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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기획시리즈

김천의 어제와 오늘<7> 봉산면(鳳山面)편

권숙월 기자 입력 2015.04.22 21:44 수정 2015.04.22 09:44

영남의 관문 추풍령을 품은 천혜의 교통요충지
인의예지신, 유학의 이념 담은 충효의 고장

ⓒ i김천신문

충북 영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봉산면은 경부선 철도와 고속도로가 면을 관통하고 있는 교통의 요지로서 추풍령은 영남의 관문이 돼왔다.
조선시대에는 김산군에 속한 상·중·하리 즉 인의리, 예지리, 신리와 송정 등 네 마을이었는데 1914년 충북 영동군 황간면이었던 덕천, 복전, 태화, 상금, 신암, 광천 등이 경상도로 편입되면서 김천군 봉산면이 됐고 1973년 복전동이 대항면으로 이관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김산군 관아가 있던 교동과 인접하고 있으며 봉계는 예로부터 이 지방의 대표적인 반촌으로 창녕조씨와 영일정씨, 서산정씨 등의 문중을 중심으로 많은 인물이 배출됐다.
또한 정승바위와 분통골, 황울산 전설을 비롯한 유서 깊은 전설과 효자 조응방, 열부 영천이씨부인의 정려각이 세워진 효열의 고장이다.
    
□봉산면의 마을

봉계의 첫 마을 신리
↑↑ 신리마을
ⓒ i김천신문
 
신리(信里)는 봉계천을 따라 좌우로 펼쳐진 속칭 봉계로 통칭되는 큰 마을의 첫 마을이다.
봉계는 원래 고려말 서산정씨가 가장 먼저 들어와서 마을을 개척하고 집성촌을 이룬 것으로 전하는데 뒤에 창녕조씨와 연일정씨가 차례로 입향해 집성촌을 형성하고 많은 인물과 부호를 배출해 이 고장의 대표마을로 발돋움을 하는데 이것은 풍수지리에 의한 일대의 지형이 명당터에 자리 잡은 결과라고들 한다.
봉계는 봉황이 물 위에 떠있는 봉황부유형(鳳凰浮遊形)의 명당으로 꼽힌다. 중앙의 주산은 봉황이 알을 품고 있다 해서 이름 붙여진 난함산(卵含山)이며 문암산(門岩山)과 극락산(極樂山)이 좌우를 호위하고 직지천 너머의 덕대산이 안산의 역할을 한다.
옛날 지금의 봉산면사무소에서 봉계초등학교 앞으로 소나무와 버드나무숲이 우거져 숲, 쑤, 솔바께 등으로 불리는 울창한 나무숲이 있었는데 이것은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인 난함산을 가려주는 동시에 마을의 기가 일시에 직지천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한 비보책이었던 것으로 지금도 면사무소 일대를 송정으로 부르며 몇 그루의 소나무가 남아있다.
마을입구에는 영천이씨 정려각이 있다. 영천이씨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공을 세운 영일정씨 정유한(鄭維翰)의 처로 1598년 정유재란 때 봉계 뒷산으로 피난갔다가 왜적에게 붙잡히게 되자 정절을 지키기 위해 자결했고 지역 유림의 상소로 1633년(인조 11년) 나라에서 정려가 내리고 이듬해 정려각이 세워졌다. 또 정려각 앞에 우물을 파서 절의천(節義泉)이라 이름하고 물을 마시면서도 영천이씨의 절개를 생각하며 본받게 했다.
봉산면사무소가 있는 송정마을에는 조선시대 말 효자로 이름난 창녕조씨 조응방(曺應邦)의 정려각이 있는데 조응방은 앉은뱅이였던 부친을 극진히 봉양하며 병환을 고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고 부친상을 당하자 3년간 시묘해 1875년(고종 12년) 지역유림의 청원으로 정려가 내리고 정려각이 세워졌다.
↑↑ 조응방 정려각
ⓒ i김천신문

