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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 |
ⓒ 김천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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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서쪽으로 감천을 경계로 조마면과 이웃하며 동쪽으로 농소면과 접하고 있는 감천면은 조선시대까지 성주군 관할의 신곡면과 김산군 고가대면에 속했던 것이 1906년 신곡면이 김산군에 편입되고 1914년 감천면이 신설됐다.
감천유역에 인접한 관계로 토질이 비옥해 금송평야, 도평평야, 진만리들, 개양지들 등 평야지가 넓게 형성돼 곡창지를 이뤘고 1970년대 이후 과수원이 야산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감천이라는 지명은 인접한 하천인 감천(甘川)에서 비롯됐고 도평리의 문랑효랑 정려각, 무안리의 김녕김씨 효행비 등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효행의 고장이며 병자호란 때의 의병장 이언이 장군의 충절이 살아 숨 쉬는 충효의 고장이다.
□마을과 전설
용과 호랑이의 기운이 서린 용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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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용마을 앞산 |
ⓒ 김천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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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호1리는 복용, 매화, 선바위 등 세 마을로 구성돼있다. 1914년 성주군 신곡면에서 김천군 감천면으로 이관되면서 복용(伏龍)의 용(龍)자와 복호(伏虎)의 호(虎)자를 따서 용호동(龍虎洞)이라 했다.
이들 세 마을은 복룡의 화심(花心), 매화(梅花), 선바위의 연화(蓮花) 등과 같이 꽃과 관련된 지명이 많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풍수지리로 볼 때 마을이 물 위에 떠있다는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에 해당된다는 사실과 무관치 않다.
복룡마을은 1670년 경주최씨 일가가 들어와 마을서쪽 구릉지에 마을을 개척하고 살면서 마을이 연꽃의 중심에 해당해 화심(花心)이라 했다. 그러다 뒤에 김해김씨가 이거해 본격적으로 마을이 커지면서 마을 앞산의 형상이 용이 엎드려있는 듯해 엎드릴복(伏)자에 용용(龍)자를 써서 복용(伏龍)이라 했고 마을 앞에 큰 저수지가 있어 못골로도 불렸다.
또한 마을 앞에는 뒤로 만 리, 앞으로 만 리나 된다는 진만리들이 펼쳐져 있으며 옛날 들판이 넓다고 소문이 나서 한양의 고관들이 말을 타고와 구경을 하고 갔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회자된다. 들 한가운데는 망태기처럼 생겨 이름 붙여진 망태샘이 있는데 근년에 관정이 개발되기 전까지 이 샘물로 일대 일곱 마지기 논에 물을 댔다는 유명한 샘이다.
복용과 선바위 사이 도로변에는 매화동이 있다. 조선 선조 때 김녕김씨 김연(金演)이 이거해 마을을 형성하면서 인근에 매화꽃이 만발해 마을이름을 매화(梅花)라 했다고 하고 새로 마을이 형성됐다 해서 새뜸으로도 불린다.
매화 위에는 입암(立岩), 선바위라 불리는 마을이 있는데 1650년 남평문씨 문응서(文應瑞)가 칠곡 약목에서 이주해 마을을 형성했다고 전해지며 마을 앞에 큰 바위가 세워져 있어 선바위라 했다고 한다.
조마면 최남단에 위치하면서 조마면 신왕리, 삼산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복호, 하평, 상평마을은 조선시대 성주군 신곡면에 속해있다가 1906년 김산군 신곡면, 1914년 감천면 용호동이 됐으며 1949년 용호2동으로 분동됐다.
고당산 자락의 고방골 입구에 위치한 복호동은 성산이씨(星山李氏) 인주공파(仁州公派) 22세손인 이망룡(李望龍)이 1600년대 말 성주에서 입향한 이래 대대로 성산이씨 집성촌을 이뤄왔다.
