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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항면 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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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면은 서쪽으로 충북 영동군과 도계(道界)를 이루며 서남쪽으로는 구성면, 동북쪽으로는 봉산면, 동쪽으로는 대곡동과 접하고 있다. 황악산, 덕대산 등 험준한 산악지대가 많고 북동쪽으로 농경지가 집중돼 있으며 포도 주산지로 각광받고 있다. 현재의 대항면은 조선시대까지 김산군 대항면과 황간군 황남면으로 나눠져 있었는데 1906년 황간군 황남면의 여섯 마을을 비롯한 봉산면과 미곡면의 일부를 편입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항면(代項面)의 원래 지명인 대항(垈項)은 지금의 운수1동의 지명인 터목의 한문식 표기이다.
터대(垈)자에 목항(項)자를 썼는데 예로부터 터목마을이 대항12방(대항면 일대 12개의 큰 마을)의 중심이 되는 마을이다 보니 이 마을의 지명이 자연스럽게 행정단위인 면(面)의 지명으로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대항(垈項)이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대항(代項)으로 바뀌었는데 이는 골의 입구 터목이라고 하는 마을의 입지여건에서 지명이 유래됐다는 사실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대항면은 천년고찰 직지사와 많은 산내 암자, 그리고 조선 2대 정종의 태봉이 소재한 김천불교문화의 보고(寶庫)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항면의 마을
황악산 아래 첫 마을 운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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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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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수리(雲水里)는 터목(본리), 돌모, 박수점 등 크게 세 마을로 이뤄져 있다.
운수1리로 속하는 터목은 바람재로 이어지는 긴 골짜기의 길목에 해당하는 위치에 자리 잡고 있어 터대(垈)자에 목항(項)자를 써서 대항(垈項) 또는 터목이라 했다. 대항면이라고 하는 면 지명도 이 마을로 부터 유래됐으며 일제시대 때 대항면의 대(垈)자가 대(代)자로 바뀌어 표기됐다. 일대의 중심이 되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본리(本里)로도 불린다.
실제로 조선시대로부터 1920년까지 대항면사무소가 이 마을에 있었으며 경찰주재소도 1932년까지 여기에 있었다.
터목은 1770년경 직지사를 찾아 드나들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정착하면서 마을을 형성했다고 알려지고 있는데 통상 도로를 기준으로 좌측을 음지마, 우측을 양지마라 했다.
또 직지사 매표소에서 우측으로 돌아 무궁화공원을 지나 수백m를 더 오르면 역시 운수1리로 속하는 북암마을이 나온다. 북암마을 앞 개구리봉은 장택상(張澤相) 전 국무총리의 부친인 장승원(張承遠)의 묘소가 있는데 이름난 명당으로 알려진 곳이다.
이 개구리봉 옆에는 조선2대 정종의 태(胎)를 봉안한 태봉(胎峰)으로 풍수지리로 볼 때 사두혈(蛇頭穴), 뱀의 머리에 해당하는 형국이라고 한다. 때문에 사두혈인 태봉의 기세에 개구리봉의 발복(發福)이 위해를 받을 것을 염려한 인동장씨 집안에서는 지관의 충고를 받아들여 태봉과 개구리봉사이의 산을 파내어 밭을 만들고 옆에 저수지를 팠다. 뱀이 개구리를 잡아먹으려 할 때 개구리가 피신을 하려면 물이 있어야 하므로 개구리봉 옆에 인공으로 저수지를 팠다는 것이다.
운수2리 돌모(乭毛)는 조선시대에 영동군 황간면 돌모응리(乭毛應里)에 속했었는데 돌모라는 지명은 1800년대 초 창녕조씨 일가가 이곳 마을을 개척할 당시 돌이 많아 돌마을이라 했는데 뒤에 이를 한자로 적으면서 음이 비슷한 돌모(乭毛)라고 했다는 것이다. 박수점, 백운으로 불리는 운수3리는 돌모에 정착해 일가를 이루며 살고 있던 창녕조씨 일가가 1840년 분가해 새로 개척한 마을이다.