    
매계 조위의 고향마을 인의리
↑↑ 황산댁(나화랑 생가)
ⓒ i김천신문

인의리(仁義里)는 인의동, 직동, 새터 등 세 마을로 돼있다. 이들 마을은 고려 말 서산정씨와 창녕조씨, 영일정씨가 차례로 입향해 세 가문이 집성촌을 이루며 살았다.
명문가로 명성을 떨치던 서산정씨가 타처로 대부분 떠난 사정과 관련한 분통골의 유명한 전설이 전해진다.
인의동 북쪽 극락산 자락에 고려 말 역성혁명에 반대하며 벼슬을 버리고 이 마을로 다섯 아들을 거느리고 낙향한 부성부원군 정윤홍(鄭允弘)이 유언으로 극락산 분통골에 자신의 묘터를 잡고 관을 11개 묻으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를 가볍게 들은 자손들이 한 개쯤 덜 묻으면 어떠랴하고 10개의 관만 묻었는데 이후 서산정씨 가문은 번창하게 됐고 이를 경계한 조정에서 그 전후사정을 알아보니 부성부원군의 묘자리가 명당인데서 비롯됐다며 관을 파보게 했다.
묘를 파헤쳐 보니 연이어 아홉 개의 빈 관이 나왔고 지친 관리들이 포기하려다 마지막 한개만 더 파서 10개를 채우자며 10개째 관을 열어보니 뽀오얀 김이 서리며 학 한 마리가 날아 나왔다는 것이다.
이후 서산정씨 집안이 차츰 쇠락해져 마을을 떠났다고 하는데 당초에 유언한 대로 11개의 관을 모두 묻었더라면 진짜 관은 보존되고 명당의 음덕을 입은 집안도 계속 번창했을 것이라며 한 개의 관을 더 묻지 않을 것을 생각하면 분통이 터진다 해서 이 골짜기를 분통골이라 부른다고 전해진다.
이후에 창녕조씨 조심(曺深)이 입향해 창녕조씨 집성촌을 이뤘는데 조위(曺偉), 조신(曺伸) 등 당대의 걸출한 문장가를 배출했다.
인의마을로부터 한참을 더 들어가 보면 인의2리로 속하는 직동과 새터가 자리 잡고 있다. 옛 지명으로는 상리(上里), 직동 등으로도 불리는 이 마을은 창녕조씨와 영일정씨의 집성촌으로 조선 숙종 때 통훈대부 정만용(鄭萬容)의 둘째아들인 파계(巴溪) 정낭수(鄭郎洙)를 봉계마을의 가장 윗마을로 분가시켰는데 인의마을로부터 곧장 올라가서 터를 잡았다 해서 직동(直洞)이라 했다고 전해진다.
인의리 마을 안쪽에는 황산댁으로 불리는 고택이 있는데 형제 작사, 작곡가로 이름을 날린 고려성(본명 조경환)과 나화랑(본명 조광환)이 출생한 생가이기도 하다.
고려성은 백년설이 부른 ‘나그네설움’을 작곡했고 나화랑은 ‘닐리리맘보’, ‘무너진 사랑탑’, ‘청포도사랑’, ‘열아홉 순정’ 등을 작사해 대중음악계를 풍미했다.
    
