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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모면 지도 |
ⓒ i김천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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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음동으로부터 상주방면 국도와 경북선 철도를 따라 남북으로 길게 전개돼있는 어모면은 삼한시대에 어모국(禦侮國)이라는 소국이 있었음으로 해서 얻어진 지명이다.
어모지역 주민들 사이에서는 “여산(余山)이 망해 아산(牙山)이 되고 아산이 망해 김산(金山)이 됐다”는 구전이 내려오는데 여기서 말하는 여산은 문무국(文武國)으로 지금의 감문면 문무리에 있었다는 소국을 말함이며 아산은 지금의 어모면 중왕리 일대에 있었다는 어모국을 일컫는 것이다. 또 김산은 김산군의 읍치(邑治)였던 지금의 교동일대를 일컫는 것으로 이를 통해 문무, 어모, 김산이 그 상이한 연차(年差)에도 불구하고 지리적 근접성에서 기인한 역사적 공통점을 찾아 볼 수 있다. 어모국은 관련자료가 거의 없어 그 실체를 확인할 수는 없으나 추정하기로 감문국과 대등하거나 속국의 형태로 일정기간 읍락국가를 유지하다 231년 신라에 의해 감문국이 토멸될 때 함께 멸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삼국이 통일된 후인 687년(신문왕7년)에 사벌주 감문군 금물현(今勿縣)에 편입되고 757년(경덕왕16년)에 상주 개령군 어모현으로 개칭됐다.
고려시대에 인근 지례현, 김산현이 경산부(京山府)로 이관될 때에도 개령군과 함께 어모현의 상주목 관할은 조선 초까지 유지됐다. 조선시대에 정종임금의 태(胎)를 직지사 북봉에 안치(1399년)했다 해서 김산, 어모 두 현을 합해 김산군으로 승격한 이후 줄곧 김산군 관할의 천상면(川上面), 천하면(川下面), 구소요면(求所要面)으로 됐다. 이후 1920년 천상, 천하면을 합해 아천면으로 고치고 1934년에 아천과 구소요면을 합해 어모면으로 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어모면의 마을
산업단지 조성으로 발전하는 남산리
김천시내로부터 어모면으로 들어서 첫 번째 만나는 마을은 남산(南山)1리에 속하는 상남과 남산3리인 지산, 광야(너번들)로 1416년 이후 김산군 천상면에 속해 있다가 1920년 아천면 남산동이 됐다.
옛 국도3호 선변에 예전에는 너번들, 지산(池山), 모산이라 불리는 마을이 있었다가 산업단지 부지조성 공사로 너번들과 모산마을이 폐동되고 주민들이 인근의 금산아래에 터를 잡고 이주해 새로운 마을이름을 금산(金山)이라 지었다.
언제 축조됐는지는 알 수 없는 등등못, 등대지, 한지, 대야지 등으로 불리는 큰 못이 있어 못지(池)자를 써서 지산(池山)이라 했다고 하며 모산으로 불리는 것은 못 안에 마을이 있어 못안이라 부르다가 변한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이 못은 옛날 이 마을에 판서를 역임한 권세가가 살았는데 아들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해 집안이 번창하자 나라에서 역심을 품을까 의심해 살던 집을 헐고 못을 파서 연못으로 만들었다. 못 이름도 아들이 모두 등과(登科)했다 해서 등등지(登登池), 등과한 집터에 못을 팠다 해서 등대지(登垈池)로 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상남마을은 1920년 천상면과 천하면이 합해 아천면이 될 때까지 천상면의 소재지였으며 남산동에 속한 마을들 중에서 위쪽에 있다고 상남(上南)이라 했다.
상남마을 옆으로는 하남(下南)이라 불리는 큰 마을이 나오는데 하남과 마을 뒤의 길계(吉溪)는 남산2리에 속한다.
하남마을은 옛날 본관을 알 수 없는 노씨(盧氏)가 처음 들어와 살았다고 알려져 있는데 1610년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낸 김해김씨 김립(金)이 김해에서 이주해오면서부터 마을이 형성되었고 이후 1890년에 정선전씨 전복연(全福淵)이 이주하고 또 경주이씨 일가가 들어왔다고 하는데 오늘날까지 감천의 대표적인 김해김씨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편강열의사의 민족혼이 서린 다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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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청계 버드나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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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남마을을 지나 개령면과 접하고 있는 다남리(多男里)는 동산, 진목, 도동, 오청계 등 크게 네 마을로 이뤄져있다.