이 마을에는 진주강씨 진사 남와(南窩) 강설(姜渫)과 셋째 아들인 이조참의 기재(耆齋) 강여호(姜汝)를 모신 모원재(慕遠齋)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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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원재 |
ⓒ 김천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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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호라는 마을지명은 마을을 개척할 당시에 고당산으로부터 흘러내린 마을 앞산의 지세가 마치 호랑이가 엎드려 있는 것과 같아 엎드릴 복(伏)자에 범호(虎)자를 써서 복호(伏虎)라 했다고 한다.
복호동과 함께 대대로 성산이씨 집성촌을 이뤄온 하평마을은 1760년대 복호에서 광평으로 이주한 성산이씨 일가들이 정착해 형성한 마을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금뜸으로도 불린다.
하평마을에는 성산이씨 중시조를 모신 경국재(景菊齋)라는 재실이 세워져 옛 광평마을이 있던 개양지들을 굽어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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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국재 |
ⓒ 김천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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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평마을의 폐동과 관련해 풍수지리와 관련된 흥미 있는 전설이 전해진다. 원래 하평마을이 있던 개양지들 일대는 풍수지리로 봤을 때 물에 떠있는 돛단배의 형국으로 마을 앞 대방천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면 마을이 물에 잠길 것이라는 예언이 전해져왔는데 1936년 병자년에 큰 비가 내리면서 하천이 범람해 마을이 물에 잠기고 말았다는 것이다.
칠성방구 전설이 전하는 무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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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성방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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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안1리는 삼거리, 외안, 기산 세 마을로 이뤄져 있다.
조선시대까지 성주군 신곡면에 속했다가 1906년 김산군으로 이속되고 1914년 인근의 무릉, 신안, 통샘말, 대동과 함께 감천면이 신설되면서 무릉(武陵)의 무(武)와 신안(新安)의 안(安)자를 따서 무안리(武安里)로 이름했고 1949년 무안1동으로 분동했다.
성주군 벽진면과의 경계를 이루는 고당산 아래 자리한 세 마을은 해주오씨와 경주최씨가 집성을 이루고 있는 마을이다. 원래 파평윤씨 일가가 지금의 기산마을로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면서 마을의 터를 잡은 곳이라 해서 터골이라 하고 한자로는 기산(基山)으로 썼다. 뒤에 1700년 경주최씨 일가가 입향해 마을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산세가 소쿠리 즉, 곡식을 고르는 칭이처럼 생겼다고 터기(基)자를 칭이기(箕)자로 고쳐 기산(箕山)이라 했다고 한다.
외안마을 뒤로는 해주오씨 재실인 후원재(厚遠齋)가 고당산을 배후로 높이 섰는데 고당산에 이르는 여러 골짜기 중 불당골과 개밥골이라는 지명이 특이하다.
옛날 절이 있던 자리에 석탑만이 남아 있어 불당골, 탑골이라 불렸는데 이 탑에 공을 들이면 효험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원근각지의 많은 사람들이 찾던 명소였으나 언제부터인가 탑도 사라지고 말았다고 한다.
또 그 옆에는 개밥골, 개가죽골로 불리는 또 다른 골짜기가 있는데 옛날 가족같이 주인을 따르는 개가 있어 영물로 이름이 났으며 어느 날 주인을 따라 밭에 갔다가 갑자기 죽어버렸고 이를 안타깝게 여긴 주인이 밭에 묻어 준 후부터 ‘개가 죽은 골짜기’라는 뜻의 개가죽골이라 불렸다는 것이다.
외안마을 아래 도로변에는 한국전쟁 후 피난민들의 정착을 위해 무안천변에 임시로 주거지를 만들었다는 작은 마을이 있는데 무안 1, 2, 3리의 갈림길에 마을이 있다 해서 삼거리(三巨里)로 불린다.
삼거리에는 칠성방구라 불리는 거대한 바위가 있어 인근주민들이 소원을 기원하는 제단으로 이용됐으나 어느 해인가 공사 중에 바위가 여러 갈래로 깨어져 지금은 일부만 남아있다.