봉암서당이 있는 봉계의 중심 예지리
↑↑ 정승바위
ⓒ i김천신문

예지리(禮智里)는 신리와 인의리 사이에 놓인 예지마을과 봉계천 너머의 면사무소가 있는 송정일부, 그리고 극락산을 사이로 떨어져있는 율리, 내입석, 외입석 마을을 일컫는다.
예지1리 중앙에는 봉암서당(鳳巖書堂)이 있는데 1540년(중종35년)에 영일정씨 문중에서 자제교육을 위해 건립한 유서 깊은 서당이다.
송정을 지나 고속도로변의 지방도를 따라 한참을 가다보면 우측으로 율리와 외입석, 내입석 세 마을로 형성된 예지2리가 나온다.
도로변의 율리는 원래 직지천변에 있던 마을인데 1936년 병자년수해 때 마을이 유실되자 밤나무 숲이었던 현재의 자리로 옮기면서 밤율(栗)자를 써서 율리(栗里)라 했다고 한다. 율리를 지나 극락산자락에 위치한 입석마을은 정승바위를 경계로 안쪽마을을 내입석, 바깥쪽 마을을 외입석이라 했는데 지금도 양 마을 입구에 1m 남짓한 돌이 세워져있어 입석이라는 마을지명의 유래를 짐작하게 한다.
이 마을은 원래 광주이씨(廣州李氏)가 들어와 살면서 입향을 기념해 돌을 세웠다고 하는데 일설에는 충청도와 경상도를 구분하는 표지석으로 세워졌다고 한다. 즉 내입석(立石)은 경상도, 외입석은 충청도 땅이었다는 것이다.
특히 내입석 마을은 정승바위 전설로 유명하다. 이 전설은 조선 성종 때 판서와 우의정, 영의정을 차례로 역임한 이극배(李克培)가 주인공인 것으로 구전되고 있는데 부인 김씨가 벼슬살이로 객지에 나가 있는 남편과 떨어져 내입석에 살면서 남편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사무쳐 어느 날 스님에게 시주를 하며 남편이 돌아올 수 있는 방도를 물었다는 것이다.
이에 스님이 마당에 있는 연못에 소금 석 섬을 뿌리고 마을입구에 튀어나온 바위를 깨트리라고 해서 그대로 따랐는데 소금을 뿌리자 연못에 살던 학이 산 너머 봉계로 날아가고 사흘 후 남편이 사망했다는 전갈이 왔다. 바위를 깨트린 탓에 남편의 상여(喪輿)가 쉽게 들어올 수 있었다고 하는데 사람들은 부인의 욕심 탓에 마을의 보물인 정승바위가 사라졌다며 안타까워했다.
당시 숙부인이 살던 집이 처마가 두 겹으로 이뤄진 이층집이었는데 그 집터가 농지로 변했지만 주민들은 지금도 이 일대를 이층들이라 부르고 있고 당시 숙부인이 소금을 뿌렸다는 연못의 일부도 남아있다.
    
낙고개 전설이 전하는 덕천리
덕천리(德泉里)로 속하는 용배마을은 조선중엽에 형성됐는데 마을을 지나던 한 스님이 주변 산세를 보고 “용의 등과 같다”고 해서 용용(龍)자에 등배(背)자를 써서 용배(龍背)라는 마을이름을 얻게 됐다고 한다.
예로부터 어른들이 마을이 용의 등에 자리 잡았기 때문에 샘을 파면 마을에 해가 미치고 물이 뒤집혀 황토물이 나와 우물을 파지 않고 1950년대까지 직지천 물을 식수로 사용해왔다고 한다.
용배마을로부터 경부고속도로 굴다리를 지나자마자 도로 오른쪽에 황울산못으로 불리는 작은 저수지가 있는데 이 못은 황울산(黃蔚山)이라는 사람의 집터를 헐어서 못을 팠다고 알려져 있다.
이후 황씨집안은 가세가 기울어지고 황울산의 집터는 못이 됐다고 전해지는데 이 못이 바로 그때의 황울산 집터였다는 것이다.
용배마을로부터 태화리로 넘어가는 고개는 원래 즐거울락(樂)자를 써서 낙고개(樂峴)였는데 명당으로 소문이 나서 서울로 과거 보러가는 선비들이 이 고개를 주로 넘어갔다. 그러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명당의 맥을 끊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이 고개로 넘은 과거 응시자들 중 낙방자가 속출했고 이후부터 현재의 국도방면으로 돌아가게 됐으며 고개이름도 떨어질락(落)자를 써서 낙고개(落峴)가 됐다.
남전, 도산마을은 일대의 드넓은 밭에서 채소가 많이 생산되는 것을 보고 풀남(藍)자에 밭전(田)자를 써서 남전(藍田)이라 했다고 하고 도산마을은 마을 중앙에 도산(都山)이라는 야산이 있어 도산을 마을의 지명으로 삼았다고 한다.
    