다남(多男)이라는 지명은 1920년 천상면과 천하면을 합해 아천면으로 할 때 최응룡(崔應龍) 초대 아천면장이 슬하에 아들이 없음을 한탄하며 동산, 진목, 도동, 오청을 다남(多男)리로 했다고 하는데 일설에는 이들 마을이 다른 마을보다 남자가 많아 다남이라 했다고도 한다.
동산이라는 지명은 어모현을 기준으로 동쪽에 있는 산이라고 마을 뒷산을 동산이라 했으며 마을이름도 산 이름으로 부터 비롯된 것이다. 인근 주민들 사이에서는 동사이로 불린다.
다남3리 도동(道洞)은 동산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자리 잡고 있는 작은 마을로 동산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있는 마을 앞산 도금산(道錦山)이 있음으로 해서 얻어진 지명인데 마을이 도금산의 모퉁이에 있다 해서 도금모리, 도구모리, 도고모리 등으로 불린다.
1700년대 초 마을이 처음 생기면서 부터는 새터, 신기(新基)로 불리며 인근 동산에 속했었는데 1914년 마을 유지들이 도덕을 높이자는 뜻에서 도동(道洞)으로 고쳤다.
도동과 멀리 마주하고 있는 진목(眞木)은 1590년대 이심(李沁)이라는 선비가 전국 십승지(十勝地)의 하나로 진목을 꼽았으며 성주군 가천면 만수동(萬壽洞)과 함께 임진왜란 때 피난처로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이 마을에는 예로부터 참나무가 많아 참나무골, 참남골로 불렀는데 뒤에 한자로 적으면서 참나무라고 하는 한자가 마땅하지 않자 참진(眞)자에 나무목(木)자를 써서 진목(眞木)이라 했다고 한다.
또 김천의 대표적인 독립투사인 편강열(片康烈 1892-1928) 의사가 1914년 선대의 고향인 이 마을에 은거하면서 인근마을의 청년 30여명을 모아 독립사상을 고취시키고 무술을 연마시키기도 했다.
오청계 마을에는 1820년대 천석을 수확하는 다섯 부자가 살았는데 마을 앞 하천 제방에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가 무성해 마치 다섯 부자를 상징하는 듯하다 하여 마을이름을 오청계(五淸溪)라했다고 전해진다.
용강산 미륵바위전설이 전하는 군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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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강산 미륵바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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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리(君子里)는 하덕, 덕림과 감문면 은림리 하군과 접하고 있는 평촌과 도로변의 원당 등 네 마을로 구성돼있다.
하덕마을은 마을 위에 있는 덕마1리인 상덕과 함께 원래는 덕용(德龍)이라 불렸는데 뒤에 마을을 나누면서 덕마1리는 위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상덕(上德)이라 하고 아래의 마을을 하덕(下德)이라 했다.
하덕 마을의 배후에는 해발 259m 용강산(龍岡山)이 솟아있는데 이 산 정상의 미륵바위와 관련한 유명한 전설이 내려온다.
감문면 은림리 상군에서 이 바위가 보이면 마을 처녀가 미치고 상덕에서 보이면 마을에 불이 나는데 유독 하덕에서 보이면 마을에 경사가 나 상군과 상덕마을 주민들은 흙을 쌓고 나무를 베지 않아 막히게 하고 하덕마을 주민들은 나무를 베고 흙을 파내어 잘 보이게 했다는 것이다.
감문면 하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평촌(坪村)은 중왕평야와 앞들, 구시내들로 이뤄진 넓은 들판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마을로 들에 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들마을, 들말이라고 했다.
들말은 원래 마을 동쪽 대나무숲 아래 감문면 구야마을이 보이는 지점에 있었다고 하는데 옛날 도적떼가 자주 출몰하자 1800년대 말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고 한다. 이 마을 앞들 어모천 옆에는 옥배미라 불리는 웅덩이가 있는데 이곳에 옛날 어모현에서 죄인을 가둬두던 옥(獄)이 있었던 장소라고 전해진다. 지금은 작은 웅덩이와 옥배미라는 이름으로만 옛 흔적이 남아있을 따름이다.
덕림이라고 하는 마을이름은 과거에 덕용이라고 불린 상덕과 하덕마을 아래에 숲이 울창해 덕림(德林)이라 했는데 음이 변해 들미기로도 불린다.
도로변에 있으면서 군자3리로 속한 원당(院塘)마을은 과거 어모현이었을 때 원님이 살았다 해서 붙은 이름으로 전한다.