무릉, 재실마, 통샘말은 인근의 삼거리, 기산, 외안, 큰골과 함께 1914년 무안동에 속했다가 1949년 무안2동으로 분동했는데 동쪽으로 농소면 봉곡리 노산마을과 경계를 이루며 고당산 자락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
1730년 동래정씨 정한필(鄭漢弼)이 칠곡에서 이거해 마을을 형성한 후 대대로 동래정씨 집성촌을 이뤄온 무릉마을은 고당산자락의 무안천변에 위치하고 있다. 주변 경치가 아름답고 살기 좋은 마을이라고 무릉도원(武陵桃源)에 비유해 무릉(武陵)이라 이름했다고 알려진다.
마을입구에는 김녕김씨 효행비와 정려각이 이방인을 먼저 맞는데 마을 주민 김갑상씨에 따르면 김씨부인은 무릉마을의 정수인(鄭壽麟)에게 출가해 시부모를 극진히 봉양한 효부이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시자 3년 동안 매일같이 산소를 찾아 곡(哭)을 해서 무릎을 꿇은 자리에 구덩이가 파이고 오랫동안 풀이 자라지 않아 하늘이 낸 효부라고 칭송이 자자했고 마침내 지역 유림들의 청원으로 정려가 내렸다.
무릉마을로부터 농소로 연결되는 도로를 따라 1km 남짓 가다보면 좌측으로 작은 마을이 나오는데 1840년 전주이씨 일가가 들어와 새로 마을이 형성되면서 평안함을 기원했다고 신안(新安)으로 이름 붙여졌다.
뒤에 1856년 해주오씨 일가가 들어와 재실(齋室)을 세워 ‘재실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의 재실마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무릉마을에서 삼거리 방면으로 산 너머에 위치한 통샘말은 마을에 큰샘이 있어 통샘, 통정(桶井), 통샘말 등으로 불렸다고 하는데 대부분의 주민들이 떠나고 지금은 1가구만이 남아 마을을 지키고 있다.
옛날 물맛이 좋기로 유명해 원근 각지에서 몰려던 인파로 넘쳐났다는 옛 우물은 언제부터인가 메어지고 논으로 변해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무안1리 삼거리 맞은편에 자리한 무안3리는 인근에서 제일 큰 마을이라 해서 큰골,대동으로 불리는데 1560년 밀양손씨, 1616년 은진송씨가 들어와 본격적으로 마을이 형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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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녕김씨 정려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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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랑효랑의 효행으로 유명한 도평리
도평리는 원래 성주군 신곡면으로 속했다가 1906년 김산군으로 편입된 이래 1914년 소용, 후평, 평산, 도촌과 조마면의 신평을 합하면서 도촌(道村)의 도(道)자와 신평(新平)의 평(平)자를 따서 도평동(道平洞)으로 감천면 관할이 됐다.
옛날 숫돌을 채석했다는 숫돌봉 아래 자리 잡은 도평1리 소용골은 대대로 성주이씨 집성촌으로 이어져왔는데 1573년 성주이씨 밀직공파(密直公派) 12대손 진사 이근동(李根東)이 성주 수륜(修倫)에서 이거해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형성됐다. 마을 앞 들판이 지대가 낮아 수시로 침수돼 큰 늪(沼)을 이뤘다. 또 마을 뒤 숫돌봉의 지세가 풍수지리로 볼 때 용(龍)의 형세이며 숫돌봉에서 발원한 물길이 들판을 가로질러 천정천(天井川)제방을 따라 감천으로 들어가는 형국이라 늪소(沼)자와 용용(龍)자를 따서 소용(沼龍)이라 했다고 한다.
이 마을은 병자호란 때 의병을 모아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이언의(李彦儀 1600~1637)장군을 배출한 충절의 마을로서 마을주민들은 자부심이 대단했다.
특히 마을뒷산인 숫돌봉의 끝단에는 의마총(義馬塚)으로 불리는 말무덤과 그 말을 기리는 의마비(義馬碑)가 웅장하게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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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마총 |
ⓒ 김천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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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이씨종친회장을 역임한 마을주민 이원준(85세)씨의 말에 의하면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이언의는 의병을 모아 적에 대적하며 혁혁한 공을 세우고 경기도 쌍령(雙嶺)전투에서 전사한 용장이었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수일 후 마을뒷산에서 말 울음소리가 들려 나가보니 장군이 타던 말이 피묻은 갑옷을 물고 쓰러져 있었고 울기만 할뿐 먹지도 않고 3일 만에 죽었다. 주인을 끝까지 섬긴 의로운 말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말이 쓰러져있던 자리에 말을 묻어주고 의마총(義馬塚)이라 이름하고 뒤에 의마비를 세웠다.
