍년이 들어 신풍(新豊)이라 했다고 한다.
광덕산자락 명주골 초입에 자리한 광덕2리는 곡송, 시술마을은 조선시대까지 개령현 곡송면 곡송동으로 1920년 곡송면사무소가 태촌리로 옮겨지기 전까지 면사무소가 위치했던 면소재지 마을이다.
1914년에 인근의 신풍과 합해 광덕산의 남쪽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덕남(德南)이라 고치고 1934년에 곡송면과 위량면이 통합될 때 감문면이 되고 1971년 신풍과 분리해 덕남2동으로 분동했다.
이 마을의 지명인 곡송은 광덕산 자락인 명주골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마을 뒤 광덕산 계곡에 소나무가 무성해 골짜기 곡(谷)자에 소나무 송(松)자를 써서 곡송(谷松)이라 했다고 한다.
곡송의 또 다른 이름인 시술은 마을이 깊은 계곡에 위치해 물이 맑고 좋으며 고요한 마을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 물가시(沶)자에 고요할술(述)자를 써서 시술(述)이라 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그 맥이 끊어졌지만 동구 밖 저수지 일대를 지칭하는 장승배기는 예부터 30년마다 못둑에 장승을 깎아 세우고 큰 굿판을 벌여 장승제를 지냈다고 한다.
 
배시내장터와 굴레고개주막으로 유명했던 태촌리
↑↑ 굴레고개
ⓒ i김천신문

성촌, 완동, 덕남과 이웃하고 있는 태촌1리, 안마는 조선시대 말까지 개령현 곡송면에 속한 태성(台星)이었다. 1914년 완동, 배시내와 통합해 태촌(台村)으로 고치고 1920년에는 곡송에 있던 면사무소가 이 마을로 옮겨왔다가 193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김천군 감문면이 되면서 면사무소는 폐쇄되고 1971년 태촌1리로 분동했다.
이 마을은 1529년(중종24년) 김해김씨 김정준(金廷俊)이 정착한 이래 김해김씨와 함안조씨, 안동권씨가 집성을 이루며 대대로 살아오고 있다.
안마라는 지명은 마을이 산으로 둘러싸여 바깥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성촌2리 명천으로부터 탑산 굴레고개 너머에 위치한 태촌2리 완동은 조선시대까지 개령현 곡송면 완동이었는데 1914년 태성(안마), 배시내와 합해 태촌동이라 했다가 1971년 완동이 태촌2리로 분동했다.
지명인 완동(完洞)은 인근의 감천이 자주 범람해 마을 앞들이 자주 수해를 입는데도 이 마을만은 피해를 입지 않아 완전한 마을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밖에도 왁사골이라는 독특한 이름으로도 불린다. 과거 마을 앞 탑산(塔山) 아래로 영남의 상인들이 선산을 경유해 서울로 내왕하던 큰 도로가 있었는데 이 도로 굴레고개의 주막에서 유숙하며 밤낮으로 왁자지끌 소란스럽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알려지고 있다.
완동마을 앞산에는 옛날 한 스님이 일꾼들이 낮잠을 자는 사이에 절을 세웠다 해서 탑산이라 불렀는데 이후 주민들이 원인도 없이 죽기 시작하자 성난 주민들이 절을 부숴 폐사시켰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선산방면 지방도를 따라 감천변에 위치한 태촌3리 배시내는 교통여건이 좋아 일찍이 상권이 형성돼 여느 면소재지 이상으로 번성한 마을로 장터(場基)라 불렸는데 1914년 태성, 완동과 통합해 태촌동이라 했고 1971년 배시내가 태촌3리로 분동됐다.
마을의 형성은 장터로 불렸다는 사실로도 알 수 있듯이 시장으로부터 비롯되었는데 조선 중엽 소금, 생선 등 생필품을 실은 배가 낙동강으로부터 감천을 따라 거슬러 올라와 배를 대고 시장을 형성한 것이 점차 마을로 발전했다.
낙동강으로부터 감천으로 이어지는 수로를 따라 생필품을 실은 배들이 수시로 드나들어 ‘배가 드나드는 시내’란 의미로 순 우리말인 배시내라 했다.
 