박수점(朴水店)이라는 마을의 지명은 옛날 황악산에 많이 자생했던 박달나무로 가구를 만들어 생계를 유지해 박수점이라 했다고 하며 항상 구름에 덮여 있다고 백운(白雲)으로도 불린다.
바람재 고갯마루에 자리잡은 주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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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례리 화실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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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바람이 심해 고개이름까지 바람재가 됐다는 이 고갯마루를 넘어서면 화실, 주공, 삼거마을로 이뤄진 주례리(周禮里)가 있다.
주례1리 화실마을은 1700년대 초 약초를 캐러 다니던 은진송씨 성을 가진 이가 일대에 꽃이 화려한 과실나무가 많아 이곳에 정착하면서 마을이름을 화실(花實), 화곡(華谷)이라 했다고 한다.
화실마을 뒤 천태산에는 직지사의 암자로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했다는 삼성암(三聖庵)이 있다. 약사보전에 봉안된 석조약사여래좌상은 증산 수도암 약광전 약사여래, 금오산 약사암 약사여래와 함께 삼형제를 맺었다고 하는 약사불로 알려져 있다.
주례2리 주공마을은 1790년 곡부공씨(曲阜孔氏) 일가가 마을을 개척한 이래 공자가 뜻을 펼쳤던 주나라를 뜻하는 주(周)자와 공자의 공(孔)자를 따서 마을이름을 주공(周孔)이라 했는데 뒤에 주공(周公)으로 변했다.
주공마을로부터 협소한 오르막길을 2km 남짓 오르다보면 거대한 느티나무가 버티고 서서 마을이 있음을 알리는데 대항면에서도 가장 산간에 위치했다는 주례3리 삼거마을이다.
이 마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병자호란 이후 산 하나를 사이로 이웃하고 있는 영동군 상촌에서 분가한 밀양박씨 일가가 이주해 개척했다고 알려지고 있으며 일설에는 1810년경 구씨(具氏)일가가 화적떼를 피해 이곳으로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고도 한다.
삼거, 삼거리로 불리는 지명은 이 마을이 구성면 마산리와 영동군 상촌면, 그리고 대항면 등 세 갈래 길이 나뉘는 위치에 있다고 붙여진 지명이라고도 하고 또 이웃한 주공, 손다리, 안골 등 세 마을의 중간에 마을이 있어 삼거리라 했다고도 한다.
이름도 아름다운 향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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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아치마을 입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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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봉산검문소에서 복전동을 지나 직지사 굴다리를 지나면서부터 직지사 상가일대에 이르기까지가 향천리에 속하는 마을로 지천, 합천, 묘내, 방하치 등 네 마을로 이뤄져 있다.
이들 마을은 조선시대에는 황간군 황남면에 속했었는데 1906년에 김천군 대항면으로 편입됐다. 1914년 지천, 합천, 묘내, 방하치를 합해 직지천변의 아름다운 마을이란 뜻으로 향기향(香)자를 써서 향천동(香川洞)이라 고쳤고 1971년 네 마을을 각각 1·2·3·4리로 나눴다.
향천1리 지천은 1760년대 해주정씨 한 선비가 직지사를 왕래하다가 정착해 살기 시작한 이래 마을이 형성됐다고 하며 마을 뒤 들문골짜기에 옛날 못이 있어 못내라 부르고 한자로 못지(池)자와 내천(川)자를 따서 지천(池川)이라 했다.
마을주민들은 직지사상가 아래의 직지천변 일대를 일컬어 장계(長溪)다리, 장가(張家)다리 등으로 부르고 있는데 옛날 이곳에 직지천을 건너던 작은 다리가 있었고 그 다리 밑에 장씨 성을 가진 사람이 주막을 내고 있어 장가다리로 불렀다고 한다.
옛날에는 주막일대에 10여호가 사는 작은 마을이 있었는데 지금은 새로 다리가 놓이고 마을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또 조선시대까지 장가다리를 기준으로 동쪽은 황간현, 서쪽은 김산군으로 나누는 기준으로 삼기도 했다.