말이 물을 마시고 갔다는 덕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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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못안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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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마리(德馬里)는 상덕, 못안, 갈마 등 세 마을로 구성됐는데 1934년 아천면과 구소요면을 합해 어모면으로 고칠 때 상덕의 옛 이름인 덕용(德龍)과 갈마(渴馬)에서 한 글자씩을 따서 덕마(德馬)라고 했다.
상덕이라고 하는 마을의 지명은 풍수지리로 볼 때 마을 뒷산 순박골이 용의 형상이라 아랫마을인 하덕과 함께 덕용(德龍)이라 했는데 뒤에 이 마을이 위에 있다 해서 상덕(上德)이라 했다고 한다. 상덕 아래에는 연화지라 불리는 저수지가 있는데 이 저수지 안쪽에 작은 마을이 있어 못의 안쪽 못안으로 불리는 마을이다.
상덕마을에서 갈말재를 넘으면 덕마2리로 속하는 평산신씨 집성촌 갈마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은 주변의 산세가 말이 물을 먹으려고 앞발을 모으고 머리를 숙인 형상이라 목마를 갈(渴)자에 말마(馬)자를 써서 갈마(渴馬)라 했는데 음이 변해서 갈말로 불린다.
이름난 효자 강우창을 배출한 옥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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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우창 정려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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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방면으로 가다보면 어모면소재지 못 미쳐 문당동 방면의 문암봉으로 이어지는 골짜기로 흩어져있는 노리기, 밤주골, 자랑내, 대밭양지 등 옥율리(玉栗里)로 속하는 네 마을이 있다. 진주강씨와 김해김씨 집성촌인 노리기는 107가구에 달하는 큰 마을로 옛날 강노옥(姜老玉)이란 선비가 장수하며 살았다고 마을이름을 노옥(老玉)이라 했다고 한다. 노리기라는 지명은 ‘나이가 많은 강씨노인이 사는 마을’이란 뜻으로 늙을노(老)자에 여윌리(羸)자를 따서 노리(老羸)라 부르던 것이 변음이 돼 노리기가 된 것이다.
노옥마을 입구에는 효자 강우창 정려각이 섰는데 강우창(姜遇昌)은 광해군 때의 이름난 효자로 부친이 병환에 들자 인분(人糞)을 맛보아 병의 경중을 헤아리고 병세가 위중할 때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리운 효자로 인근에 칭송이 자자했다. 부친의 사후 시묘살이를 할 때 얼마나 통곡을 했던지 산소의 흙이 눈물에 절어 짜고 무릎을 구부린 바닥에 깊은 구멍이 생겼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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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암사 석조아미타여래좌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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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뒤 문암산 배암골에는 무릎 아래 부분이 시멘트 속으로 묻혀져 있고 왼손은 잘려진 통일신라시대의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11호인 석조아미타여래입상이 있다.
노리기에서 내려오다가 현재 공사가 중단된 보건대학교 뒤로 난 길을 따라들면 산기슭에 밤주골, 율리(栗里)로 불리는 작은 마을이 나오는데 인근의 자랑내, 대밭양지와 함께 옥율2리에 속하는 마을이다.
율리라는 마을의 지명은 과거 김율(金栗)이 살면서 주변에 밤나무를 많이 심어 밤율(栗)자를 따서 율리(栗里)라 했고 밤을 줍는 골짜기란 뜻으로 밤주골이라고도 했다.
옛 어모국의 도읍지 중왕리
옥율리를 지나 국도를 따라 좌우로 자리 잡고 있는 중왕(中旺)1리는 아천(牙川)이란 지명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아천이라는 지명은 이 마을 앞에서 어모천이 굽이쳐 돌아간 형세가 어금니와 같아 어금니아(牙)자와 어모천의 천(川)자를 따서 아천(牙川)이라 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일대지도를 보면 어모천의 형세가 U자형으로 굽어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아천은 크게 서명골, 넘박골, 용왕골, 마랏들 등 네 구역으로 나눠져 있는데 서명골은 현 문화마을 일대로 마을뒷산(애기바위산)을 배후로 마을 앞의 어모천이 관류하는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명당터로 알려져 있다.
용왕골은 옛날 한 선비가 샘을 팠더니 흰빛을 띤 물이 솟아 용왕의 물이란 뜻으로 용왕골이라 했으며 용왕골 입구에 자리 잡은 아천초등학교는 행사를 할 때마다 비가 내려 사람들은 기이하게 여긴다고 한다.