명창, 북성, 명천으로 이뤄진 성촌리
삼성리로부터 배시내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가다보면 외현천 인근 도로변에 명창(命昌), 북성(北星), 명천(明泉) 세 마을이 연이어 자리 잡고 있는데 이를 성촌리(星村里)라고 한다.
성촌1리 북성마을은 태촌리의 안마, 완동과 함께 태성무에 속하는 마을로 태성무로 불리는 세 마을 중 가장 바깥쪽에 있다 해서 바깥태성으로 불리기도 했다.
보은이씨가 마을을 개척한 이래 마을 뒷산에 산제당을 모시고 마을의 번영을 기원하며 살았는데 이 산제당이 북극성과 연결돼 있다고 마을이름을 북성(北星)이라 했다고 전해진다.
마을 뒤 서당골에는 평산신씨로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申崇謙)장군의 31세손인 신적희(申績熙)라는 선비가 1780년대에 세운 서당이 있었다. 후손들에 따르면 이 서당에서 옛날 신씨, 김씨, 이씨 세 선비가 우물을 파고 공부를 하면서 후학을 양성했다고 해서 삼포골로 불리기도 했다.
성촌2리 명천은 북성에서 배시내 방면으로 가다가 완동으로 들어가는 도로변에 있는 마을로 1850년 태촌마을의 안동권씨가 이주하면서 새로 생긴 마을이라고 새터라 불렀다.
또 마을 동쪽에 찬샘이라 불리는 샘이 있는데 오랜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고 맑은 물이 솟는다 하여 밝을명(明)에 샘천(泉)자를 써서 명천(明泉)이라 했다고 한다.
성촌3리 명창은 예부터 주민들이 장수한다고 해서 목숨명(命)자에 성할창(昌)자를 써서 명창(命昌)이라 불렸다고 하며 또 돌무리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데 탄동마을이 있는 광덕저수지로부터 시작된 외현천이 설대들을 굽이쳐 흐르고 있는데 큰 비가 내리면 마을 앞에 많은 돌이 쌓여 돌무더기라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다.
 
부자 효행비가 전하는 효행의 마을 대양리
↑↑ 김갑생 김해종 부자 효행비
ⓒ i김천신문

대양리(大陽里)는 대양1리 대이와 대양2리 천동으로 나눠져 있다. 마을의 형성은 1530년(중종25년) 충청도 보은군수를 지낸 김희직(金希稷)이 이거해 살면서 비롯됐다.
대양(大陽)이라는 지명은 마을 서쪽에 있는 안골에 신라 때의 고찰인 대양사(大陽寺)가 있어 대양동으로 했다고 전해지는데 지금도 축대와 돌계단이 남아있다.
또 다른 지명인 대이는 해발 280m인 마을 뒷산 매봉산이 풍수적으로 볼 때 학이 알을 품고 있는 포란(抱卵)의 형상으로 앞으로 큰 인물이 배출돼 마을을 크게 번성시킬 것이라 해서 ‘큰 마을’이란 뜻의 대리(大里)라고 했는데 음이 변해 지금은 대이라 불린다.
대양산을 경계로 개령면 남전과 이웃하고 있는 대양2리 천동은 조선시대에는 개령현 북면에 속했던 마을이었다. 1914년 곡송면으로 되면서 인근 대이마을과 합해 대양동이 됐고 1971년 천동과 음달마가 대양2리로 분동했다.
이 마을이 천동(泉洞), 샘골, 새암골 등과 같이 물과 관련된 지명이 많은데 예로부터 마을 앞으로는 외현천, 뒤로는 맑은 물이 솟는 샘이 많아 조선 숙종 때 김옥경(金玉經)이란 선비가 천동(泉洞)이라 지었다고 전한다.
마을입구에는 부자(父子) 효자비가 세워져 있다. 김해김씨 김갑생(金甲生)과 그의 아들 김해종(金海宗)이 주인공으로 김갑생(1606-1684)은 겨울에 잉어와 죽순(竹筍)을 구해 부친을 봉양했고 아들 김해종(1627-1705)은 겨울에 꿩고기를 구해 봉양하고 3년간 시묘를 다한 부자 효자로 이름이 높았다.
이 마을에는 특히 부해리(미국 뉴저지주) 선교사에 의해 1906년 설립된 대양교회가 있다.
 
□문화유산
 
광덕리 석조보살입상
↑↑ 석조관음보살입상
ⓒ i김천신문

감문면 광덕리 탄동마을에서 가척마을로 가다보면 광덕저수지 아래에 위치한 불상으로 1959년 저수지를 확장하면서 발견됐다. 1980년 보물제679호로 지정된 후 보호각을 세워 보존하고 있다.
화려한 모관을 썼고 풍만한 얼굴을 한 통일신라시대 가품으로 오랜 풍상에도 불구하고 보존상태가 매우 우수해 전신에 걸친 법의(옷)의 자락 하나하나가 섬세하게 표현돼있다.
이 불상은 탄동마을 뒷산인 문수산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문수사에 딸린 암자의 불상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속문산성
↑↑ 속문산성
ⓒ i김천신문

속문산성은 감문국시대에 축조된 이래 조선시대 말까지 군영과 봉수대로 이용된 석성으로 해발 600m지점부터 능선을 따라 동북쪽으로 쌓았다. 정상부에는 군창지로 추정되는 건물터와 함께 대형 주춧돌이 남아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석축의 둘레는 2천455자이고 높이는 일곱 자인데 성내에 우물 두 개와 저수지 두 개, 군창이 있다”라고 수록돼 있다.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에도“군의 북쪽 40리에 있는데 석축의 둘레가 2천540자이고 성안에는 두 개의 샘과 저수지가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백제장수 의직(義直)이 속문산성과 고소산성을 공격했다가 김유신에게 패해 혼자 말을 타고 도망갔다는 구전이 전한다.
 