향천2리 합천은 지천 아래에 인접해있는 마을로 마을 앞 도로변에 넓은 바위가 있어 마을이름을 너른바우라 부르고 한자로는 광암(廣岩)이라 했는데 경부선 철도가 마을 앞으로 나면서 석재를 충당할 요량으로 이 바위를 깨트려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대항면사무소 일대는 직지천과 방하천이 합류해 합천(合川)이라 했는데 1930년에 보통학교가 처음 설립됐다고 학교가 있는 마을이란 뜻의 학교동으로도 불린다.
이 마을에는 조선시대부터 옹기를 굽는 가마인 옹기굴이 있었는데 6·25사변 전까지도 송씨 성을 가진 형제가 옹기를 구워 팔면서 많은 돈을 벌어 부촌으로 이름이 났었다고 전해진다.
합천마을 앞 복전교에서 궤방령 방면의 977호선 지방도로 접어들어 기날저수지를 따라 가다보면 저수지가 끝나며 왼편 황악산 자락 큰골 아래로 기날, 묘내 등으로 불리는 향천3리가 나온다.
원래 묘내, 복산, 아랫궤방령 등 도로변의 세 마을이 향천3리로 속했었는데 복산은 복전2리로 통합되고 궤방령고개 아래에 있던 마을인 아랫궤방령은 폐동됐다.
묘내마을은 마을 앞에 머루와 다래 넝쿨이 많아 마을을 드나들 때 기어서 다녀 마을이름을 기날이라고도 했다. 원래 이 마을은 현재의 마을회관으로부터 위쪽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풍수지리에 밝은 한 군수가 이 마을의 형세가 고양이(猫) 형상인 것을 간파하고 쥐(鼠)의 형상인 교동 관아 뒷산의 지세가 이 마을로 인해 기운이 쇠잔될 것을 우려해 교동에서 마을이 보이지 않도록 현 위치로 내려오게 했다고 한다.
합천의 대항면사무소 맞은편으로 난 좁다란 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 가다보면 소물산과 덕대산, 동구지산 등 사방이 산악으로 둘러싸인 방하치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마을은 소설가 유주현이 1975년에 발간한 역사소설 ‘황녀(皇女)’의 배경지로도 등장했다. 고종황제의 숨겨둔 옹주 이문용(李文鎔)이 엄비(嚴妃)의 질투로부터 위태로운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젊은 유모에게 맡겨져 황악산 기슭의 방앗골에서 구박을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내는 것으로 나온다. 이 소설은 사실을 바탕으로 한 역사소설로 한말 비운에 살다간 한 공주의 생애를 다루고 있는데 방하치마을은 중요한 역사의 현장이다.
공자를 흠모하던 선비들의 은거지 대성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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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자동 표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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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례천 또는 석상천으로 불리는 아름다운 하천변에 자리잡고 있는 대성리(大聖里) 공자동은 1670년 경주이씨, 김해김씨, 밀양박씨 등 세 선비가 의기투합해 세상을 멀리하고 학문에만 정진할 수 있는 조용하고 아름다운 곳을 찾던 중 이곳에 이르러 인적이 드물고 경치가 수려해 감탄을 하고는 식솔과 함께 정착해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고 한다.
마을의 이름이 공자동(孔子洞)으로 된 것은 이들 선비가 평소 존경하던 성인 공자(孔子)의 이름을 따서 공자동이라 했다고 한다. 일설에는 마을이름을 정할 때 공자의 제자인 안연(顔淵)을 기려서 별칭으로 안연대(顔淵臺)라고 했다고도 한다. 실제로 마을 서남쪽의 석상천변 넓은 바위에 ‘顔淵臺’라 새겨져있고 옛날 이곳에서 선비들이 모여 풍류를 즐기기도 했다고 한다.
이 마을로부터 하천을 건너 상거리 백어마을로 들어가는 방면으로 가자면 수령을 가늠하기 어려운 거대한 느티나무가 자리하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흉년이 드는 해에는 이 나무의 구멍에서 구렁이가 나와서 울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흙으로 메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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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자동 느티나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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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평(昌平)마을은 인근 방하재 아래의 작은 마을인 방하와 함께 대성2리로 속하는데 조선시대까지 창평은 김산군 대항면으로 속하고 방하는 황간현으로 속했었는데 1906년 방하가 대항면으로 편입됐고 1914년 공자동과 방하를 대성동으로 했다가 1971년 창평과 방하, 그 사이의 안터를 대성2동으로 분동했다.