끝내 장군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후손들은 말이 물고 온 피묻은 장군의 갑옷을 의마총 맞은편에 묻고 의관장(衣冠葬)으로 대신했다.
나라에서는 장군의 충절을 높이 평가해 충장공(忠壯公)이란 시호를 내렸고 후손들은 장군의 묘소 아래 영모재(永慕齋)라는 재실을 세워 입향조인 진사 이근동과 아들인 충장공 이언의의 위패를 함께 모셨다.
도로변에 좌우로 자리한 평산, 후평과 1914년 조마면으로부터 감천면에 귀속된 도촌 등 세 마을은 1949년 감천면 도평2리로 분동했다.
평산리는 1490년 칠곡 현감을 역임한 죽산박씨(竹山朴氏) 박수간(朴守幹)이 이주해 정착한 이래 대대로 죽산박씨 집성촌을 이뤘는데 마을주변의 산들이 야산을 이루며 평평해 평산(平山)으로 했다고 한다.
이 마을에는 문랑효랑이효각(文娘孝娘二孝閣)이라는 유명한 정려각이 있는데 1700년대 초 벌어진 묘지분쟁 사건으로 이야기가 거슬러 올라간다.
대대로 평산에 터를 잡고 살면서 예종 때 영의정까지 배출하며 명문가로 자리 잡고 있던 죽산박씨 집안에 어두운 그림자가 닥친 것은 1709년(숙종35년)의 일이다. 현감을 역임한 대구의 부호 박경여(朴慶餘)가 명당으로 이름난 감천면 무안리 큰골 죽산박씨 선산에 조부묘를 무단이장하면서 분란이 일어난 것이다.
당시 이 같은 박경여의 처사에 분개한 평산의 박수하(朴壽河)는 빼앗긴 명당을 되찾기 위해 경상감영에 고소했으나 패소했다. 이에 상경해 재차 상소하는 과정에서 경상감사와의 분쟁으로까지 비화돼 옥고를 치르다 병사하고 만다.
이어 박수하의 두 딸 중 당시 19세의 언니 문랑(文)은 부친의 원한을 갚기 위해 박경여의 조부 묘를 파헤치다가 피살되니 그 동생인 효랑(孝)이 두 차례에 걸친 상경투쟁으로 마침내 암행어사가 출두했다.
암행어사의 조사활동조차 이런저런 이유로 지지부진하던 차 검시관이 문랑의 시신을 확인해보니 시신이 썩지 않은 일이 발생하면서 그간의 사정이 세상에 알려지고 마침내 전국의 유림들이 강상(綱常)의 법도를 바로 잡으라는 상소가 빗발치고 성균관 유생들까지 들고 일어나 명당은 죽산박씨 집안으로 되돌아가고 문랑, 효랑 두 자매에게 1724년(경종8년) 정려가 내려졌다. 뒤에 효랑이 25세로 요절하자 영조(英祖)는 친히 어제정려명(御製旌閭銘)을 하사하며 후세에 귀감을 삼도록 했다.
평산 맞은편의 후평(厚平)은 1492년 경주최씨 최하일(崔河一)이 합천군 삼계(三溪)에서 이거해 살면서 후평이라 부르며 대대로 경주이씨 충렬공파가 집성을 이뤘으나 대부분 타처로 떠나고 지금은 마을의 명맥만 잇고 있다.
후평마을을 지나 조마면 방면의 견양산(犬陽山) 자락에는 도촌(道村), 도고리로 불리는 작은 마을이 나오는데 원래의 도촌마을은 언고개들로 불리는 들판 한가운데 마을이 있으면서 조마면에 속했고 1805년 전주이씨 이수목(李守睦)이 고령군 다산(茶山)에서 이거해 전주이씨가 많이 살았다.