봉하곡은 옛날 삼한시대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어모국(禦侮國)의 중심지로 신라시대 때 어모현이 설치된 이래 직지사 북봉에 조선 2대 정종 임금의 어태(御胎) 봉안으로 어모현이 김산현과 합해져 김산군으로 될 때까지 존속했던 어모현의 읍치(邑治)로 알려져 있다.
봉하곡의 원래 지명은 어모현이 있음으로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조선시대에 들어 현(縣)의 중심이라 해서 중중리(中中里)라 했다. 나중에 마을 뒤에 봉하산(鳳下山)이 있다해서 봉하곡(鳳下谷)이라 하다가 변음이 돼 봉앗골이 됐다.
백호산 명당이야기가 전하는 동좌리
아천 어모면사무소를 지나 국도를 따라 1km 남짓 가다보면 좌측으로 늘어선 마을이 마존(麻存), 마지미로 불리는 동좌(東佐)1리이다.
마존, 마지미라는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마을뒷산인 애기바위산과 중왕리와의 경계를 이루는 안산, 또 맞은편의 청룡산 등 마을이 여러 산 사이에 위치해 산을 뜻하는 ‘뫼’자와 언저리, 사이를 뜻하는 ‘지미’를 합해 뫼지미라 했는데 변음이 돼 마지미가 되었고 일제시대 때 이를 억지로 한자로 적으면서 음이 비슷한 마존(麻存)이라 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마지미(痲存)로 부터 국도를 따라 상주방면으로 가다가 은기리로 들어가는 초입의 도로변에 자리 잡고 있는 마을이 동좌2리 동리(東里)이다.
마을의 지명인 동리는 은기리에서 볼 때 동쪽에 있는 산, 즉 두껍산의 동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동쪽마을 이란 뜻의 동리(東里)라 했다고 한다.
마을 뒷산은 두꺼비가 웅크리고 있는 형세라 하여 두꺼비섬(蟾)자를 써서 섬산(蟾山), 두껍산이라 하는데 실제 국도변에서 보면 두꺼비와 비슷하다.
과거에는 동리와 마지미 사이에 배로 사람들을 건네주던 뱃사공이 살던 좌동(佐洞) 또는 배다리로 불리는 작은 마을이 있었는데 지금은 폐동이 되고 집터만 남아있다.
느티나무로부터 국도를 건너 맞은편으로는 어모중학교와 2007년 2월 폐교된 어모초등학교가 이웃해 있는데 학교가 들어선 일대는 다른 지대보다 많이 낮아서 ‘깊은지이’로 불리는데 김천, 상주간 도로변을 따라 마을이 형성되고 우물과 장승도 있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옛날 금오산의 한 도사가 이곳을 가리키며 금붕어 천 마리가 노닐고 만 명이 살만한 터라고 예언했다는 전설이 전한다.
봉항새의 목에 자리잡은 은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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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항마을 상징인 봉황새 조형물 |
ⓒ i김천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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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기리(銀基里)는 난함산을 배후로 은기천을 따라 차례로 늘어선 신기(新基), 은석(銀石), 봉항(鳳項) 세 마을을 일컫는데 조선시대까지 김산군 구소요면(求所要面)에 속했고 1914년 신기, 은석, 중리(中里), 봉항 네 마을을 합해 은석의 은(銀)자와 신기의 기(基)자를 따서 은기동(銀基洞)이라 했고 뒤에 중리는 봉항마을로 합쳐졌다.
마을 앞에는 와룡지(臥龍池)라는 저수지가 있는데 지네에 얽힌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 와룡지로부터 신기, 은석마을까지의 형세가 풍수지리로 볼 때 지네형인데 옛날 저수지 자리에 큰 부자가 살았다는 것이다. 어느 날 시주를 받으러 찾아온 고승을 박대했고 이에 화가 난 스님이 지팡이를 끌며 부잣집으로 이어지는 혈맥을 끊었다는 것이다. 결국 그 부자는 망하고 집터는 저수지가 됐다고 한다.
신기마을 위쪽의 은석은 마을일대의 바위 색상이 대부분 은색을 띠고 있어 은색바위란 뜻으로 은석(銀石)이라 했다고 하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변음이 돼 지금은 인수골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마을 뒤에는 은동폭포가 있는데 수십 미터가 하나의 암반으로 이뤄진 유명한 폭포로 은석마을의 명물이었으나 1992년 갓골 저수지 축조공사 때 도로를 확장하면서 절반 가까이 훼손됐다.