떡전골주막으로 유명했던 태화리
↑↑ 석조보살입상
ⓒ i김천신문

태화리(太和里)는 음지마, 양지마, 태평, 창촌, 평촌 등 다섯 마을로 나눠져 있다.
음지마에는 고려시대에 창건된 가막사(可幕寺), 감막사(柑幕寺)로 불리던 절이 있었음으로 해서 가막리, 가매기 등으로 불렸는데 1800년대 말 이러한 지명이 동명으로 삼기에는 적당하지 않다는 여론이 일어 봉황이 울면서 비상하듯 마을이 발전하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아 봉황새봉(鳳)자와 울명(鳴)자를 써서 봉명(鳳鳴)으로 했다고 한다. 또 양지마, 음지마로 불리는 사연은 아침에 해가 뜨면 양지마쪽을 먼저 비춰 양지마라 했다고 한다. 음지마에는 옛 가막사 절터가 남아있고 양지마을에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89호로 지정된 석조보살입상이 있는데 아들을 점지해 준다는 소문이 나면서 많은 기도객들이 다녀갔다고 한다.
이웃한 태평마을 뒤에는 재궁골이라는 큰 골짜기가 있고 영일정씨 봉계 입향조를 비롯한 후손 50여기의 산소가 있는 선산과 태평재(太平齋)라는 재실이 있다. 이 일대에 영일정씨 문중의 선산과 재실이 들어서기까지의 내력이 담긴 전설이 전해져 온다.
이곳에는 원래 태평사(太平寺)라는 절이 있던 명당으로 소문난 자리였는데 옛날 영일정씨 집안과 장수황씨 집안이 서로 재궁골 일대의 명당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던 중 황씨 집안의 황울산(黃蔚山)이라는 사람이 절터를 차지할 요량으로 “동짓달 그믐밤에 절 지붕에서 송아지가 울면 절이 망한다”는 소문을 퍼트린 후  법당 지붕에 몰래 송아지를 올려놓았는데 이후 차츰 스님들이 떠나고 절은 망해서 황씨 집안의 소유가 됐다. 이후 두 집안에서 거의 동시에 초상이 났는데 영일정씨 문중에서 묘책을 세워 재궁골에 산소를 먼저 모시게 되니 황울산이 “이 터는 내 것이 못 되는구나”라고 탄식을 하며 떠났다는 것이다.
태화3리인 창촌과 평촌 두 마을은 인근의 상금동과 함께 과거에는 지매골로 통칭해서 불렸는데 평촌과 창촌에서 상금동을 거쳐 추풍령으로 넘어가는 지매골짜기의 입구에 두 마을이 자리 잡고 있었다.
태화초등학교가 있는 평촌마을은 지매골에 속한 평촌, 창촌, 상금, 점리, 사기점 등 인근 다섯 마을 중 가장 아래에 자리 잡고 있어 하리(下里), 또는 하리마로도 불린다.
옛날 하리에는 추풍령과 괘방령을 통해 영동으로 넘어가는 교통의 요지에 마을이 입지해 있음으로 해서 떡전골주막이라는 큰 주막이 번성했다고 한다. 특히 과거를 보러가는 선비들이 상경할 때는 이름이 불길한 낙고개를 피해 다른 곳으로 올라갔다가 내려올 때는 대부분 떡전골 주막으로 와서 유숙하고 가는 것이 보편화돼 전국적으로 명성이 자자했었다고 한다.
평촌마을로부터 고속도로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는 창촌마을은 조선시대 이 마을 창앞산 앞 숲밭걸에 군량미(軍糧米)를 보관하는 창고가 있어 창촌(倉村), 창말로 불렸다. 군사시설인 이 창고를 엄폐(掩蔽)하기 위해 창고 앞에 많은 나무를 심어 숲을 가꿨다고 한다.
    