1936년 병자년 수해 때 침수돼 폐동이 된 후 현재의 견양산 자락으로 마을을 옮기고 도촌이라 마을이름을 바꾸면서 1914년 감천면 관할이 됐다.
마을 뒷산인 견양산은 언고개를 중심으로 암캐가 가랑이를 벌리고 있는 암개음부설의 명당으로 알려져 왔는데 실제로 인근 소용골의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 늦도록 아들이 없어 고심하던 중 성주 벽진의 유명한 지관의 말을 듣고 선친묘를 암개음부에 해당하는 자리로 이장한 후 득남했다는 일화가 전설처럼 회자된다.
감천면의 중심 광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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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동마을 |
ⓒ 김천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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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천면 소재지인 광기1리는 기동과 더푸리(접화리)로 불리는데 조선시대까지 성주군 신곡면에 속했다가 1906년 김산군 관할로 이관됐다.
이때 인근 광암(廣岩)의 광(廣)자와 기동(基洞)의 기(基)자를 따서 광기동(廣基洞)이라 했는데 뒤에 빛광(光)자의 광기(光基)로 바뀌었다.
면사무소와 우체국, 농협, 지서가 소재한 더푸리는 1938년 감천면사무소가 광기3리 전동(田洞)에서 이전해 온 뒤부터 면소재지가 됐다.
기동(基洞)마을은 1860년 성주이씨 15세손인 충장공파 이원확(李元確)이 인근 도평리 시영골에서 이주해 정착한 이래 대대로 성주이씨 집성촌을 형성해오고 있다.
기동이라는 마을의 지명은 성주이씨가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소쿠리와 밀개의 지형이 어울어진 완벽한 마을터의 기본을 갖추고 있어 붙여진 것이다. 터골로 불리다 뒤에 이를 한자로 적으면서 터기(基)자에 마을 동(洞)자를 써서 기동(基洞)이라 했다고 한다.
기동마을 아래로는 구만리들로 불리는 들판이 드넓게 펼쳐져있다. 과거에는 밤나무숲이 우거져 봄으로 밤꽃이 흐드러지게 피면 장관이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새하얀 비닐하우스가 옛 밤꽃을 대신하고 있다.
기동으로부터 조금 위쪽에 위치해있는 더푸리는 한자로 접화리(蝶花里)로 쓴다. 일설에 이 일대가 과거에 수풀이 우거진 야산이라 인근의 처녀총각들이 모여들어 소풀을 먹이고 놀이를 하던 장소이다 보니 남녀간의 애정행각이 빈번했다, 이를 나비와 꽂이 만나는 것에 비유해 나비접(蝶)자에 꽂화(花)자를 써서 접화리(蝶花里)라 했다고 한다.
면소재지인 기동에서 도골재로 불리는 고개를 넘으면 둥디, 내동, 뒷골 등으로 불리는 광기2리가 골깊이 들어서있다. 이들 마을은 원래 성주군 신곡면에 속했던 둥당, 광암, 내동 세 마을이었는데 1906년 김산군으로 이속되고 1914년 인근의 마을과 함께 광기동으로 고쳐 신설된 감천면으로 속했고 1949년 광기2동으로 분동했다.
등당(登堂)마을은 인천이씨 이송(李松)이 임진왜란 때 피난을 와서 정착해 대대로 인천이씨 집성촌을 이루며 살았고 또 김해김씨 김종성(金鍾聲)이 1800년대 중반 조마 도암에서 이주해 정착하면서 김해김씨 집성촌을 이뤘다고 한다.
등당이라는 마을지명은 산을 올라와 집을 지었다고 오를등(登)자에 집당(堂)자를 쓴 것이다. 일설에는 마을뒷산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면 주변 산에 둘러싸인 마을의 형세가 등잔(燈盞)처럼 오목하게 생겨 등잔등(燈)자를 써서 등당(燈堂)이라했다고도 한다. 또 언제부터인가 마을 안쪽의 내동과 구별 짓기 위해 큰마을로도 불린다.