봉항마을 뒷산인 난함산(卵含山)은 봉황새가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라 해서 얻은 산 이름인데 이 마을이 봉황의 목에 해당한다고 봉황새 봉(鳳)자에 목항(項)자를 써서 봉항(鳳項)이라 했다.
봉항마을 아래에는 중리(中里)로 불리는 작은 마을이 있는데 지금은 봉항으로 속하게 된 마을로 풍수지리로 볼 때 소가 누워있는 와우형(臥牛形)인지라 와우촌(臥牛村)이라고도 불리다 세월이 흐르면서 소내라 했다.
소내마을의 주민들이 식수로 사용했던 쌍샘은 인근 주민들의 식수원이었는데 물맛이 좋기로 유명했다. 상수도가 보급된 후 방치되다가 2009년 살기 좋은 마을가꾸기 사업을 통해 약수터로 단장되면서 면모를 일신했다.
옛 구소요면의 중심 도암리
동리를 지나 1km 남짓 상주방면 국도를 따라가다가 좌회전해 철길을 넘으면 구시리 또는 비점(飛店)으로 불리는 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은 1416년 구소요면(求所要面)의 면소재지가 된 이래 1934년 구소요면과 아천면이 통합돼 어모면이 되고 면사무소가 아천으로 옮길 때까지 구소요면의 면사무소가 있었다. 1950년대 초까지 옹기를 생산하던 옹기점이 있었는데 비점(飛店)이라는 마을의 지명도 이 옹기점에서 비롯됐다. 구소요면의 소재지였던 관계로 구소요리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음이 변해 구시리로 불리게 됐다고 한다.
구시리 위에는 도암2리로 속하는 본리(本里)와 빈지바우 또는 빈암(彬岩)으로 불리는 마을이 나오는데 두 마을은 총46가구 중 20가구가 김해김씨로 집성을 이루고 있다.
본리는 도암리에서 가장 먼저 생겨 원래부터 있던 마을이란 뜻이다. 빈암은 마을 뒤 난함산의 바위 절벽이 햇빛에 반사돼 빛이 난다고 빈지바위라 했는데 이를 한자로 적으면서 빛날빈(彬)자에 바위암(岩)자를 써서 빈암(彬岩)이라 했다. 마을 뒤 난함산 범잡골에서는 호랑이가 자주 출몰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한 주민이 나무를 하러 갔다가 호랑이에게 다리를 물려 봉변을 당할 뻔 했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진다.
예절을 숭상하는 아홉 마을 구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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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흥안씨 효자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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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리(求禮里)는 도암리로부터 국도3호선을 따라 상주 공성면의 경계인 여남재에 이르기까지 길게 펼쳐져 있는 신풍, 하현, 상현, 중현, 신현, 송정, 두원, 여남, 유점 등 아홉 마을을 일컫는다.
신풍은 홍수로 마을이 매몰됐다가 새로 마을을 재건하면서 ‘새롭게 풍요로운 마을을 이루자’는 뜻으로 새신(新)자에 풍요로울 풍(豊)자를 따서 신풍(新豊)이라 이름 했다고 한다. 하현(下峴)마을 뒷산 명당터에 옛날 사사절이란 이름의 절이 있었는데 명당으로 이름이 났다. 상주의 봉대라는 곳에 살던 강씨 집안에서 초상이 나자 명당터를 차지할 요량으로 가짜 상여를 만들어 절 아래에서 진입을 시도하는 척하자 이를 막기 위해 스님들이 모두 절 아래로 모인 틈을 이용해 진짜 상여를 감문 문무리 쪽에서 넘겨와 관을 절 마당에 묻었고 이후 스님들은 모두 절을 떠나 폐사가 됐다는 것이다.
상현마을에는 1883년에 죽포(竹圃) 안정익(安廷益)이 세운 이현서당(二峴書堂)이 있었는데 그의 아들 안효종(安孝鍾)이 뒤를 이어 강학해 감문면 문무리와 어모면 일대의 학동 300여명이 이 서당을 거쳐갔다고 한다.
활안봉 기슭에는 이름난 효자비가 둘 섰는데 순흥안씨와 경주손씨 효자비가 그것으로 후손들은 자랑스러운 조상이라며 자부심이 대단했다.