창평이라는 마을이름은 1750년 강릉유씨(江陵劉氏) 한 선비가 정착한 이래 대대로 강릉유씨가 집성을 이루며 살았는데 마을이름을 정하면서 노나라 공자의 고향인 산동성 곡부(曲阜) 창평의 지명을 마을이름으로 삼았다고 한다.
구성면 흥평리 평전과 경계를 이루는 덕대산 서남쪽 계곡을 따라 펼쳐진 창평, 안터, 방하는 현재의 대항면과 구성면을 이어주는 새 도로가 나기 전까지는 방하재를 넘어 향천으로 가는 고갯길이 유일한 통로였다고 하니 복잡한 세상으로부터 벗어나 공자를 흠모하며 소란한 세상을 등지고 살았던 옛 선비의 지조가 느껴지는 듯하다.
임진왜란의 격전지 복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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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천서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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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봉산검문소에서 직지사 방면으로 들어서면서부터 마전굴다리까지 직지천 좌우로 늘어선 마을이 복전리(福田里)이다.
마전마을은 전의이씨(全義李氏) 집성촌으로 조선 정조 때 경남 의령에서 서울로 과거를 보러가던 전의이씨 24세손 이춘영(李春榮)과 은영(殷榮) 형제가 궤방령 길목에 이르러 직지천변의 아름다운 이곳에 터를 잡고 정착한 이래 대대로 전의이씨 집성을 이뤘다고 한다.
마전이라는 지명은 마을안쪽의 말무덤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때 마을 인근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이때 죽은 왜병과 우리 군사들의 말을 들판 한가운데 모아 돌을 쌓아 말무덤을 만들고 들판 이름을 말무덤들 또는 마전(馬田)이라 했는데 지난 1970년 경지정리를 하면서 이 무덤이 사라져 버렸다.
마전과 인접해있는 복전마을의 복전이라는 지명이 생긴 것은 일제 때인 1914년부터이며 그 이전에는 웃마전이라하고 말마(馬)자에 낙타 락(駱)자를 써서 마락(馬駱), 마라치라고도 했는데 이는 마을 앞 아랫양지산의 형세가 말안장과 낙타의 등을 닮은 데서 연유됐다고 한다.
복전은 파평윤씨 집성촌인 복산과 함께 지금은 폐동된 말개미(마암), 넘바우, 안정골까지 아우르는 큰 마을로 봉산면 태화리 봉명(가매기)마을과 함께 대표적인 충주박씨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이 마을이 형성된 것은 임진왜란 직후인 1590년대 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학촌(鶴村) 박이룡(朴以龍)의 아들 3형제 즉, 박사친(朴事親), 박사군(朴事君), 박사형(朴事兄)이 김천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던 부친을 따라와 정착했는데 복전에는 3남인 박사형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뤘다.
박이룡은 조선 중종 때 황간에서 박성건(朴成楗)의 차남으로 태어나 해서순찰사(海西巡察使)로 있다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황간으로 돌아와 의병을 모아 김천 하로, 부상, 개령, 지례, 방하, 우두령전투에 참가해 왜병을 물리친 의병장으로 이름을 높였다.
복전마을로부터 경부선 철로 건너편에는 지금은 폐동이 된 안정개라는 작은 마을이 있었는데 효종 때 효행으로 출사해 참봉벼슬을 한 안정(安定) 박사삼(朴事三)이 태어난 곳이라 해서 붙은 지명이다.
박사삼은 충주박씨(忠州朴氏)로 우암(尤唵) 송시열(宋時烈)이 “가례에 맞는 예절이 탁월하고 효행이 남의 본보기가 됐다”고 칭송한 분이다.
복전마을에는 충주박씨 문중에서 자제교육을 위해 건립한 조천서당(藻川書堂)이 자리하고 있는데 정확히 어느 시기에 건립됐는지는 알 수 없으나 현판이 우암의 친필인 것으로 미뤄볼 때 유서 깊은 서당임이 분명하다.