야산을 넘어서면 본동인 등당마을 뒤에 마을이 있어 뒷골로 불리기도 하고 마을입구에 크고 넓은 바위가 있어 넓을광(廣)자에 바위암(岩)자를 써서 광암(廣岩)이라 했다는 마을이 있는데 나중에 빛광(光)자의 광암(光岩)으로 바뀌었다.
조선시대까지 김산군 고가대면(古加大面)에 속했던 전동은 1914년 성주군 신곡면의 등당, 광암, 내동, 배다리와 함께 감천면 관할로 되면서 광기동이 되고 1949년 배다리와 함께 광기3동으로 분동했다.
전동은 김산군과 성주의 경계를 이룬 마을로 1914년 감천면사무소와 지서가 설치돼 면소재지 역할을 했는데 1938년 기동으로 면사무소와 지서가 이전됐다.
전동이라는 지명은 밭이 많아 밭전(田)자를 써서 전동(田洞)이라 했다고 한다.
이 마을 앞에는 조선시대에 건천원(乾川院)이라고 하는 관용숙소가 있었다고 하는데 광기2동 대밭골 뒷산에서 발원해 감천으로 합류하는 소하천인 새들내를 다른 이름으로 건천(乾川)이라 했다는 기록으로 볼 때 전동과 배다리 사이의 하천변에 원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도로변의 배다리는 조선시대 성주군과 김산군의 경계로 번성했으나 지금은 마을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몇 가구만이 명맥을 잇고 있다. 감천변 모래 위에 집을 지었다고 모래사(沙)자를 써서 사촌(沙村)이라고도 하는데 조선시대까지 성주군 신곡면에 속했다가 전동과 함께 1914년 감천면 광기동으로 이관된 마을이다. 이곳에 나루터가 있어 조마면 방면으로 갈 때 배를 타고 감천을 건너기도 하고 소금배가 낙동강을 거슬러 이곳까지 들어와 배다리라는 지명을 얻었다.
소나무로 유명했던 금송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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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미정 |
ⓒ 김천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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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김산군 고가대면에 속했던 원동과 대방은 1914년 감천면 금송리로 됐다가 1949년 금송1동으로 분동했다.
원동마을에는 입향조 이홍명이 자신의 호(號)를 따서 세운 사미정(四美亭)이 고풍스럽게 있어 벽진이씨 집성촌임을 상징하고 있다. 마을주민 이정효씨 말에 의하면 원동이라는 지명은 1648년(인조26년) 경렴서원(景濂書院)이 마을 앞에 세워진 후 서원이 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원동(院洞)이라 했다고 한다.
경렴서원은 김산군수 조송년(趙松年)이 세우고 김종직(金宗直), 조위(曺偉), 이약동(李約東)을 제향했다가 1673년(현종14년) 인근 이화리로 옮겼고 1658년(영조38년) 김산군수 윤담(尹淡)이 현재의 성내동 자산기슭에 이전했다고 하는데 1868년 서원철폐령 때 훼철된 후 복원되지 못했다.
원동마을과는 삼막골을 사이로 조금 떨어져있는 대방(大芳)은 성황대이 고개를 경계로 농소면 용암리 대방마을과 이웃하고 있는데 대방이라는 지명까지 두 마을이 같다. 농소 대방이 마을 앞에서 시작된 제방이 길게 월곡천으로 이어져있어 큰 제방이라는 뜻의 대방(大防), 또는 큰 마을이란 뜻의 대방(大坊)이라 했다면 이 마을은 향기방(芳)자의 대방(大芳)으로 옛날 인근 이화리(梨花里)에 배나무가 많아 붙은 지명이라 한다.
대방과 인접한 마을인 이화는 조선시대까지 김산군 고가대면에 속한 이아리(爾雅里)였는데 1914년 감천면이 신설되면서 인근의 대방, 상송, 하송, 원동과 함께 금송리가 되고 1949년 금송2동으로 분동했다.
마을이름이 이아리에서 이화리(梨花里)로 변경된 것은 1821년 박세근(朴世根)이 성주 벽진면 해수동에서 이주해 정착하면서 배나무를 심고 마을이름을 배이(梨)자에 꽃화(花)자의 이화리(梨花里)로 고쳤다고 한다.