두원이라는 지명은 현재 두원역에서 능치로 들어가는 입구부분의 냇가인 파두천(芭豆川)건너편 붕어산 옆에 조선시대의 관용 숙소인 파두원(芭豆院)이라는 원이 있음으로 해서 얻어진 지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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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주임씨 열려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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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원역 맞은편 두원교회 앞에는 나주임씨 열녀비가 있는데 나주임씨는 호조참판으로 증직된 백수권(白守權)의 처(妻)로 남편의 유언에 따라 다섯 남매를 홀로 키우며 모두 출가시킨 후 스스로 목숨을 끊어 1876년(고종13년) 나라에서 정려가 내렸다.
여남이라는 지명은 중국의 용문산(龍門山) 아래에 있는 여남(汝南)의 지명을 따서 인근의 상주 공성면과 경계를 이루는 용문산 아래에 이 마을이 있다는 점에 착안해 여남으로 했다고 전해진다. 또 유점은 마을 뒤 점지골(店地谷)에서 유기(놋)그릇을 생산했다고 놋쇠유(鍮)자를 따서 유점이라 했다고 하는데 달리 놋점으로도 불린다.
여남마을은 상산김씨 집성촌답게 충의재(忠毅齋)와 율수재(聿修齋) 등 규모 있는 재실이 둘 있는데 특히 충의재는 고려 말 공민왕 때의 공신인 문충공(文忠公) 김득배(金得培)장군을 추모하기 위한 것이며 마을 뒤로는 장군의 제단비가 웅장하게 서 있다.
여남재로 알려진 고개의 원래지명은 ‘왜넘이재’로 임진왜란 때 김천을 함락한 왜병 중로군(中路軍) 휘하부대가 이 고개를 넘어 북진했다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한자로는 왜국왜(倭)자에 넘을유(踰)자를 따서 왜유령(倭踰嶺)이라 했다.
구슬 같은 계곡에 자리 잡은 옥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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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륵불 |
ⓒ i김천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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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원에서 용문산방면으로 골짜기를 따라 들어가다 보면 도로와 옥계천을 사이로 두고 좌우로 사이좋게 늘어선 마을이 나오는데 봉대, 강변, 사촌, 평성, 미륵당으로 모두 옥계리(玉溪里)에 속한 마을이다.
미륵당은 냇가를 중심으로 윗마을, 아랫마을로 나눠진 한가롭고 평온한 마을이라 해서 한계(閑溪)로 불리기도 했는데 미륵대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미륵당이라는 마을이름은 마을 뒤 새암골 무야사(無也寺) 절터에 미륵불상이 있음으로 해서 얻어진 지명인데 이 미륵불에 불공을 드리면 영험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어 1950년대까지 기도객이 넘쳐났었다고 한다.
이 불상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불상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높이가 2.4m정도로 하반신 일부가 매몰돼 있는 점을 감안할 때 전신이 3m에 달하는 큰 규모의 입석불이다.
전반적으로 훼손이 심한데 특히 두상의 안면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데 6·25 전쟁 때 북으로 철수하던 인민군들이 기관총으로 불상을 난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평성(坪城)은 마을뒷산이 성곽과 같이 둘러싸여 있다고 붙여진 이름이며 사촌(沙村)은 옛날 홍수로 모래밭이 생긴 후 그 위에 마을이 생기면서 모래마을이라 했다가 이것을 한자로 적으면서 사촌이라 했다.
또 봉대는 옛날 마을 뒷산에 황새가 많이 살아 봉대(鳳臺)라 했다고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옛날 마을 뒷산에 봉화대가 있어 봉대(烽坮)라 했다고도 한다.
강변(江邊)은 옥계천 옆에 마을이 있어 강변마, 갱변마 등으로 부르다가 강변이 됐다는데 지금은 봉대로 통칭되고 있다.
용문산 아래 첫 마을 능치리
옥계리로부터 능치천을 따라 이어져있는 능치리(能治里)는 능청, 능점, 도치량, 용문산 등 네 마을로 이뤄져 있다.
능치(能治)라는 지명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능점(能店)의 능(能)자와 도치량(道治良)의 치(治)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능청(能靑)이라는 지명은 능점마을 동쪽에 자리 잡아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항상 푸르다 해서 능청이라 했다고 한다.
소태말장으로부터 조금 내려와 도로를 건너면 능치천의 가장 아름다운 절경지로 꼽히는 옥소(玉沼)가 있는데 옛날 선비들이 이곳에 모여 시를 짓기도 하고 광대를 불러 양 계곡에 줄을 매어 줄타기 곡예도 벌였다고 한다.