금광이 있었던 상금리
↑↑ 금화마을
ⓒ i김천신문

태화3리에 속하는 하리(下里)로부터 지매골 깊은 골짜기의 상금천을 따라 자리 잡고 있는 상금리(上金里)는 중리와 상리, 금화 등 크게 세 마을로 이뤄져있다.
이들 마을은 조선시대까지 영동군 황간면에 속한 상리와 중리였는데 1914년 김천군 봉산면에 편입되면서 1914년 금화, 사기점을 합해 상리(上里)의 상(上)자와 금화(金華)의 금(金)자를 따서 상금동(上金洞)이라 했다.
마을주민들에 따르면 상리는 지매골의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 상리(上里)로 불렀다고 하며 임진왜란 때 전란을 피해 낙향한 의성김씨 집안의 한 선비가 마을을 개척했다고 한다.
상리 안쪽에는 금화, 점리, 사기점 등으로 불리는 상금2리가 자리 잡고 있다. 이 마을은 임진왜란 때 한 이름난 도공(陶工)이 피난을 왔다가 좋은 흙이 나는 것을 보고 정착해 도자기를 생산하면서 마을이 형성됐는데 1800년대 들어 마을이름을 사기점(沙器店)이라 했다고 한다.
훗날 도자기 생산이 침체되면서 사기점 마을은 폐동이 되고 아래인 현재의 금화마을이 새로 형성됐는데 1900년대 초에 마을 앞산의 남대골에서 금광이 발견되면서 마을이름을 금화(金華)라 했다.
옛 사기점 마을의 가마터는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잡목으로 뒤덮여 흔적을 찾을 길이 없으나 지금도 인근에서는 사기 조각들이 출토되고 있다.
    
남정 김시창의 충절이 서린 신암리
↑↑ 김시창 정려각
ⓒ i김천신문

신암리(新岩里)는 추풍령방면 옛 국도변에 자리한 고도암, 신촌, 가성, 새터 등 네 마을로 이뤄져 있다.
이 마을은 조선시대에는 영동군 황남면에 속한 조삼동과 고도암이었는데 1914년 김천군 봉산면으로 되면서 신촌에서 신(新)자를 따고 고도암에서 암(岩)자를 따서 신암(新岩)이라 했다. 신촌(新村)은 원래 현재의 마을에서 북쪽으로 500m 지점에 있던 조삼동(鳥三洞)이었는데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산사태로 마을이 매몰돼 현재의 위치에 새로 마을을 세우면서 새마을, 신촌이라 했다.
고도암마을 입구에는 충효를 몸소 실천한 김시창(金始昌.1472~1558)을 기리는 정려각이 있다. 남정(嵐亭) 김시창은 해풍김씨로 모친이 별세하자 3년간 시묘살이를 했고 성종, 중종, 인종의 붕어(崩御) 시에도 부모상과 같이 3년간 신하의 예를 다해 세인의 칭송을 받았다.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추천으로 관직이 제수됐으나 ‘存養省察(천성을 지키고 자신을 살핌)’을 신조로 학문에만 전념하니 사후에 왕이 예관을 보내 치제(致祭)하고 절효(節孝)라는 시호와 정려를 내렸다.
고도암이라는 지명은 마을 뒷산에 10m 남짓 되는 큰 바위가 있어 고도암(高道岩)이라 했다고 한다.
가성(柯城)마을은 마을 뒤의 가성산으로 부터 뻗어내린 산세가 마을주변을 성(城)과 같이 에워싸고 있어 가성이라 했다고 한다.
원래 내가성 마을 안쪽의 가성산 아래에 있었던 상마(上馬)라는 마을이 본 마을로 영일정씨와 본관을 알 수 없는 장씨 일가들이 10여호 마을을 이뤄 살고 있었다.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화적의 습격이 잦아지자 아래로 내려와 새로 마을을 이뤄 지금의 내가성 마을이 됐다고 한다. 이후 6·25전쟁 때 폭격으로 마을이 파괴되면서 많은 주민들이 다시 아래로 이주해 지금의 외가성 마을에 정착했다.
마을 앞산에는 밥그릇 모양을 한 식기암(食器岩)이라는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는 손으로 두드리면 북처럼 소리가 울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로부터 이 바위 속에 갑옷이 들어있다는 전설이 있어 일제 때 일본사람들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바위를 깨트리다가 갑자기 벼락이 치고 소나기가 내려 도망쳤다는 일화가 전설처럼 전해진다. 이 바위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마을 앞에는 마치 병풍을 펼쳐놓은 것과 같은 형상을 한 병풍바위가 있는데 이 역시 일본인들이 마을 앞의 경부선 철도 공사를 하면서 필요한 석재를 조달할 요량으로 이 바위를 깨트리다가 그 책임자가 죽어 바위가 보존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내가성 마을 입구에는 수령을 짐작하기 어려운 버드나무가 몇 그루 있는데 마을 주민들은 이 나무의 잎으로서 그해 농사의 풍흉을 점쳤다고 하는데 이른 봄 잎이 무성하면 풍년이 든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 병풍바위
ⓒ i김천신문