송시열은 마을을 지나다가 마을에 불이 자주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마을 앞 직지천에 수초(水草)의 일종인 말이 많은 것을 보고 서당이름을 말조(藻)자에 내천(川)자를 써서 조천이라 짓고 현판을 써주고 같다고 하는데 그 이후 마을에 불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복산(福山)마을은 기날저수지에서 궤방령 중간에 있는 파평윤씨 태위공파(太尉公波) 집성촌으로 복전2리로 속하는데 옛날 궤방령이 추풍령을 대신해 과거 길로 성황을 이룰 때 복산마을 중간으로 길이 있어 길손들이 쉬어가곤 했었다고 한다.
덕대산 정기 받은 덕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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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골 저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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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전리(德田里)는 덕대산 아래 정골로부터 신평에 이르기까지 하천을 경계로 대룡리와 이웃하고 있는 덕산(德山), 대사(大寺), 죽전(竹田), 세송(細松, 왕대(旺大), 신평(新坪) 등 여섯 마을로 이뤄져있다. 조선시대까지는 김산군 대항면에 속했었는데 1914년 이들 마을을 합해 덕산의 덕(德)자와 죽전의 전(田)자를 따서 덕전동(德田洞)으로 했다.
덕전1리로 속하는 덕산은 덕산저수지 위에 자리 잡고 있는데 1700년대 초 영일정씨 정홍일이라는 선비가 봉계에서 이주해 정착한 이래 대대로 정씨들이 터를 잡고 살았다 해서 정골(鄭谷)이라 했고 또 덕대산 아래에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해서 덕산(德山), 마을 뒤 덕대산 자락 점터골에 쇠붙이를 생산하던 쇠점이 있어 점골(店谷)로도 불렸다.
마을 앞의 덕산저수지는 1942년에 축조됐는데 당시 대항면장 하병헌(河炳鉉)의 지휘아래 일대 동민들이 동원돼 저수지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덕산저수지 아래에는 덕전2리로 속하는 대사(大寺)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은 남양홍씨 일가가 마을을 개척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대사라는 지명은 옛날 이 마을에 복룡사(伏龍寺)라는 큰 절이 있음으로 해서 비롯됐다. 처음에는 한절골, 한지골 등을 불리다가 이를 한자로 바꿔 대사(大寺)가 됐다.
대사마을 아래의 죽전은 마을뒷산에 대나무밭이 있어 죽전(竹田)이라는 지명을 얻었는데 덕대산에서 발원한 냇물이 마을 앞을 흘러 개울가에 마을이 있다 해서 개울마로도 불린다.
덕전3리로 속하는 세송마을은 조선시대 초 담양전씨(潭陽田氏) 일가가 마을을 개척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시 마을 주변으로 작은 소나무가 많아 가늘세(細)자에 소나무송(松)자를 써서 마을 이름을 세송(細松)이라 했다고 한다.
이 마을은 임진왜란 후 크게 번성했는데 당시 민간에 널리 신봉되던 예언서인 ‘정감록(鄭鑑錄)’에 송(松)자가 붙어있는 지명으로 몸을 피하면 목숨을 보존할 수 있다 해서 피난처로 각광을 받은 것과 관련이 있다.
1905년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고 마을 뒷산에 직지사역이 세워지면서 마을에 여러가지 변화가 일어났는데 마을이 아랫마와 윗마로 나뉘었을 뿐만 아니라 대항면주재소가 역 앞에 들어서는 등 일약 대항면의 중심지로 떠오르기도 했다.
그런데 김천역과 추풍령 사이의 철로가 직선과는 거리가 먼 세송방면으로 비정상적인 곡선을 유지하고 있는 사정과 관련해 세송마을 일대가 명당인 것을 간파한 일제가 의도적으로 혈맥을 끊기 위해 철로를 우회해 이곳을 지나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오고 있다.
세송마을에는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박이룡 장군의 신도비와 묘소가 있다. 장군의 신도비는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손자이자 명문장가였던 영의정 정호(鄭澔 1648-1736)가 지어 더욱 유명해졌다.