능청과 이웃하고 있는 능점(能店)마을은 오래전부터 도요지가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능점이라는 마을의 지명은 옛날 도자기를 생산하는 도공들이 모여 살면서 능히 한 마을을 이뤘다는 뜻이라고 한다. 도치량(道治良)은 옛날에 옻나무가 많아 이를 채취해 살았다는데서 유래된 이름이며 칠도(塗)자에 옻나무칠(漆), 행랑채랑(廊)자를 써는 도칠랑(塗漆廊)이라는 공방이 있어 마을이름도 도칠랑이라 했다고 한다.
도치량 위의 용문산 마을은 옛날 절과 민가 몇 집이 있어 용문산(龍門山)마을로 불렸는데 1940년 나운몽 목사가 들어와 용문산(容門山)으로 고치고 신앙촌을 형성했다.
□어모면의 산
용문산
상주시와 충북 영동군, 김천시와 경계를 이루는 해발 710m의 용문산(龍門山)은 상주시 공성면 큰 재로부터 어모면 능치리 작점고개에 이르기까지 국수봉, 민영봉 등 많은 봉우리를 거느린 백두대간에 놓인 묵직한 산이다.
용문산이라는 지명에 대해서는 정확한 유래를 알 수는 없으나 일설에는 1800년대 박송(朴松)이라는 선비가 중국의 용문산과 형세가 닮아 붙였다고 한다.
그러나 원래 이 산의 명칭은 주봉인 국수봉(鞠水峰)이 곰과 관련된 풍수지리에서 기원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용문산과 국수봉을 통칭해서 상주시에서는 곰실, 웅산(熊山)이라 불렀고 영동군 추풍령면의 용문산아래 첫 마을을 곰뒷마을 또는 웅북(熊北)이라하고 상주시 공성면 장동리 서당마 뒷산이 곰의 발바닥을 닮았다고 발바닥 장(掌)자를 써서 장동(掌洞)이라 했다는 것이 단적인 증거이다. 또 국수봉 정상에는 웅신단(熊神壇)터가 남아있기도 하다. 이것은 우리나라에는 곰과 관련된 건국 설화와 곰을 신성시하는 민간신앙이 전해져왔고 풍수지리적으로 용문산 일대가 곰의 형상이라는 사실과도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역사적 스토리가 받아들여져 국토지리정보원 국가지명위원회에서는 2012년 5월 18일 국수봉을 웅이산(熊耳山)으로 변경하기에 이르렀다.
난함산
옛 문헌에 흑운산(黑雲山)으로 기록돼 있는 난함산(卵含山)은 해발 733m로 어모면 은기리와 봉산면 인의리, 상금리, 광천리,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 작점리 등에 걸쳐있는 산이다. 풍수지리로 볼 때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라 알난(卵)자에 품을함(含)자를 써서 난함산이라 했다고 전한다. 옛날 김산군의 진산인 오파산(구화산)이 문암산을 통해 이 산을 주산으로 삼았으며 신음동 달봉산으로까지 이어진다. 또 극락산으로 이어져 봉산면 인의리, 신리, 예지리 즉 봉계를 감싸 안았는데 봉산면의 봉산과 봉계, 봉암서당, 어모면 은기리 봉항마을 등의 봉황새와 관련된 지명들이 모두 난함산으로부터 연유됐다.
‘금릉승람’에는 “흑운산은 군 북쪽 20리에 있는데 산 위에 복침사가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조선환여승람’에도 “흑운산은 군의 북쪽 30리에 있다”라고 적고 있다.
난함산은 인근에 추풍령과 작점고개 등 요충지에 위치하고 일대 조망권이 탁월해 일찍이 정상부에 군사시설이 설치됐다가 지금은 한국통신 기지국으로 운영되고 있다.
□어모면의 문화유산
은기리 마애반가보살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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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8월7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47호로 지정됐으며 어모면 은기리 은석마을(인수골) 뒤 산자락 바위절벽(높이 4m, 넓이 8m)에 있다.
수직의 평면바위에 조성된 고려 초기 작품으로 높이 2.9m의 양각한 마애(磨崖, 바위 절벽에 새긴)보살상이다. 머리에는 삼산관(三山冠, 세개의 산처럼 솟아오른 모양의 모자)을 쓰고 오른쪽 어깨에 법의(法衣, 승려들이 입는 예복)을 걸치고 연화대좌(蓮花臺座)에 앉아 오른발을 왼쪽무릎에 얹은 반가상(半跏像, 책상에 앉은 자세에서 한쪽다리를 무릎위에 올린)이다.