    
호국의 성지 추풍령을 품은 마을 광천리
↑↑ 당마루
ⓒ i김천신문

신암2리로 속하는 가성, 신기마을을 지나 국도를 따라 가다보면 광천리(廣川里)로 속한 네 마을이 있는데 시목(枾木), 죽막(竹幕), 돈목(敦木), 송라(松羅) 네 마을이다.
시목마을은 감나무가 많아 동명을 감나무골 또는 감나무시(枾)자와 나무목(木)자를 따서 시목(枾木)이라 했다.
시목을 지나면 죽막(竹幕)마을이 있는데 대나무밭 옆에 주막이 있다 해서 주막거리 또는 대나무집 주막이란 뜻의 대막골로 불렸는데 이를 한자로 적으면서 죽막(竹幕)이라 했다고 한다.
이 마을은 임진왜란 때 김천지방에서의 첫 전투인 1592년 4월 23일의 김천역 전투에서 패한 경상우도 방어사 조경(趙儆.1541~1609)이 흩어졌던 군사 500명을 모아 추풍령에 집결시키고 전투에 임할 때 이 마을 주막에서 작전회의를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4월 26일 밤부터 새벽까지 벌어진 추풍령전투에서 김천에 주둔한 왜병의 북진 선발대 수백 명을 대적하기 위해 정기룡 장군이 야간에 황소꼬리에 불을 붙여 적진에 밀어 넣는 전술로 몰살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돈목(敦穆)마을은 옛날 이씨와 한씨 두 집안이 서로 화목하고 정답게 살라는 뜻으로 도타울돈(敦)자와 화목할목(睦)자를 써서 돈목(敦睦)이라 했다고 한다.
추풍령휴게소 위쪽으로는 추풍령면과 접하고 있는 송라마을이 있는데 현재 8가구가 거주하는 작은 마을로 마을 앞뒤로 소나무가 비단을 펼쳐놓은 것과 같아 소나무송(松)자에 비단라(羅)자를 써서 송라(松羅)라 했는데 소래실이라고도 불린다.
국도 4호선을 중심으로 죽막마을과 마주하면서 국도 우측으로 이어져있는 마을이 곤천, 광동, 당령마을로 광천2리로 속한다.
곤천마을에는 과거 집성을 이루며 살았던 밀양손씨 집안에 이름난 효자와 관련한 전설이 내려온다. 옛날 집이 가난해 끼니를 이을 수 없는 손씨 집안 한 선비의 늙은 모친이 중병으로 누웠는데 설상가상으로 엄동설한에 감홍시를 먹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선비는 홍시를 구하기 위해 마을에서 멀리 보이는 눈 덮인 선계산을 3일간 돌아다녔으나 구하지 못하고 통곡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토끼가 나타나 발자국을 따라 갔더니 양지 바른 곳에 산감나무가 있어 홍시를 구해 모친의 병을 고치게 했다고 한다. 그 이후부터 주민들은 감나무가 있던 골짜기를 신령스럽게 여겨 신령골(神靈谷)이라 했다고 한다.
광동마을 앞에는 입석이 있는데 옛날 양천허씨 집안의 힘센 장수가 마을 뒤 법구골에서 어깨에 매고 내려와 이곳에 세우고 마을의 수호신으로 삼게 했다고 한다.
광동이라는 지명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들판이 골짜기를 따라 넓고 길게 펼쳐져있어 넓은골, 너리골이라 불렀는데 이를 한자로 적으면서 넓을광(廣)자를 써서 광동(廣洞)으로 했다고 한다.
추풍령면과 접하고 있는 당마루(唐嶺)는 옛날 한양으로 가는 길이 김천에서부터 가파른 고갯마루를 거슬러 올라가 가파른 당나귀 등처럼 생겨 당마루라고 불렀다고 한다.
    