신평마을은 왕대와 함께 덕전4리로 속하는데 1870년 전주이씨 양녕대군파 후손들이 지금의 신평마을 아래를 일컫는 덕국에 정착해 살기 시작하고 뒤이어 선산에서 김해김씨 일가가 들어와 넓은 들판에 새로 마을이 들어서 신평(新坪)이라 했다고 한다.
신평은 예로부터 하천을 경계로 이웃하고 있는 용복마을과 줄다리기를 해왔는데 1932년 군중이 모이는 것을 경계한 일제에 의해 금지된 이후 명맥이 끊겼다가 지난 2001년부터 김천문화원 주관으로 매년 단오절에 맞춰 줄다리기를 재현해 오고 있다.
오룡주 전설이 전하는 대룡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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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룡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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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룡리(大龍里)는 대항면의 첫 마을로 조선시대에는 김산군 대항면에 속한 새터, 용복, 행정동으로 불렸다. 1914년 다수동의 이로리 일부와 봉산면의 옛 지명인 파며면 하지리 일부, 행정, 용복마을을 합해 대룡동이라 고치고 1971년 반곡을 대룡1동으로 용복과 행정을 2동으로 분동했다.
국도 4호선 변에 위치한 반곡마을은 동쪽으로 다수동과 접하고 남쪽으로 덕대산 자락인 오룡산 아래 자리 잡고 있는데 김해김씨가 집성촌을 이뤄왔다.
새로 생긴 마을이라고 새터, 신기(新基)라 하다가 마을 일대의 들판이 마치 밥상처럼 생겨 소반반(盤)자에 골곡(谷)자를 써서 반곡(盤谷)이라 했다고 한다.
마을 뒤에는 덕대산에서 흘려내려 다섯 마리의 용과 같은 형상을 한 오룡산(五龍山)이 있는데 오룡산에 사는 다섯 마리 용이 물고 있는 여의주를 상징하는 오룡주(五龍珠)라고 하는 다섯 개의 바위가 마을 맞은편 들판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여의주 형상의 바위가 있는 곳이란 뜻으로 이 일대를 여의밭골이라 불렀는데 1970년대 경지정리를 하면서 바위가 모두 묻히고 말았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마을청년회에서 1989년 덕대산에서 자연석을 골라 마을 앞에 다시 오룡주(五龍珠)를 세웠다.
대룡2리로 속하는 행정과 용복마을은 서로 이웃한 마을로 1800년대 초 김해김씨 일가가 마을을 형성했다고 전해진다. 마을을 개척하면서 심은 은행나무가 마을의 정자역할을 해주어 은행나무행(杏)자에 정자정(亭)자를 따서 행정(杏亭)이라 했다고 한다.
또 그 은행나무가 일대의 명물로 자리 잡으면서 어룡정(魚龍亭)으로도 불리면서 마을지명을 어렁정이, 어렁지라고도 했다.
마을 지명의 배경이 된 마을북쪽 하천변에 있던 은행나무는 1936년 병자년 수해 때 유실되고 지금은 흔적조차 없다.
행정마을과 접한 용복마을은 1810년 전주이씨 이승주(李承周)가 처음 들어와 살았다고 한다. 마을 인근의 오룡산 다섯 마리 용 중에서 한 마리가 내려와 이 마을에 엎드려 있다 해서 용용(龍)자에 엎드릴복(伏)자를 써서 용복(龍伏)이라 했다고 한다.
마을지명이 된 용이 엎드려 있는 형상이었다는 야산은 1980년대 공장을 신축하면서 사라졌다.
□대항면의 문화유산
직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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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지사 대웅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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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사(直指寺)는 아도화상이 417년 선산의 도리사를 창건하고 나서 그 이듬해에 김천 황악산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 산 아래에도 절을 지을 만한 좋은 터가 있다”라고 해서 절을 지으면서 곧을직(直)자에 손가락지(指)자를 따서 직지사(直指寺)라 했다고 한다.