이후 대대로 밀양박씨가 살았는데 지금도 49호 중 40호가 밀양박씨일 정도로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지좌동 새마을과 경계를 이루는 송곡, 상송, 하송은 감천면 초입에 위치한 마을로 1949년 금송3리로 분동했다.
이 마을은 1465년 기계유씨(杞溪兪氏) 유익명(兪益明)이 현재의 송곡마을에 들어와 살면서 일대에 소나무가 울창한 것을 보고 마을이름을 소나무 송(松)자에 골곡(谷)자를 써서 송곡(松谷)이라 했다. 이 마을의 소나무가 일제시대까지 전국적으로 유명해 금송(金松)으로도 불렸는데 금송리(金松里)라는 행정동명도 이 마을에서 유래됐다.
송곡마을을 기준으로 안쪽에 있는 작은 마을을 송곡 윗마을이란 뜻으로 상송(上松)이라 하고 그 아랫마을을 하송(下松)이라 했다.
상송마을 뒤로는 원속골, 대방골, 오록골, 막골 등 많은 골짜기들이 있는데 골이 깊어 피난처로 이용됐다고 한다.
하송마을은 송곡과 이웃하고 있는데 큰 마을인 관계로 편의상 금곡4리로 분동한 형식을 취하고는 있으나 한 마을이나 다름없이 인접해 있다.
하송마을 앞 한섬지기들에는 1970년 현재의 직선도로가 나기 전의 구(舊)도로가 속칭 비루모퉁이로 불리는 산자락에 일부 남아있는데 윤삼출씨 집 앞 산자락에 비석 두 기가 나란히 있다.
하나는 눌암(訥庵) 김한영(金漢英)의 신도비이며 또 다른 비는 선비 임감규(林監圭)의 처(妻) 달성서씨의 효행비인데 지금은 수풀에 가려져 찾기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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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한영 신도비 |
ⓒ 김천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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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천면의 문화유산
<문랑효랑(文娘孝娘) 정려각>
죽산박씨 집성촌인 감천면 도평리 263-1 평산에 위치한 문랑효랑정려각은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아버지의 신원(伸寃)을 위해 목숨을 바친 문랑, 효랑 자매의 지극한 효성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청하현감으로 대구의 권력가인 순천박씨 박경여(朴慶餘)는 명당으로 알려진 감천면 무안리 대동마을 큰골에 자신의 부친 묘소를 이장하면서 논란이 시작됐다.
큰골은 대대로 죽산박씨의 선산이었기 때문에 박경여의 처사에 이의를 제기하며 박수하(朴壽河)는 대구감영에 소송을 제기했다. 송사 끝에 무고로 몰려 박수하가 옥사하기에 이르자 19세인 장녀 문랑이 묘를 파내어 시신을 불태우다 박경여의 하인들에게 살해당하고 17세의 동생 효랑은 부친과 언니의 원한을 갚기 위해 남장(男裝)을 하고 상경해 1712년(숙종38년) 숙종의 어가(御駕)를 가로막고 하소연해 암행어사가 파견되기에 이르렀다.
진상조사 과정에서 당사자간 진술이 엇갈려 지지부진하던 차 언니 문랑의 시신에서 창에 찔린 상처가 발견되고 전국의 유림에서 박경여를 탄핵하는 상소가 빗발치자 마침내 묘터가 죽산박씨 집안의 소유로 되돌려지고 1724년(경종4년) 자매에게 정려를 내리고 효랑에게 80결(結)의 토지를 하사했다.
효랑이 합천군 용주면 고품리 남평문씨 문우징(文宇徵)에게 시집갔다가 25세로 요절했는데 일설에는 송사판결에 불만을 품고 있던 박경여가 효랑이 합천 시댁으로 오는 날 자객을 보내어 가마행렬을 습격해 살해했다는 설도 있다.