□봉산면의 산
    
눌의산
눌의산(訥誼山)은 김천시 봉산면 광천리, 신암리와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 공수리, 추풍령리가 경계를 이루고 있는 백두대간으로 해발 743m이다.
눌의산은 달리 선계산(仙界山)으로도 불렸는데 선계는 인간세상인 속계와 구별되는 신선이 산다는 선경(仙境), 즉 무릉도원을 뜻하니 산의 경치가 지극히 아름다웠음을 이름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산 정상에는 조선시대말까지 봉화를 피웠던 봉수대가 있어 봉화산으로도 불렸는데 지금은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다만 정상 인근 헬기장 기단석 일부가 옛날 봉수대를 지탱했을 석물들일 것으로 추정된다.
    
극락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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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산(極樂山)은 백두대간의 하나인 용문산으로부터 분기된 난함산에 딸린 해발498m의 산으로 정상부 아래에 극락사로 불린 절이 있어 극락산이라는 지명을 얻었다.
숙종 때인 1682년 간행된 ‘경상도좌우주군총도(慶尙道左右州郡總圖)’에는 황악산 옆에 극락산이 있는 것으로 표기돼있다. 또 1728년 여이명이 저술한 ‘금릉지’에 “군 서쪽 11리에 있으며 황간과의 경계다”라고 적고 있으며 1937년 간행된 ‘교남지(嶠南誌)’에도 “극락산은 군의 서쪽 11리에 있고 백운산으로부터 뻗어 내려와 황간과 경계를 이룬다”라고 적고 있다. 이병연이 발간한 ‘조선환여승람’에는 “극락산은 군의 서북쪽 10리에 있다”고 적고 있다.
    
□봉산면의 문화유산
    
영천이씨정려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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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일정씨 정유한의 처인 영천이씨의 열행을 기리는 정려각이다. 영천이씨부인은 1570년 찰방 이대유(李大有)의 딸로 태어나 영일정씨 정유한에게 시집왔다. 정유한은 통덕랑(通德郞)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의병장으로서 큰 공을 세웠다. 임진왜란 때 왜병이 마을에 들어오자 시부모를 모시고 마을 뒷산으로 피난갔다가 뒤따라온 적에게 붙잡히자 정절을 지키기 위해 은장도로 가슴을 찔러 자결했다. 1633년(인조11년) 나라에서 정려가 내리고 다음해인 1634년 비석과 정려각을 세웠는데 후손들이 정려각 앞에 샘을 파고 부인의 절개를 본받자는 뜻으로 절의천(節義泉)이라 했다. 1892년(고종29년) 남편 정유한에게 이조참의, 영천이씨부인을 숙부인으로 추증했다. 2000년 영천이씨정려각이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87호로 지정됐다.
    
봉암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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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암서당(鳳岩書堂)은 1544년(중종39년) 영일정씨 교리공파 정공필(鄭公弼)을 비롯한 문중의 후손들이 지역의 인재양성을 위해 봉계 마을입구에 창건하고 도장서당(道藏書堂)이라 했다. 1644년(인조22년) 각골(현재의 봉산문화마을 일대)로 이전했다가 1757년(영조33년)에 현재의 위치로 다시 이전한 것으로 전한다. 봉암서당은 75명에 달하는 과거급제자를 배출해 봉계가 김천의 대표적인 반촌으로 발돋움하는데 큰 역할을 했고 임진왜란 때 후손 정유한(鄭維翰)이 봉암서당에서 회합을 갖고 의병을 모아 왜병에 대항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율수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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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수재(聿修齋)는 1686년(숙종12) 매계 조위(曺偉)의 생가 터에 세운 사당으로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41호로 지정됐으며 ‘梅溪舊居’라는 현판 글씨는 우암 송시열(宋時烈)의 친필이다.
조위는 뛰어난 문장으로 성종의 총애를 받으며 도승지와 성균관대사성을 지냈고 당나라 두보의 시를 최초로 언해한 ‘두시언해(杜詩諺解)’와 유배가사의 효시인 ‘만분가(萬憤歌)’를 집필해 우리나라 문학사에 큰 획을 그었다.
    
용화사 석조관음보살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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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화사(龍華寺)는 봉산면 덕천리 황울산 아래에 있는 직지사의 말사로 신라시대에 창건된 고찰이다. 오래 전 폐사되고 석불만 남아있던 것을 백연수 보살이 1927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 중창했다. 관음전에 봉안된 석조관음보살입상은 고려시대에 조성된 불상으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50호로 지정됐다.
    