신라가 불교를 공인한 527년(법흥왕14년)보다 110년 전에 창건됐다는 사실을 통해 볼 때 도리사와 함께 신라 불교의 발상지이자 포교의 전진기지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유교를 국시(國是)로 한 조선의 개국과 함께 전국 대부분 사찰이 탄압을 받게 됐는데 직지사는 1399년 조선 2대 정종(定宗)의 태(胎)를 직지사 대웅전 뒤 북봉에 안치함을 계기로 태실을 수호하는 수직사찰(守直寺刹)로 지정돼 배불(排佛)의 그늘을 벗어날 수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승병장으로 명성을 떨친 사명대사(四溟大師)의 출가 사찰이라 해서 왜병의 방화로 43개의 전각 중 일주문, 천불전, 사천왕문을 제외한 40동의 크고 작은 전각이 소실되는 화를 입었다.
1911년 일제 강점기에 반포된 사찰령에 의해 해인사의 말사로 편입되기도 했으나 1954년 본산으로 승격되면서 사세를 차츰 회복했고 국내 25본산 가운데 하나로서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이며 인근 5개 시·군, 54개 사찰을 말사로 거느리고 있다.
직지사에는 국보 제208호인 도리사 금동육각사리함을 비롯한 보물 11점이 소장되어 있으며 운수암 등 7곳의 암자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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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전(毘盧殿)은 직지사에서 가장 유명한 불전으로 일주문, 천왕문과 함께 임진왜란의 병화를 모면한 불전으로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14개의 나무계단에 경주옥돌로 만들어진 천개의 불상이 모셔져 있어 천불전(千佛殿)으로 불린다.
매계 조위 묘소와 모친 문화유씨 묘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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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면 복전리 마암산에는 김천을 대표하는 학자인 매계(梅溪) 조위(曺偉 1454~1503)선생의 묘소가 있다. 매계는 성종 때 도승지를 역임한 명문장가로 홍문관 수찬으로 있을 때 당나라 두보(杜甫)의 시를 처음으로 언해했는데 이것이 ‘두시언해(杜詩諺解)’로 우리나라 고어, 고문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1492년에 매형(妹兄)인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문집을 편찬하라는 성종의 명을 받고 점필제가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문집에 수록했다가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유배를 당하고 순천 유배지에서 생을 마치자 동생 적암(適岩) 조신(曺伸)이 이곳 마암산 선영에 안장했다.
2001년 마암산 선영에 대한 보수공사 때 모친인 문화류씨(文化柳氏) 묘소에서 매계의 친필 묘지석(墓誌石)이 발견돼 2006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92호로 지정, 대구국립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1495년 문화류씨가 세상을 떠나자 조위가 호조판서 홍귀달(洪貴達)로 부터 묘지명을 받아 직접 글을 새긴 후 묘소 앞에 묻었다고 전해진다.
□대항면의 자랑
직지문화공원, 세계도자기박물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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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면 운수리에 위치한 직지문화공원은 음악조형분수, 광장, 2단 폭포, 휴게시설, 어린이종합놀이시설, 산책로 정자 등과 시비(詩碑) 20점, 조각작품 50점이 설치돼 있는 문화공원으로 사철 시민을 비롯한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직지문화공원 맨 위쪽에 위치한 김천세계도자기박물관 역시 자기 500점, 크리스탈 500점을 감상할 수 있는 전시실 외에도 자료실, 영상실이 설치돼 있다.
도자기박물관 뒤엔 백수문학관이 위치하고 있다. 백수 정완영 시인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전시실 외에도 세미나실, 자료실, 집필실 등이 갖춰져 있으며 매년 20주 과정의 문학아카데미(시조, 시·수필 강좌)가 운영되고 있다.
직지사 후문 옆엔 무궁화공원이 위치하고 있다. 이곳엔 무궁화 60종 4천450그루 외에도 39종 1만3천120그루의 나무가 이곳을 찾는 사람들을 반기고 있다.
□대항면의 산
황악산
황악산(黃嶽山)은 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과 충청북도 영동군 매곡면, 상촌면에 걸쳐있는 백두대간상에 놓인 산으로 비로봉(1,111m)과 신선봉(944m), 백운봉(770m), 운수봉(740m) 등 고봉으로 이뤄져 있다.