□감문의 산
 
백운산
↑↑ 백운산
ⓒ i김천신문

백운산(白雲山)은 감문면 송북리와 문무리, 상주시 공성면 영오리 등에 걸쳐져 있는 해발 618.5m의 산이다. 감문면 일대의 주봉으로 백두대간 용문산으로부터 시작된 기양지맥이 국수봉과 말랑고개, 여남재로 이어진다.
백운이라는 산 이름은 서기231년 감문국이 신라에 의해 멸망하자 감문국 백성들이 이 산으로 들어와 끝까지 저항하다 몰살을 당했고 그 원혼이 산을 떠나지 못하고 구름으로 변해 산을 덮었다고 백운이라는 산 이름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또 속문산으로도 불리는데 이것은 산에 예부터 소나무가 대문을 세워놓은 것처럼 많다 해서 송문(松門)이라 했다가 뒤에 속문(俗門)으로 바뀌었다는 설이 있다.
백운산은 김천과 상주, 선산 세 고을의 경계에 위치한 군사적 요충지로 삼한시대부터 산성을 쌓고 군사들이 주둔했는데 현재 남아있는 산성과 봉수대의 흔적이 이 같은 정황을 대변해주고 있다.
 
□특산품
 
감문참외, 새송이 버섯 특히 유명
 
감문참외는 토질이 비옥한데다 일조량이 많은 데서 재배되기 때문에 당도가 높고 아삭아삭한 것이 특징. 맛이 뛰어나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감문참외는 지난해 120농가가 50ha에서 1천700톤을 생산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문제는 참외농사가 비닐하우스 안에서 짓기 때문에 많은 힘이 드는데다 고령화로 매년 참외재배 농업인이 줄고 있다는 것이다.
감문에서 참외보다 많이 생산되는 농산물은 포도. 450농가가 200ha에서 4천500톤의 포도를 생산해 감문 농업인들에게 효자노릇을 하고 있다.
감문의 특산물은 새송이 버섯도 빼놓을 수 없다. 영농조합법인 코리아팜을 비롯한 (영)송림, (영)천일농산, 엔젤팜, 버섯나라 등 열네 농장 2.37ha에서 1천854톤의 새송이 버섯을 생산해 지역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산업체
 
단미사료제조회사 진성상사
@IMG11@
감문면 태촌2리 완동마을 입구에 위치한 진성상사의 단미사료는 라면, 과자 등을 혼합해 제조함으로써 식물성 기름의 함유로 단백질과 에너지 함량이 높은 것이 특징이다.
김정기 회장이 성실과 믿음을 바탕으로 정도경영을 펼치며 사료업계의 리딩 컴퍼니로 키워온 진성상사는 사업 초창기부터 거래해온 축산농가의 80% 이상이 단골고객일 정도로 신뢰를 얻고 있다.
“대한민국 최고를 지향하는 단미사료제조회사 진성상사는 싸고 질 좋은 사료를 생산해 공급함으로 축산발전은 물론 지역발전에 공헌할 수 있도록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초창기 진성상사의 단미사료를 먹은 소가 높은 등급을 받게 되면서 주위 축산농가에 알려져 입소문 마케팅으로 품질을 인정받기도 했습니다.”
김정기 회장의 말이다.
아포읍 대신리에서 사업을 시작한 지 20년이 되던 저지난해 감문면 태촌리로 이전해 제2의 도약을 꿈꾸는 진성상사. 탑산 아래 굴레고개에 위치한 진성상사 김정기 회장의 회사에 대한 관심은 특별하다. 김윤현 사장을 비롯한 직원들이 사료생산에 전력하고 있지만 한 치의 소홀함도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거의 매일 같이 점검을 한다. 이 때문에 진성상사는 전국 축산농업인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있다.
감문면엔 이밖에도 ㈜서일 등 10개 기업이 가동 중인 감문농공단지와 ㈜일신콘크리트 등 6개 기업이 있다.
 
□학교
 
<감문중학교> 감문면 삼성리 676번지에 위치한 감문중학교는 1953년 2월 18일 9학급 설립인가를 받아 그 해 4월 23일 개교한 공립중학교. 개교 2년 뒤인 1955년 4월 30일 준공식을 가진 본관은 석조 건물에 청기와지붕이다.
경북도교육청 지정 자율학교와 작은학교가꾸기 시범학교를 운영한 감문중은 학교경영평가 우수교, 학력향상 우수교 등으로 선정된 바 있으며 2015년 현재 62회에 걸쳐 7천776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위량초등학교> 감문면 금라리 725번지에 위치한 위량초등학교는 1932년 9월 8일 위량공립보통학교로 개교했다. 1991년 3월 1일 병설유치원을 개원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1994년 3월 1일 감문국민학교를 흡수 통합한데 이어 이듬해 3월 1일 도명국민학교를 흡수 통합하고 1996년 3월 1일 위량초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했다.
2013년 3월 1일 곡송초등학교와의 통합으로 면 내 유일의 초등학교가 됐으며 2015년 현재 80회에 걸쳐 5천256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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