효랑의 산소는 합천군 용주면 우곡리 계성마을의 남평문씨 선산의 시아버지 세자익위사부솔(世子翊衛司副率)을 제수받은 문동도(文東道/1644-1699) 묘소 아래에 자리 잡고 있다.
영조는 효랑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자매에게 친히 문랑(文娘), 효랑(孝娘)이라는 시호와 함께 다음과 같은 어제정려명을 지어 내렸다.
문헌공(文憲公)의 자손 매맞아 죽은 넋이
남은 원혼을 어느 곳에 호소하랴
아내는 정숙하고 딸은 효도하며 종은 충절을 다하니
만고에 강상(綱常)을 밝힘에 제일가는 가문이로다.
문랑, 효랑의 정려각은 원래 이 자리에 함께 세워졌었는데 1916년 효랑의 시댁인 남평문씨 집안에서 효랑의 정려각만 별도로 시댁인 합천으로 옮겼다.
효랑의 정려각은 고품리 남편 문우중의 산소 옆에 자리하고 있는데 정려비 없이 ‘孝女竹山朴娘子之閭’와 ‘孝女竹山朴文娘孝娘之閭’라 새겨진 두 개의 정판만이 보존돼 있다.
두 자매의 효행은 입에서 입으로 이어져 일제강점기인 1934년 대구의 제일서당포에서 국한문 혼용체로 ‘박효낭전’이라는 제목의 소설로 출판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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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천면의 특산물
생산량 전국 3위 감천참외
#감천12, 참외
토지가 비옥한 감천면의 참외는 때깔이 좋은데다 맛 또한 좋아 전국에서 알아준다. 재배 역사가 40여년에 이르는 감천참외 생산량은 전국 3위. 성주, 칠곡 다음으로 많이 재배되는 것으로 파악됐다.
감천면의 주요특산물 현황을 보면 참외는 150농가가 170ha에서 5천500톤을 생산하고 자두는 329농가가 155ha에서 587톤, 딸기는 18농가가 10ha에서 200톤을 생산했다.
이 가운데 딸기 재배농가는 크게 늘어날 전망이다. 이는 재배기간이 12월 초부터 5월 초까지로 크게 덥지 않아 참외농사보다 수월한데다 소득이 높기 때문. 올해 24농가로 늘어났으며 내년에는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올해는 특히 4억원의 도비를 지원받았고 내년에는 더 많은 도비를 지원받을 예정으로 있어 딸기 재배농가는 더 늘어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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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천면의 산업체
㈜성도, 남도전기(주), ㈜에이치에스산업 등
감천면 관내엔 9개 기업체가 가동 중이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기업은 감천면 금감로에 위치한 ㈜성도. 전자파가 없는 바이오 발열장판과 발열방석을 생산하는 기업이다.
이밖에도 감천면 관내엔 벽돌을 생산하는 ㈜구산. 이밖에 남도전기(주), ㈜에이치에스산업, ㈜삼우트로닉스, ㈜리드텍스타일, ㈜조광, 보광리사이클, ㈜그린리싸이텍 등 업체가 있으나 대부분 영세한 편이다.
□감천면의 학교
감천초등학교
감천면 도평리 521번지에 위치한 감천초등학교는 1935년 6월 12일 감천공립보통학교 설립 인가를 받아 그해 7월 1일 개교됐다. 1941년 4월 1일 감천국민학교로 교명이 변경되고 1980년 12월 25일 태양열 교실 10개가 준공됐으며 1996년 3월 1일 감천초등학교로 교명이 변경돼 오늘에 이르렀다.
감천초등학교는 특히 2012년 교내에 골프 연습타석(실외 연습장)을 설치한 후 프로선수를 일주일에 세 번 초청해 방과후 수업지도를 하고 있으며 골프에 관심 있는 주민들도 이곳을 자주 이용하고 있다.
또한 드럼교실도 운영, 학생은 물론 주민들로부터 호응을 얻고 있는데 골프와 함께 경북도교육청으로부터 2014년 작은 학교 가꾸기 일환으로 지역문화체험교실에 선정됐다.
감천초등학교는 2015년 현재 제77회에 걸쳐 5천881명의 졸업생이 배출됐다.