황악산은 누를황(黃)자에 큰산악(嶽/岳)자를 쓰는데 이 산이 한반도 남부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어 다섯 방위를 상징하는 오방색(五方色)의 중앙을 가리키는 황(黃)자를 딴 것이며 산이 지나치게 완만하며 여성적이어서 기운이 약하다 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비보(裨補: 보완해 도움)의 목적으로 악(嶽/岳)자를 썼다고 전한다.
원래는 두루미(학) 학(鶴)자를 써서 황학(黃鶴)이라 했다는 설이 있다. 이 산에 예로부터 두루미(학)이 많이 서식하고 또 산이 바위가 없는 육산(肉山: 바위산을 칭하는 골산(骨山)과 반대되는 개념의 돌이 없는 평탄한 산)인 관계로 지극히 원만해 우리조상들은 선비의 기품을 담은 학을 흠모해 황학이라 했다가 지나치게 유약해 지기(地氣)가 약하다는 여론에 따라 험준한 바위산에 통상 붙는 큰산악(嶽)자로 바꾸었다는 설도 있다.
□대항면의 특산품
호두, 전국 총생산량 40% 차지
억대농이 12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진 대항면의 특산물은 단연 포도. 호두, 표고버섯이 그 뒤를 잇고 있다. 포도는 500농가가 266ha에서 3천880톤을 생산하고 호두 또한 175농가가 30ha에서 300톤을 생산, 전국 총생산량의 40%를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표고버섯은 42농가가 15ha에서 300톤을 생산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가운데 호두가 가장 많이 생산되는 마을은 주례리 화실. 이 마을엔 황악산호두영농조합법인이 조직, 활성화되고 있는가 하면 호두가공공장이 설치, 운영되고 있으며 생산량 2·3위를 차지하는 운수리, 대성리에도 호두가 이 지역 사람들을 붙들어 산 속에 살도록 하고 있다.
□대항면의 산업체
김천과하주 양조장
대항면엔 가동 중인 기업체가 8개소로 적은데다 대부분 영세한 편이다.
그 중 가장 종업원 수가 많은 기업체는 가정용 정미기를 제작하는 신농공업사. 종업원 수가 30명에 이른다. 그밖에 P.T.L(한미타올, 냅킨류 생산), 대룡금속(수도꼭지), 대한통신(방송기기, CCTV), 김천과하주(민속주), ㈜KNH(전원제어장치)와 엘엠테크, 주안테크 등이 있으나 종업원 수는 2~20명이 고작이다.
이 가운데 굳이 한 업체를 소개한다면 대항면 향천리 791-1번지에 위치한 김천과하주 양조장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조선 4대 명주로 손꼽히는 과하주를 고 송재성(송치과 원장․김천문화원장 역임)씨가 재현에 성공(1986년)했다. 1987년 경상북도무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받아 4년 뒤인 1991년부터 지금까지 제조되고 있는 과하주는 1999년 농림부로부터 전통식품명인 제17호로 지정받은 송강호 대표가 대이어 생산하고 있다.
□대항면의 학교
<대룡초등학교>
대항면 대룡리 769-11번지에 위치한 대룡초등학교는 1948년 9월 2일 대룡국민학교로 개교돼 1996년 3월 1일 대룡초등학교로 교명이 변경되고 2008년 3월 1일에 특수학급 1학급이 신설됐다. 2012년 4월 1일 동식물사육장과 암석원이 설치된 대룡초등학교는 2015년 현재 2천942명의 졸업생이 배출됐다.
<직지초등학교>
대항면 향천리 589번지에 위치한 직지초등학교는 1935년 7월 1일 직지공립보통학교로 개교됐다. 1941년 4월 1일 직지국민학교로 교명이 변경되고 1995년 3월 1일 직지국민학교 대성분교장이 통합됐으며 1996년 3월 1일 직지초등학교로 교명이 변경됐다. 2011년 12월 31일 전국100대 교육과정 우수학교에 선정된 직지초등학교는 2015년 현재 77회에 걸쳐 5천315명의 졸업생이 배출됐다.
권숙월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