수인(手印, 손모양)은 오른손을 오른쪽 무릎 위에 손등이 보이도록 가볍게 얹었으며 왼손은 손바닥이 보이도록 왼쪽 무릎 위에 놓았다.
□어모면의 특산물
전국에서 알아주는 어모배·복숭아·사과
어모의 특산물은 포도, 배, 복숭아, 사과 등 네 가지. 이 가운데 생산량으로는 포도가 가장 많다. 지난 한해 다남리, 구례리를 중심으로 387농가가 196ha에서 1천360톤의 포도를 생산했으며 김천관내에서 가장 많이 재배되는 배는 남산리를 중심으로 345농가가 109ha에서 1천170톤을 생산, 전국 소비자들로부터 호평을 받고 있다. 은기리, 도암리를 중심으로 재배되는 복숭아 역시 170농가가 80ha에서 520톤을 생산했고 사과는 능치리를 중심으로 66농가가 40ha에서 420톤을 생산, 이 지역 경제의 효자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한편 은기리는 지명이 예쁜데다 4월이면 복숭아꽃이 장관이어서 관광상품화해도 성공할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보인다.
□어모면의 산업체
벽진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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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모면 구례리 781번지에 위치한 벽진산업은 용접재료, 각종 요업원료, 기능성분말을 생산, ㈜세아에삽, 조선선재(주), 현대종합금속(주) 등에 납품하는 업체로 종업원이 27명에 이른다.
1974년 3월 설립돼 1992년 6월 현 장소로 공장을 이전, 오늘에 이른 벽진산업은 2000년 8월 이명자 대표가 취임하던 그해 유망중소기업에 지정(한국원자력연구소장)되고 유망선진기술기업에 지정(중소기업청장)되는 등 최고의 경쟁력을 갖춘 기업으로 성장했다. 또한 기술개발실을 신설하는 등 조직을 개편, 2년여 동안 6억3천만원의 연구개발비를 투입해서 신제품 개발에 성공했다.
현재 경상북도여성기업인협의회 회장을 맡고 있는 이명자 대표는 우수한 품질의 제품을 저렴한 가격에 공급하는 등으로 회사를 500% 이상 신장시켜 2014년 3월 상공의 날 산업포장을 받았다.
벽진산업은 사람우선의 경영방침을 토대로 소통과 대화를 통해 노사간 문제를 사전에 방지하고 IMF 등 어려운 시기에도 가족처럼 함께 의지할 수 있는 믿음을 만들어 나가는 한편 연구개발, 설비투자로 기술경쟁력을 높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편 어모면 관내엔 두양산업(주), 한국에스엠티(주), 주식회사 이솔, ㈜제이에이치케미칼, 코오롱생명과학 등 일반산업단지에 소재한 10개 기업 외 ㈜영해식품, ㈜베스트엔지니어링, ㈜지앤씨, KMS, 농업법인(주)새금강비료 등 9개 기업이 국가와 지역경제에 이바지하고 있다.
□어모면의 학교
<어모중학교>
어모면 동좌리 동좌리 516번지에 위치한 어모중학교는 1968년 12월 3일 인가를 받아 이듬해 6월 7일 개교한 공립중학교로 2011년 8월 25일 주5일 수업제 시범학교를 운영한데 이어 2013년 3월 1일 작은학교가꾸기 사업에 선정돼 2015년 2월 28일까지 운영했다. 2015년 현재 44회에 걸쳐 4천620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아천초등학교>
어모면 중왕리 735번지에 위치한 아천초등학교는 1923년 5월 1일 4년제 공립학교로 인가를 받아 1923년 11월 3일에 개교했으며 1929년 4월 1일에 6년제 공립보통학교로 승격했다. 1941년 4월 1일 아천국민학교로 개칭했고 1996년 3월 1일 아천초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했으며 2007년 3월 1일 어모초등학교가 통폐합됐다. 2015년 현재 89회에 걸쳐 6천829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능치초등학교>
어모면 능치리 152번지에 위치한 능치초등학교는 1938년 7월 5일 능치간이학교 설립 인가를 받아 그해 10월 2일 1학급을 편성, 개교했다. 1944년 6월 1일 구례국민학교가 통폐합됐고 1948년 7월 1일 능치국민학교 설립 인가를 받아 1948년 10월 2일 개교했으며 1996년 3월 1일 능치초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했다. 2015년 현재 제64회에 1천449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