□봉산면의 특산물
    
‘포도’하면 봉산 ‘봉산’하면 포도
    
김천 제일의 포도 주산지인 봉산면엔 지난해 967농가가 531ha에서 8천924톤의 포도를 생산했다. 이 가운데 노지포도는 김천관내에서 가장 많은 692농가가 360ha에서 5천396톤을 생산하고 시설포도 역시 김태연(덕천포도원) 조우현(행복포도원) 정창화(시골포도원) 등 275농가가 171ha에서 3천528톤의 많은 포도를 생산해 ‘포도’하면 봉산, ‘봉산’하면 포도가 연상될 정도로 봉산포도는 유명하다.
시설 재배하는 토마토(방울토마토, 대추토마토)는 재배하는 농업인이 소수이나 포도 다음으로 많이 생산되는 이 지역 특산물로 15농가가 17ha에서 1천20톤을 생산한 것으로 조사됐다.
    
□봉산면의 산업체
    
㈜아주화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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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산면 상금리 842번지에 위치한 ㈜아주화학은 친환경 페인트 전문업체로 2010년 1월 설립됐다.
2012년 4월 공장을 준공한 아주화학은 그해 7월 친환경페인트 제품을 개발, 시판에 들어갔으며 같은 해 12월 제비표페인트 기술력을 인정받아 ODM생산 계약 공급을 했다.
자연과 환경의 보존을 위한 과학적인 코팅시스템을 갖춘 아주화학은 2012년 4월 벤처기업 선정(기술보증기금 수혜), 2013년 7월 아주화학 부설 연구소 설립과 함께 ISO 9001·ISO 14000 취득, 2014년 7월 친환경마크 재인정을 받은 우량기업이다. 
“아주화학은 장인정신과 목재과학을 중심으로 환경친화적 제품개발에 전념하고 있는 페인트 전문제조업체입니다. 아주화학에서 생산하는 홈스테인(Homestaim)은 나무의 아름답고 부드러운 느낌을 있는 그대로 재현할 수 있도록 친환경 특수 수자를 독자적으로 개발했으며 누구나 쉽게 조색하고 칠할 수 있는 제품으로 만들었습니다. 또한 타사의 제품에서 찾을 수 없는 Hals 기능을 첨가해 자외선 차단은 물론 나무의 들뜸 현상이 없도록 한 목재보호재입니다. 아주화학은 앞으로도 고객이 추구하는 가치를 위해 끈임 없이 노력하는 아주화학이 되겠습니다.”
㈜아주화학 구자호 대표이사의 말이다. 
봉산면 관내엔 현재 ㈜대성플랜트산업, 두원스틸(주), 보람전자 등 28개 업체가 가동 중이다.   
    
□봉산면의 학교
    
봉계초등학교
봉산면 신리 472에 위치한 봉계초등학교는 1919년 11월 25일 4년제 봉계공립보통학교로 개교해 1938년 4월 1일 봉계심상소학교로 교명을 변경했으며 1946년 4월 1일 봉계국민학교로 교명을 변경한데 이어 1996년 3월 1일 봉계초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했다. 올해로 5년째 경상북도교육청 지정 글쓰기영재학급을 운영하고 있는 봉계초등학교는 2015년 현재 93회에 걸쳐 5천83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태화초등학교
봉산면 태화리 175에 위치한 태화초등학교는 1912년 창촌리에 태화의숙으로 설립됐다. 1943년 4월 1일 신암국민학교 태화분교장으로 편입됐다가 1949년 9월 20일 태화국민학교 설립 인가를 받아 같은 해 10월 10일 개교됐으며 1950년 7월 6·25전쟁으로 소실됐다. 1993년 3월 1일 신암국민학교가 태화국민학교 신암분교장으로 편입된데 이어 1994년 3월 1일 광천국민학교가 태화국민학교 광천분교장으로 편입됐다. 1996년 3월 1일 태화초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하고 1997년 3월 1일 태화초등학교 광천분교장이 통합된데 이어 1999년 9월 1일 태화초등학교 신암분교장이 통합됐다. 태화초등학교는 2015년 현재 64회에 걸쳐 2천66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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